미국 가계 소비력 회복이 경기 회복의 관건…돈 풀어 부동산 경기 살리려다간 더 큰 재앙
입력 2009-02-16 15:50:40
수정 2009-02-16 15:50:40
고유선 대우증권 애널리스트
후 국내 경기는 ‘L’자형 침체나 ‘U’자형 회복 대신 중간 형태인 접시형 모양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기대 수익률이 높은 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 기미가 살아나지 않고 있는데다 리스크 위험성이 여전히 높아 자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 효과가 당분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유선 대우증권 연구원은 국내 증권사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거시경제와 금리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애널리스트다. 일반적으로 거시 금리 담당 애널리스트는 호경기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지만 시장 방향성이 불투명한 침체기에는 그 어떤 업종 담당보다 바빠진다. ‘사후약방문’식 리포트가 넘쳐나는 가운데 향후 경제 상황에 대한 ‘가정’을 통해 길목을 짚어내는 고 연구원의 리포트는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07년 하반기 거시경제·금리 분야 베스트 애널리스트에 선정된 데에도 남다른 시각의 분석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고 연구원은 “이미 벌어진 상황에 대한 해설성 분석 보고서보다 위험이 따르더라도 시장의 궁금증을 조기에 발굴해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게 거시경제 담당의 핵심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그가 지난해 여름 내놓은 부동산 침체에 따른 국내 금융회사의 부실화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나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추가적 구조조정 자금 규모에 대한 최근의 리포트는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금융 위기 진화를 위해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향후 어느 정도의 자금을 추가로 투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5조 달러 규모의 부동산 버블과 3조 달러 규모의 금융상품 투신 손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부실 골짜기를 메우기 위해서는 최소 8조 달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미 7조 달러 가량을 투입 또는 투입하기로 했으니 향후 추가적으로 1조 달러 정도 투입되면 금융회사의 재무구조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전망했죠.”고 연구원은 “올해 대다수 전문가들이 기대하고 있는 ‘상저하고’의 경기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여러 전제 조건이 있는데 올 들어 나타나고 있는 지표들은 다소 회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조조정이 더디게 진행될 경우 하반기에도 잠재성장률 이하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경기가 소폭 회복되더라도 추세적 상승보다 ‘업다운’을 반복하는 지그재그 형태로 갈 가능성이 높죠.”고 연구원은 이어 “구조조정에도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국내 업체의 대체가 가능하고 국부 유출 가능성이 낮은 내부 부가가치 산업인 건설 업종에는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한 반면 반도체 업종처럼 해외에서 부가가치를 올리는 산업에는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다른 나라 경쟁 업체들의 재편을 기다리는 선별적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그는 “지난해는 주로 미국발 금융 위기가 금융회사에 집중됐지만 올해부터는 그 여파가 임금 소득자에게 불어 닥칠 것”이라며 “2∼3분기께 각종 경제지표상 호전 기미가 보인다면 큰 구조조정 없이 연착륙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파장이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증시의 ‘1월 효과’에 대해서도 고 연구원은 회의적 의견을 피력했다. “정부의 금융 정책 효과가 기업 투자와 가계 소비 패턴에 실제 변화를 가져오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지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금리 인하와 각종 정책 기대감으로 1월에 다소 반등 조짐을 보였지만 경기지표 악화가 가속화될 경우 국내 증시는 하반기로 갈수록 부진을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그는 미국 가계의 소비력 회복 여부가 향후 경기 회복의 관건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가계가 부채 상환 후 소비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돼야 하는데 현실은 어둡습니다. 국내의 경우 최근 규제 완화로 일부 지역 부동산 가격이 호가 상승을 보이고 있는데 유동성 공급을 통한 부동산 경기 회복은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부동산 대출 금융 부담이 가계 소득의 30%를 넘어서는 투자는 위험하다는 게 고 연구원의 지적이다. 그는 “5억 원짜리 아파트 구매를 위해 2억5000만 원을 대출받는 경우 연 5% 금리를 적용하면 이자가 1250만 원에 달합니다. 가구 소득이 최소 5000만 원 이상 돼야 하는데 실물경기가 급격한 침체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연소득 5000만 원짜리 가구가 늘어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반짝 호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물경기 회복 없이는 주택 경기가 살아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그는 최근의 금리 인하 효과와 건설사의 분양가 인하 러시로 전세 매매 격차가 작은 지방 아파트의 미분양은 일부 해소될 것이라고 전망했다.대우증권가 전망하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9%로 일부 마이너스 전망에 비해서는 높은 수준이다. 고 연구원은 “수출과 소비 모두 역신장이 우려되지만 지난해 적자를 기록했던 순지출이 흑자로 전환하고 있어 GDP 성장률은 미세하게나마 플러스를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국내 금융회사 및 기업의 유동성 위험 노출과 관련, “시중은행의 외화 차입금이 1분기 들어 지난해 4분기 대비 감소세를 보이고 있고 2분기부터는 지출 대비 자금 유입이 더 많기 때문에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면서도 “다만 회사채 만기가 4, 5월에 집중돼 있어 국채와의 스프레드 축소는 당분간 제한적일 것”이라고 설명했다.정책금리는 2%대가 사실상 바닥권인 만큼 추가 인하보다는 정부가 당분간 현 수준을 유지하면서 경기 방향과 연동해 움직일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사상 최저 수준의 금리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주식시장 등 위험 자산에 대한 자금 이동이 눈에 띄지 않는 점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재는 금융 위기 후유증 때문에 자금 이동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향후 경기의 방향을 판단하는 시점은 2분기께인데 기업 재고 수준과 회사채 발행 규모 등이 머니마켓과 경기 회복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지표가 될 것입니다.”금융 위기 후 미국 중앙은행인 FRB는 직접 회사채 매입에 나서는 등 기존 중앙은행의 역할을 뛰어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국은행이 은행채를 직접 사들이는 등 중앙은행의 역할을 확대하는 움직임이다. 고 연구원은 “과거 한국은행의 금리 정책은 시장에 후행하는 성격을 띠었으나 최근에는 금리를 시장에 시그널을 보내는 주요 매개체로 활용하고 있다”며 “시장에 대한 보다 민첩한 대응력이 아쉽긴 하지만 금리 변동에 따른 주식 채권 시장 움직임의 의미까지 읽어내려는 고민이 엿보이는 등 과거에 비해 시장과 소통하려는 노력 면에서는 크게 달라졌다”고 평가했다.“2분기까지 기업 재고와 회사채 발행 추이 등이 향후 경기 회복을 가늠하는 지표”글 김형호·사진 이승재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