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인 지금이 선진금융기법 발휘될 때…글로벌 네트워크 위력 보여주겠다”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겨울 들어 가장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친 지난 1월 10일.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은 350명의 임직원들과 함께 칼바람을 맞으며 대관령 선자령을 올랐다. 3년 전부터 매년 연초에 시산제를 위해 찾던 장소지만 올해 산행에 나선 임직원들의 마음가짐은 여느 해와 사뭇 달랐다. 미국 본사의 구제금융 요청 소식에 한국씨티은행까지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장과 고객들의 시선을 불식하느라 하 행장은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연말 8억 달러(1조 원) 규모의 자본 확충으로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확보한 후에야 시장은 불안한 시선을 거둬들였다.9년째 한국씨티은행을 이끌어오고 있는 하 행장은 한미은행 인수 통합 등 굵직한 현안들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면서 본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다. 미국 본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8억 달러의 자본 확충에 나선 것도 리스크 관리 능력이 뛰어난 하 행장이 최근처럼 격변하는 금융 환경 속에서 씨티은행의 한국 내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하 행장이 이날 산행 후 인근 식당에서 동행한 임직원을 모아놓고 “올해야말로 씨티은행의 저력을 보여줄 때”라며 기존 은행과의 차별화를 강조한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다. 그는 “올해 국내 은행들의 공격적 영업이 어렵다고 볼 때 증자는 차별화를 위한 실탄 성격”이라며 “하이브리드 채권 발행도 가능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기자본 확충이라는 점과 달러 유입 효과까지 고려했다”고 설명했다.글로벌 금융 위기에 한국이 더 민감했던 이유에 대해 하 행장은 한국의 금융 토양을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했다. 그는 “과거 외환위기를 통해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절감하고도 이를 망각한 채 또다시 너나없이 시장점유율 경쟁에 나섰던 게 금융권이 동시에 유동성 위기를 맞았던 원인 중 하나”라며 “전문 인력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경직된 순혈주의 조직 문화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 행장을 만나 한국씨티은행의 올해 계획과 한국 금융 산업의 현 주소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한국씨티은행은 국내 대형 시중은행 가운데 재무 건전성이 가장 튼튼합니다. 8억 달러 증자로 BIS 기준(바젤1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10.8%에서 13%대로, 기본자기자본비율(Tier-1)도 9.74%에서 11%대로 높아졌습니다. 이는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높습니다. 특히 건설 프로젝트 파이낸싱(PF)는 물론 중소건설사 대상 분양 대출이나 인수·합병(M&A) 여신 등이 전혀 없다는 점은 리스크 노출 측면에서 타 은행들과 확실히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합병 전 한미은행시절에는 부동산 PF가 일부 있었지만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없애 왔습니다. 부동산이 활황을 보인 지난 4년간 타 은행들은 자산을 평균 48%가량 늘렸으나 한국씨티은행은 자산 최적화에 역점을 둔 덕분에 결과적으로 외부 리스크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2009년은 한국씨티은행이 기존 국내 은행들과 차별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원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선진 금융 기법은 경기가 좋을 때는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호황기에는 단순히 누가 더 공격적이냐에 이목이 쏠리는 경향이 있죠. 한동안 ‘선진 금융 기법을 선보인다면서 대체 어디 갔느냐’는 비아냥을 받았던 것도 이런 환경 때문입니다. ‘은행업은 리스크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만 리스크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타 은행들이 크게 위축된 올해가 기회라고 봅니다. 글로벌 네트워크는 씨티의 최대 강점입니다. 삼성전자가 아시아 기업 최초로 3개 대륙간 자금 이동을 자동화해 글로벌 달러 유동성을 한 계좌에서 집중 관리하는 서비스를 구현한 것도 씨티의 네트워크 덕분입니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진출을 도와주는 파트너는 물론 국내·외 기관투자가를 이어주는 역할, M&A 자문, 해외법인 현지지원 등도 씨티의 강점입니다.조직의 유연성이 시장 요구에 비해 크게 뒤처지는 점입니다. 순환 보직 성격의 인사와 순혈주의는 조직원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립니다. 임금도 성과와 능력에 따라 조정 폭이 넓어야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거나 영입할 수 있는데 국내의 경우 너무 압축돼 있습니다. 신입 직원 임금도 시장 상황이나 업무와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고용 문화는 비정규직 인원을 늘리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미국의 경우 은행 운영책임자를 택배 회사 출신이, 소비자금융은 소비자를 가장 잘 아는 식품 제조 판매 회사에서 영입하는 등 업종에 관계없이 최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발굴, 채용합니다. 국내 은행권도 임금 밴드를 넓히고 진입 장벽을 낮춰 외부 인재 확보가 보다 용이한 문화를 조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행권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경기에 따른 특정 사업 분야에 대한 지나친 쏠림 현상이 위험을 확산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현재 국내 시중은행들은 은행 간 상품이나 포트폴리오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주택 담보대출 PF 등 경기에 따라 특정 분야로 몰려가는 무리 행동(herd behavior)이 두드러집니다. 먹을 게 있을 땐 모두 숟가락을 들다가 책임질 때 순식간에 사라지죠. 은행의 기본은 리스크를 관리하는 비즈니스입니다. 과도한 레버리지나 공격적 투자를 통한 외형 확장이 아니라 신용과 위기를 관리하면서 이익을 창출하는 게 정석입니다. 마치 부동산 시장에서 전세와 매매가격의 차이가 좁혀지면 대세 상승세로 돌아서는 것처럼 금융 위기는 회사채와 국채의 금리차가 줄어 들 때 찾아옵니다. 이는 국채보다 위험도가 큰 회사채에 대한 투자가 많아진다는 의미로, 시장 투자자들의 성향이 그만큼 공격적이고 유동성이 넘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주목받았던 러시아 브라질과 전 세계의 공장인 중국, 정보기술(IT) 강국인 인도는 산업 특성 면에서 당연히 분리해 접근해야 합니다. 특히 성장 동력이 강한 이머징 국가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점에 한층 선진화된 경제와 개방적 시장을 갖고 있는 한국이 주목받게 된 것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금융과 실물경제의 침체가 동시에 발생한 위기 상황에서는 덜 개발된 시장이 오히려 안정적인 기현상을 보이지만 이는 일시적일 뿐입니다. 결국 개방된 경제 시스템을 갖춘 국가가 보다 빠르게 회복할 있는 가능성이 높은데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제적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타선진국보다 이른 시간 내에 한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당초 2분기께 바닥을 찍고 하반기에는 다소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난 4분기 성장률이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게 나타나는 등 실물경제 하강 속도가 가파릅니다. 미국의 각종 경제 지표 악화도 심화되고 있어 생각보다 경기 침체의 골이 깊고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씨티그룹은 글로벌 겸업은행(Global Universal Bank) 모델을 추구합니다. 위험 자산 부분을 대폭 개선하면서 자본력과 유동성 강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4개 지역으로 나눠 책임 경영을 하고 있습니다. 금융 특히 은행업은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 분야여서 글로벌 규모의 이점이 강합니다. 반면 보험은 타 금융 분야와의 시너지가 상대적으로 낮죠. 2004년 트래블러스 보험 사업을 매각한 것도 이런 판단에서입니다. 금융 위기 이후 씨티그룹은 군살빼기 구조조정 강점극대화 등 3단계 전략 하에 움직이는데 현재는 2단계가 주력·비주력 업무 분리, 주력 업무의 구조조정이 진행 중입니다. 한국에서는 지주회사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데 법적 제도적 환경이 보완된 후 본격 추진할 생각입니다.최근 가처분 결정은 타 은행의 관련 사안인데다 케이스별로 달라 구체적인 언급이 어렵습니다. 다만 키코는 가입 당시 상황에서는 기업들에 환 헤지를 위한 적절한 상품이었지만 과도한 헤징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례를 동일한 잣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씨티는 가입 이전에 고객에 대한 상품적합성 분석 상품의 특성과 그에 따른 내재 위험을 고객에게 충분히 설명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될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시중은행의 대출 자산을 유동화하기 위한 단계입니다. 미국은 지나친 유동화가 문제인 반면 한국은 유동화가 너무 안 돼 있습니다. 한국도 은행 예금이 더 이상 늘지 않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만큼 자산유동화를 본격 검토해야 합니다. 한국씨티은행이 변동금리 주택 담보대출 관련 데이터를 제공하고 주택금융공사가 이를 이용해 주택 담보대출 유동화를 위한 가격 평가 모델을 개발할 계획입니다. 주택 담보대출 유동화 시 변동성이 심한 금융시장에서 자산운용 및 자금 조달에 한층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신용카드 지출 추세를 살피면 외부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도 경기뿐만 아니라 패션 트렌드까지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하반기의 경우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카드 지출 규모는 크게 줄지 않았는데 고유가 등 물가 상승 요인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또 백화점이나 대형 유통점에도 자주 가는데 최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줄이 크게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런 생활지표들은 때론 어떤 경제 데이터보다 현실 경기흐름을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한국씨티은행장서울대 무역학과미 노스웨스턴대 MBA씨티그룹 한국자금담당 총괄이사한미은행장글 김형호·사진 이승재 기자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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