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ame dePompadour
리를 등지고 베르사유에서 통치했던 루이 14세가 72년간의 긴 통치를 끝내자 오를레앙 공은 어린 루이 15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그는 감수성이 높은 예술 취향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파리에 작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섭정했기 때문에 자연히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게 됐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촉발된 레장스라 불리는 시대의 파리는 전례 없는 여성의 활력이 만연했다.사랑을 속삭이기엔 너무 크고 웅장했던 건축이 작고 아담해 연인끼리 속삭이기에 알맞은 구조의 실내장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실수요자로 등장한 여성들이 스스로 사용할 과장됨 없는 가구와 취향이 중시되는 예술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어떤 국가나 시대에도 남성 중심의 문화는 웅장하고 과장됨을 지향한다. 그 상징이 바로크 건축이라면 이제 로코코 양식은 여성 취향적인 요소들로 구조된다.베르사유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들이 루이 15세 왕조에 이르면 프랑스가 단연 트렌드 세터의 위치에 오르는 동력이 된다. 단조로운 디자인에서 화려하고 다양한 가구들이 이 시대를 장식했으며, 새로운 접착제가 발명되면서 여성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부드러운 형태의 선형(線形)을 가구에 응용했다. 프랑스 전체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부르주아들의 삶이 풍요해진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여성들이 역동적으로 사회 문화 정치를 이끌어가던 그 시대의 스타일은 1760년 절정을 이뤘으며 이후에는 점차 클래식 스타일로 그 방향을 선회한다. 그리고 이때의 양식을 퐁파두르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마담 퐁파두르의 역할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일 것이다.베르사유에서는 루이 15세가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성대한 파티가 열린다. 이 파티에서 루이 15세 발걸음 앞에 손수건을 떨어뜨림으로써 왕이 손수 집어 여인에게 전해주는, 우아한 세기의 연애를 연출한 여인 마담 드 퐁파두르가 22년간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그녀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지적이고 매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외교와 전쟁에도 개입했으며 새로이 육군 사관학교를 만들어 평민의 자녀들도 장교가 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이 사관학교에서 코르시카 이민자인 나폴레옹이 탄생할 수 있었으며 그가 태어난 섬 코르시카도 프랑스가 구입하는 인연을 맺는다. 그녀는 폼페이 발굴과 세브르 도자기에 거액을 지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구 장인들에게 최고 수준의 가구를 만들 수 있도록 독려해 역사상 최고조의 가구 예술 발전을 이룩했다.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는 엘리제궁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도 지었다. 볼테르를 중심으로 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백과사전 제작을 지원했으며 책과 음악을 통해 스스로의 세련됨을 창조해 내는 능력을 가졌기에 그녀는 나이가 들어 섹시미를 잃은 뒤에도 그 지위를 지켜 낼 수 있었다.이 시대는 살롱 여성 시대로서 특히 랑베르 부인, 탕생 부인, 조프랭 부인, 에피네 부인 등의 살롱이 유명했으며 살롱의 주제도 과학사상과 합리정신을 통한 계몽시대에 발맞춰 정치 철학 과학 등으로 뻗어나가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루소, 달랑베르 등이 그 중심인물을 이루게 된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두 명의 대사를 파리로 보냈는데 한 명은 살롱에 출석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니 그 위력을 알만하다.한편 귀족들을 매료시킨 중국 열풍을 일컫는 시누아즈리는 도자기와 함께 옻칠 가구로 이어진다. 로코코 양식은 건축보다 실내장식 분야에 적용됐으며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공국(公國)들에서 훨씬 더 발전한다. 내각제와 의회주의가 정착된 조지언 시대의 영국은 이 사치로부터 격리된다.몇 점의 퐁파두르 초상화에서 볼 수 있거니와 드디어 여자들은 의자에 자유롭게 다리를 포개고 앉을 수 있었다. 그 전까지의 의자들은 남성의 권위를 위해 만들어졌기에 부드러운 여성들에게 잘 맞을 리가 없었다. 우선 다리가 높기 때문에 폼 나게 앉고 싶어도 유연한 여성의 육체를 보듬을 수 없다. 로코코 의자는 다리가 낮고 등받이는 약간 뒤로 젖혀졌으며 팔걸이가 다리와 일체를 이룬다. 윗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비스듬히 앉으면 상대 남성의 시선이 여성의 가슴 위에 정확히 꽂히도록 설계됐다. 당시 여성은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여 가슴을 돋보이게 했다. 이에 따라 드레스에는 가슴 부분이 일부 보이도록 디자인돼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여성의 가슴 일부가 노출된 것이다. 이 드레스 위에 살짝 나타난 모습을 보면서 대화하도록 연출된 구조다. 그리고 바닥에 끌리는 긴 드레스 자락에 여유가 있게 하고 장미를 비롯한 갖가지 장식을 붙이고 다녔다. 로코코 의자는 이러한 여성의 의상을 잘 보이게끔 하기 위해 연구되고 디자인됐다. 넓게 펼쳐진 여인의 치마폭은 의자의 선과 일체를 이루면서 선으로 연결됐다. 가구는 이렇게 부드러움을 기조로 했으며 실내장식도 파르텔 색조가 주류를 이뤘다.로코코식 의자로 인해 고혹 적인 여성의 향수 냄새와 함께 교태를 자아내는 수많은 연애 사건이 파리를 진동했다. 심지어 루이 15세의 딸 가운데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언니인 루이스처럼 수녀원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이 팔걸이 의자인 포테유(fauteui) 때문이라고 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화가인 와토(Watteau)가 디자인한 와토 가운이 여자들을 아름답게 장식했는데 그 품이 길고 넓어 옷자락을 끌어야만 하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몸 전체로 펼쳐 보이는 주름이 우아하게 보였다. 이 옷은 궁중에서 애용됐으며 이를 ‘로브 아 라 프랑세즈’라고 불렀다. 이러한 원피스식 로브(robe)는 앞 중심이 벌어져 있어 안에 입은 아름다운 장식 스커트가 보이도록 했으며 소매는 레이스로 장식된다.옷감은 유연하고 화려한 비단이나 벨벳 등의 소재를 썼다. 이 시대의 사치가 극에 달하고 살롱의 아류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면서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몰리에르의 ‘선 멋 부리는 여자들’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루소는 이 시대에 ‘여자들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이 모든 일들은 당대 트렌드 세터였던 마담 드 퐁파두르가 정치의 구심점에 있었던 22년 동안 이뤄진 것이다. ‘그녀가 과연 연애 박사로서만 삶을 살았던 것일까’라는 질문에 답은 의외로 볼테르로부터 들어볼 수 있으리라.당대의 지성, 볼테르는 그녀에 죽음에 헌사했다. “감사의 마음으로 그녀를 추모한다. 천성이 진실한 그녀는 국왕을 사랑했고 올바른 영혼과 정의로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 루이 15세 시대의 세브르 꽃병으로 장미꽃 두 송이를 꽂을 수 있다. 2. 세브르 자기로 제작된 월 스콘스 촛대. 부드러운 파스텔 색조로 표현하고 있다. 3. 로코코 양식의 1762년산 세브르 자기 시계로, 퐁파두르의 애장품 가운데 하나다. 4. 1775년 모리스 켄텡드 라 투르 작품으로 퐁파두르의 우아한 지적인 면을 잘 표현했다. 그녀의 특징은 아무런 신변 장신구도 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셰가 그린 다른 모든 초상화에서도 오직 책과 펜, 악보, 책상을 소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5. 중국 실크로 장식한 실내 가구들이 로코코의 화려함을 보여준다.1. 로코코 양식의 이 데스크는 책꽂이 겸용으로 당시 여인들의 취향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발레리나의 꼿꼿이 선 다리를 모티브로 디자인했는데 이를 카브리올 레그라고 한다. 2. 장미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녀는 세브르 자기로 장미를 제작해 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이 화병의 꽃도 도자기로 제작한 것이다. 3. 루이 15세 시대를 상징하는 로코코 식의 포테유, 즉 암체어로서 낮은 다리와 뒤로 젓힌 등받이, 카브리올 레그가 여성의 육체를 모티브로 했음을 느끼게 한다.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