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김동규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김동규. 그는 오래전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클래식 음악가다. 대중의 큰 사랑을 자양분으로 성장을 거듭해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았다.1988년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그는 팝과 가요 등 대중음악을 넘나들며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인 ‘보기 드문’ 이력의 성악가다. 지난 2월엔 데뷔 20주년을 맞아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당시 김동규가 열창한 바그너의 ‘탄호이저’, 베르디의 ‘리골레토’ 등 주옥같은 오페라 아리아들은 그의 팬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올 가을과 겨울, 다시 앙코르 기념 공연을 갖는 그를 논현동 자택에서 만났다.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집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김동규의 바리톤 음성은 찌는 듯한 8월의 더위를 한방에 물리칠만한 강력한 파워를 지녔다. 구불구불한 고수머리에 잘 다듬은 콧수염, 그리고 흡사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연상시키는 화이트 룩까지. 범상치 않은 모습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는 직접 만나보니 더 압도적이다.“여름만 되면 ‘앙 선생님’이 이해가 가요. 제가 워낙 흰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여름엔 무조건 흰색 옷만 입게 되죠. 하얀 바지와 티셔츠가 10개 이상씩 있고 신발도 하얀색으로만 맞춰 신어요. 바쁠 때 대충 입게 된 패션이 이제 저만의 스타일로 굳어지게 된 거죠.”김동규는 현재 혼자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그는 뭐든지 혼자서도 잘한다. 거의 모든 악기를 독학으로 배워 연주하고 집 거실에 있는 테이블도 직접 만들어 쓴다. 누군가에 의지하기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하는 게 익숙해졌다.“당연히 혼자 살면 외롭죠. 제가 바쁘게 사는 것도 사실은 그것 때문이에요. 하지만 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나만의 인생을 즐기며 평범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죠. 예전에 결혼에 한 번 실패한 후 그런 생각이 더 굳어진 것 같아요. 지금 열네 살인 아들은 엄마와 독일에서 살고 있는데 ‘그 아이가 크면 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다지 초조해하지 않습니다.”그에게 가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용인에 전원주택을 손수 지을 만큼 효심이 지극한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것도, 키워준 것도 다 부모님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음악가 부모님이 연주하는 가곡 ‘보리밭’에 영감을 받아 성악도의 길로 들어섰다. 어깨너머로 들은 보리밭의 피아노 연주는 어린 그의 가슴에 해일을 일으켰다. 지금도 보리밭은 그의 애창곡 중 하나다.이후 바리톤 김동규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서라벌고등학교와 연세대를 졸업한 후 1989년 이탈리아 베르디 국립음악원에 수석으로 입학해 2년 후 베르디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했다.여기까지만 들으면 ‘고생하나 안 하고 고속성장한 음악가’라고 그를 단정 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모를 노력이 있었다. 교육자였던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김동규에게 혹독한 경제 교육을 시켰다. 어려서 게임기라도 갖고 싶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대학 때도 교회 지휘나 공연 등의 다양한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직접 벌어 썼다.그의 양친은 항상 “네가 하고 싶거나 갖고 싶은 건 네가 벌어서 써라”고 가르쳤다.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를 때도 그의 손엔 단돈 3000달러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부모님에게 받기만 하면서 성장했다면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이었을 터다.유학 시절, 그때그때 공연을 해서 번 돈으로 공부하던 그는 조인원, 김관동, 페라에게 사사했고 1991년엔 드디어 오페라 ‘토스카’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음악의 자존심인 라 스칼라 오디션에 한국인 최초로 합격해 라 스칼라 극장 주역가수로 활동하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이후 그는 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음악부문과 제24회 한국방송대상 개인부문 성악가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제 수많은 성악도들에겐 꿈의 모델로 평가받는다.“Dream! 꿈은 날 강하게 하고, 날 겁 없게 합니다. 꿈을 성취시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죠. 혈혈단신으로 떠난 이탈리아에서 왜 힘든 게 없었겠어요. 하지만 난 생활력이 무척 강한 편입니다. 입성 두 달 만에 이탈리아인 앞에서 이탈리아 말로 공연을 해 돈을 벌기 시작했죠. 그 경험이 날 강하게 만들었어요.생활력이 있어야 인생의 스릴을 느낄 수 있죠. 남자든 여자든 부족한 건 채워나가려고 노력하는 게 살아가는 묘미인 것 같아요. 이젠 아티스트들도 경제관념이 확실해야 해요.”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국내 사정은 그야말로 ‘야생마’ 수준이었다. 공연 문화의 틀이 잡혀 있지 않아 그도 초창기엔 마음고생을 좀 했다. 하지만 그때 그가 외국의 개념을 적용해 정해 놓은 출연료는 지금까지 국내 공연계에 기반이 될 정도로 확실했고 시기적절했다.물론 철두철미한 그에게도 경제관념을 무너뜨리는 몇 가지 예외는 존재한다. 바로 승마와 바이크. 그는 소문난 승마광이자, 바이커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애마인 ‘칼리도아’는 열한 살짜리 독일산 명마로 독일로부터 운반비만 2000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가 된 지 5년이 흘러 이제는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가 됐다. 금빛 갈기를 흩날리며 질주하는 칼리도아와 함께 할 때면 김동규는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진다. 10년 전부터 갈고닦아 온 승마 솜씨도 수준급이어서 아마추어로 경기에 나간 적도 있다고.“동물과 교감을 하면서 불규칙을 규칙으로 적응해 나가는 것이 승마의 매력이죠. 내 몸짓 발짓만으로 말이 알아서 척척 움직여 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말안장 위에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모든 걸 다 가진 느낌이 들거든요.”바이크도 그에겐 소중한 취미다. 한때 할리데이비슨을 비롯해 무려 5개나 가지고 있던 바이크를 지난해 사고가 난 후엔 대부분 정리했다. 그중엔 시가 6000만 원 상당의 고가 바이크도 있었다.“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론 잘 타지 않죠.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기도 하시고요. 바이크는 매력 있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합니다.하지만 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전원주택이 있는 시골에서 잠깐씩 타는 편이죠. 도심에선 타지 않아요. 바이크를 탈 때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무한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그가 요즘 ‘올인’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라디오 진행이다. 기독교방송에서 매일 아침 9시부터 진행하는 ‘아름다운 당신에게’ 진행을 맡은 지 2년이 흘렀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음악과 접한다. 그리고 많은 팬들과 함께 호흡한다. 라디오의 매력에 아주 푹 빠졌다.“이혼한 청취자가 어느 날 낯선 재회를 했는데, 제 노래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함께 들으며 마음을 풀고 다시 잘됐다는 사연을 읽게 됐죠. 제 음악을 통해 사랑을 다시 이뤄냈다는 데 보람을 느꼈어요.저도 이혼 후 ‘디투어’라는 세미클래식 음반을 냈었는데, 당시엔 이혼 후라 돈도 없고 힘들 때였거든요. 그때 기억이 문득 나더군요. 인생은 슬프고 괴롭고 외롭기엔 짧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좌우명도 ‘빨리, 잘, 정확히’죠. 여러분도 꿈을 빨리 잘 정확히 이룩하고 좀 쉬세요. 음악과 함께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방황하는 시인’ 에토레 킴처럼 말이죠!”멀쩡하던 사람이 음악 한곡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헤어지려던 연인이 음악 한곡 때문에 다시 만난다내리던 비가 음악 한곡 때문에 눈물이 된다내리던 눈이 음악 한곡 때문에 영화가 된다잊혀졌던 사람이 음악 한곡 때문에 갑자기 떠오른다잊혀졌던 시간이 음악 한곡 때문에 그대로 재현된다절망하던 사람이 음악 한곡 때문에 다시 힘을 낸다가만있던 사람이 음악 한곡 때문에 춤을 춘다외로움에 슬퍼하던 사람이음악 한곡 때문에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아름다운 날씨가 음악 한곡 때문에 힘이 된다망설임이 음악 한곡 때문에 자신감이 된다내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니…내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니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