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같은 남자, 디자이너 이상봉
월 14일 이상봉 디자이너 사무실 안. 지난해 말 현대홈쇼핑이 런칭한 이상봉 란제리 ‘본디엘’의 스태프들이 모여 제작 회의를 하고 있다. 분위기가 자못 진지하다. 상품을 꼼꼼히 살피던 이상봉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홈쇼핑에도 명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야죠. 자존심을 지키면서 브랜드 퀄리티를 유지해야 합니다. 가격을 내리면 퀄리티도 낮아지는데, 소비자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덜 팔더라도 고객 만족도를 높이세요!”그렇다. 소비자는 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터. 남들이 레드 오션 속에서 가격 경쟁에 피가 마를 때, 소위 ‘튼’ 브랜드들은 저만치 나아가 명품 블루 오션을 항해한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아티스트지만 깨어 있었다.“우리라고 크리스찬 디올이 되지 말란 법이 없어요. 디올의 란제리는 명품 중에서도 명품이죠.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말고 몇 십 년을 내다봐야죠. 진정한 브랜드 가치를 한번 실현해 봅시다.”물론 대중화가 중요하긴 하다. 그렇지만 시장의 논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 일례로 유명한 해외 M 브랜드는 가격대를 낮추고 대중화엔 성공했지만, 이제 더 이상 세계적인 쇼 무대엔 올리지 못하는 브랜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상봉은 “쇼를 못한다는 것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단언한다.사실 이상봉은 본디엘을 런칭하기에 앞서 많이 망설였다. LG전자의 휴대전화, KT&G 담배 케이스, 금호건설의 리첸시아 중동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단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란제리 사업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기에 생각이 많았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시작했다.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겠다는 그의 신중함은 제품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속옷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디자인 심벌인 한글 캘리그래피를 모티브로 한 란제리는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서구의 란제리 트렌드를 잘 접목했다는 호평을 받았다.매출도 기대 이상이었다. 첫 방송에서 3억1000만 원어치가 순식간에 팔려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회 평균 2억 원 내외인 홈쇼핑 속옷 방송 매출에 비하면 50% 이상 높은 수치. 선발 주자인 앙드레김의 란제리 ‘엔카르타’의 아성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생각보다 반응이 빨라 무척 놀랐어요. 이상봉이란 브랜드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이젠 잘했다 싶어요. 앞으로 남성 이너웨어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죠.”본디엘 제작 회의를 마치고 인터뷰를 위해 기자 앞에 앉은 이상봉이 조용히 향을 피웠다. 열정적으로 회의에 임하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향초에 불을 켜는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항상 구도하는 자세로 향을 피우죠. 전 감각이 발달한 사람이지만 후각만큼은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전엔 다양한 향수를 종류별로 진하게 뿌리고 다녔죠. 그러던 언제부턴가 자연이 주는 은은한 향기를 사랑하게 됐어요. 지금도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이상봉 향수’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마도 향은 ‘자연 그 자체’의 느낌을 주는 게 될 거에요. 자세한 건 아직 비밀이에요.(웃음)”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실로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그에게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바로 창작의 고통. 한 분야만 하려고 해도 힘들 텐데, 여러 분야를 섭렵해야 하는 창작자의 고통은 어떠할까. 기자에게도 기사 하나 쓰는 데 남모를 창작의 고통(?)이 따르는데, 하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디자인은 어떠하랴.“저에게 창작의 고통은 없어요. 디자인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죠. 1996년에 한 백화점과 손잡고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겠다’고 나선 적이 있어요. 그릇부터 주방기구, 가구, 스포츠웨어까지 망라한 것이었는데 2년 만에 접고 말았죠. 혼자 디자인뿐만 아니라 제작까지 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는데 결국… 그때 정신적,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 경험이 도움 많이 돼요. 많이 배웠죠.”그가 다양한 분야에 애정을 쏟으면서 시도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남달랐던 학창 시절도 한몫했다. 그는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을 하지 않았다.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출신이다. 지금 날고 기는 끼 많은 연예인들을 배출한 바로 그곳. 그는 이곳에서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는 잡식성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무용 연극 영화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예술을 접했다. 그리고 끊임없는 영감을 받았다. 그때 공부한 것이 지금 그의 왕성한 활동에 자양분이 되고 있다.“전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해요. 디자인도 그런 취지에서 시작하게 됐죠. 항상 새것에 도전하고 창조적으로 살고자 노력해요. 패션은 곧 변화를 뜻하고 저 또한 그렇죠. 진행형이고 진화 중이에요. 죽는 그날까지 새로움을 추구할 겁니다. 모두가 말리던 ‘무한도전’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죠.”원래 유명했지만, 그의 유명세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폭발적으로 높아지게 한 MBC 예능 프로 ‘무한도전’.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땐 모두 말렸다. 그래서 고민에 빠졌다. 당시 그는 한글 옷이 해외에서 인정받고, 그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될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아무래도 무한도전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보니 혹여나 ‘이미지가 격하될까’ 우려어린 조언이 쏟아졌어요. 하지만 담당자분들이 너무 열정적이었고 그때 ‘최고는 다르다’는 걸 느꼈죠. 지금은 그분들께 되레 고마움을 느껴요.”‘최단시간에 성공한 디자이너.’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디자이너 입성하자마자 백화점에 입점하고, 시작한 지 1년 만에 촉망받는 디자이너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순조롭게 시작한 그의 디자인 여정은 ‘우리 것’을 통해 해외로 뻗어나갔다.그의 한국 문화 사랑은 대단하다. 임옥상과 장사익의 필체를 응용한 ‘달빛 그림자’ 의상들은 당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2003년엔 루브르 박물관에서 샤머니즘을 테마로 한국의 굿판을 쇼 형식으로 선보였다. 이후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자개, 소나무, 전통자수 등 소재는 끝이 없다.“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엔 영감을 먼데서 찾았지만 이젠 안 그래요. 내 주위 사물에서 확산시켜 나가죠. 이제는 내 주위에 소홀했던 것들이 하나둘 보여요. 전통자수도 10년 동안 사무실에 걸어놓은 것이지만 이제야 깨달았죠. 그래서 이번 겨울엔 자수를 소재로 한 패션쇼를 기획 중이에요.”한국적인 요소를 최대한 끌어내 세계 속의 한국을 만들어가고 있는 진정한 문화대사답다. 그가 패션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의 미를 실천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이제는 디자인 경영 시대다. 기술은 갈 때까지 갔고, 이제 그 기술에 어떤 디자인을 입히느냐가 관건이다. 감성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인간과 관련된 모든 디자인에 도전하고 싶어요. 파인 아트가 아닌 사람의 생활과 더불어 하는 디자인이 중요해지고 있잖아요.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변화시킬 거예요. ‘상상력의 한계는 없으며, 모든지 가능하다’는 신념. 이 신념 하나만 물의 본질처럼 간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걸 추구하는 ‘물 같은 존재’로 항상 도전할 겁니다.”쉼 없이 변해가는 세상에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진행형 디자이너 이상봉. 그의 무한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기대된다.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