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렉스(Rolex)손목시계 역사의 산증인

년은 회중시계가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뤘던 시기다. 하지만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는 24세의 젊은이가 과감하게 손목시계의 세계에 뛰어든다. 독일 바바리아(바이에른) 출신의 사업가 한스 윌스도프(Hans Wilsdorf). 런던에 시계 전문 유통 회사를 설립한 그는 당시에는 정확도가 떨어져 주로 여성들의 장신구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채 소량 생산되고 있던 손목시계에 사활을 건다. 손목시계의 무한한 잠재성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윌스도프는 정밀하고 정확한 손목시계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윌스도프는 우선 정확한 손목시계를 제작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제조된 높은 정확도의 무브먼트를 장착했다. 이렇게 탄생한 혁신적인 손목시계는 유행에 민감한 남녀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08년 윌스도프는 발음하기 쉽고 시계의 문자판에 새길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브랜드명을 생각해냈다. ‘롤렉스(Rolex)’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윌스도프는 끊임없이 공인 품질 관리 기관에 시험을 의뢰하는 등 무브먼트의 품질 향상에 주력했다. 결국 시계의 정확도를 향한 그의 집요함은 롤렉스가 최고의 시계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10년 롤렉스 시계는 손목시계 역사상 최초로 스위스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을 획득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14년에는 당시에는 항해용 대형 시계에만 수여되던 영국 큐 천문대(Kew Observatory)의 크로노미터 인증 A등급을 받았으며, 이후 롤렉스는 ‘손목시계의 정확성’과 동의어가 됐다.1927년, 영국의 젊은 여성인 메르세데스 글리츠(Mercedes Gleitze)가 여성 최초로 도버해협을 수영으로 횡단할 때 롤렉스의 방수 시계 오이스터를 차고 있었다. 1926년에 출시된 오이스터(Oyster) 시계는 세계 최초의 방수, 방진 시계로 특허를 받은 바 있었다. 글리츠가 15시간에 걸쳐 횡단에 성공했을 때 오이스터는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방수 손목시계가 성공한 것이다. 이는 시계 업계에서 신화가 됐다. 이러한 이정표적 사건은 데일리 메일(Daily Mail)지의 전면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도전 정신이 강한 사람들에 의해 롤렉스 시계의 성능이 증명되는 많은 사례가 이어졌다.1931년,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태엽이 감기면서 시계가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영구 회전자(Perpetual rotor)’가 탄생했다. 이 혁신적인 영구 회전자는 현대의 모든 오토매틱 시계의 자동 태엽 메커니즘의 원조가 된다. 이에 따라 수동 시계는 시대의 뒤편으로 물러나게 됐다.1953년에 존 헌트 경(Sir John Hunt), 에드먼드 힐러리 경(Sir Edmund Hillary), 텐징 노르게이(Tensing Norgay)가 이끄는 원정대는 오이스터 퍼페추얼을 착용하고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했다. 1960년대에는 자크 피카르(Jacques Piccard)의 심해 잠수정인 트리에스테(Trieste)가 가장 깊은 해구로 알려진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Mariana Trench)의 수심 1만916m로 내려갔다. 이때 잠수정 외부에 장착된 실험용 오이스터의 원형, 딥 시 스페셜(Deep Sea Special)은 1톤이 넘는 강력한 수압을 견뎌냈다. 이 같은 프로페셔널 컬렉션은 심해 잠수, 비행, 등반, 과학 실험과 같은 프로페셔널 활동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 중 1953년에 처음 소개된 서브마리너(Submariner)는 수심 100m에서도 방수가 보장된 최초의 시계였다.롤렉스는 사회 환원의 일환으로 다양한 후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성악 분야에서는 1982년부터 거장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악기 연주 분야에서는 바이올린 연주자 막심 벤게로프(Maxim Vengerov), 첼리스트 요요마(Yo-Yo Ma) 같은 클래식 대가들을 후원하고 있다. 골프, 세일링, 테니스, 승마, 자동차 경주의 5대 주요 스포츠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기도 하다. 세상 모든 분야에서 성공에 이르기까진 인내력과 탁월한 재능이 필요하다. 이는 롤렉스가 최고의 시계 브랜드가 되기까지의 여정과 닮았다.김지연 기자 jykim@money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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