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곡물·귀금속 등 전방위적 수급 불안

국인에게 밥과 같은 토르티야가 멕시코 정부의 목줄을 죄고 있다. 불과 1년 전 kg당 6.5페소(590원)였던 토르티야 가격은 30페소(2700원)까지 치솟으며 서민들의 생계를 옥죄고 있다. 요즘 멕시코 시민들은 “옥수수는 우리의 피”라고 외치며 토르티야 생존권을 위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급기야 멕시코 정부는 토르티야 가격 상한제까지 도입, 가격 급등에 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는 국제 원자재 가격 파동에 토르티야 가격 상한제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지적이다.고유가에서 비롯된 원자재 파동이 옥수수 밀 콩 사탕수수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며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곡물 가격 불안은 일부 국가에서 서민들의 생존권까지 위협하며 국정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공 행진 중인 원유를 대체하기 위해 옥수수 사탕수수 대두 등을 이용한 바이오 에탄올 생산을 늘리자 식량으로 쓰일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이 급등하는 커머더티(Commodity: 상품) 가격 상승 악순환 구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 여기에 미국 달러화 약세로 인한 실물 자산 선호 현상까지 겹치면서 주요 원자재 가격은 연일 역대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골드만삭스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전 세계적 원자재 가격 급등을 ‘구(舊) 경제의 보복(revenge of the old economy)’이라고 진단했다. “오일 쇼크가 터진 1970년대 이후 수십 년간 오일 메탈 곡물 등과 같은 구 경제 분야의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한 새로운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구 경제의 생산 능력이 사실상 2000년을 기점으로 소진되면서 원자재 가격 급등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다.한국도 원자재 파동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커머더티 수입 4위 국가다. 라면 등 밀가루를 사용하는 식재료가 줄줄이 오르고 옥수수를 사료로 써온 돼지 사육 농가는 전년 대비 40% 이상 급등한 사료값 때문에 파산 직전이다. 텍사스산 원유에 이어 우리나라가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마저 사상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며 미증유의 고유가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배럴당 200달러 시대를 맞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대두되고 있다.우리에게는 환율도 비상이 걸렸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의 여진으로 외국 투자자들의 매도세가 가속화되면서 지난 17일 원·달러 환율은 하루에 3.2% 급등하며 9년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원화 약세가 지속되면 수입 원자재의 원화 표시 가격은 더욱 오를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유례없는 급등세를 보이고 있는 원자재 가격 오름세는 얼마나 지속될까. 전문가들은 공산품과 달리 한 번 깨진 수급이 균형을 잡는데 시간이 훨씬 많이 소요되는 원자재의 속성상 당분간 초강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옥수수 밀 등 주요 식량 자원의 경우 과거처럼 냉해나 가뭄으로 인한 일시적 공급 부족이 아니라 세계의 식량 블랙홀로 등장한 중국 인도 등과 같은 신흥 국가의 수요 급증에 그 원인이 있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UBS는 최근 커머더티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콩 생산량의 40%를 수입하는 중국의 소비가 크게 늘고 있는 데 반해 올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생산량 증가는 전년 대비 1%에 그칠 것”이라며 “특히 주요 콩 생산국인 미국에서 바이오 에탄올용 콩 수요가 늘고 있고 대체 경작지 확보도 쉽지 않아 주요 곡물의 가격 강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골드만삭스도 “단기 수급 불균형 해소를 위한 노력과 함께 지금까지 1차 원자재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한 신규 투자를 방해해 온 각국의 보호주의적 정책에 변화가 수반되지 않을 경우 최근의 원자재 가격 급등세는 장기화될 우려가 있다”고 진단했다.골드만삭스 JP모건 UBS 등 주요 글로벌 투자 기관들의 향후 원자재 시장 전망을 각 부문별로 짚어봤다.최근 텍사스산 원유에 이어 두바이유까지 배럴당 100달러 시대를 열면서 유가 급등세에 대한 우려가 한층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 기관들은 워낙 가파르게 올라 단기 소폭 조정 가능성은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강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최근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는 미국 달러화 약세가 유가 급등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1월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원유 재고량은 2210만 배럴이었으나 수요 증가로 2월 말에는 2070만 배럴로 감소했다. 다행히 2분기부터는 계절적 요인에 따른 수요 감소가 기대되는 가운데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이 현 수준의 생산량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돼 급등세가 다소 진정될 것이란 분석이다.문제는 단기적으로 수급 측면에 의한 불안보다 달러 약세가 투기적 가수요를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러 약세가 지속된다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헤지 펀드 등의 가수요 유입이 보다 가속화되면서 단기 조정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UBS 등 주요 분석 기관은 단기 조정 가능성이 있으나 급격한 생산력 증대가 불가능한 구조 때문에 유가 강세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국내 한 자산운용사는 지난해 중순 금 은 등 귀금속을 중심으로 한 펀드 출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금값이 온스당 600달러까지 치솟자 단기 급등을 우려해 상품 출시를 취소했다. 하지만 국제 금값은 올 들어 1월에만 14% 급등한데 이어 3월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인도분 가격이 온스당 1000달러를 훌쩍 뛰어넘으며 오일과 함께 연일 사상 최고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여기에는 금이 실수요 외에 리스크를 기피하는 투자자들의 ‘세이프 헤이븐(Safe-haven)’이자 스태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면서 실물 자산을 선호하는 투자 패턴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금은 전력난으로 인한 공급 차질 악재까지 겹치고 있다. 세계 최대 금 생산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금·은 생산량에서 각각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전력난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는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남아공 내 3위 광산 업체인 하모니사의 밤바나니, 엘란스랜드 광구에서 이틀 연속 4명의 작업 인부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며 작업이 중단돼 시장 심리를 더욱 악화시켰다.그렇다면 금 수급 상황은 언제쯤 해소될 수 있을까. 주목할 변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금 매각 가능성이다. 미국 정부가 보유 금 매각을 통한 IMF의 재무 건전성 강화를 강하게 주문하고 있고 시장의 요구도 높아 그 어느 때보다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다만 연간 방출 가능량이 500톤으로 제한돼 있어 시장의 수급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모건스탠리는 “금에 대한 강력한 투자 수요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공급도 불안정해 금값의 강세는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UBS도 “달러 약세와 인플레이션 우려 악화, 신용 위기 등의 요인이 지속되는 한 금 은 등과 같은 귀금속이 최대 수혜를 볼 것”이라고 밝혔다.밀 콩 옥수수와 같은 곡물 가격이 신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예상한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짐 로저스는 제외). 국내의 경우 주요 경제 연구소는 물론 증권사 은행 등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금융권에서도 관련 전문가가 전무한 상태다. 그러나 최근의 곡물 가격 폭등은 전 세계에 식량 안보를 다시 화두로 던지고 있다.곡물 가운데 가격 상승세가 두드러진 것은 밀이다. 특히 빵이나 스파게티의 주재료인 경질 소맥의 수급이 불안정하다. 밀은 2월 한 달 동안 미국 미니애폴리스 곡물 선물 시장에서 부셸당 24달러까지 뛰며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연질 소맥을 포함한 전체 밀 수요에는 큰 변함이 없지만 경질 소맥의 공급량이 크게 늘지 않고 있어 가격이 오름세다. 미국 농가들의 올해 밀 생산량은 전년의 21억 부셸에서 23억 부셸로 다소 늘어날 전망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전년의 6억360만 톤에서 올해는 6억4500만~6억5500만 톤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 같은 증가량의 3분의 2를 연질 소맥이 차지하고 있어 경질 소맥을 중심으로 한 밀 가격은 재고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강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다.대두 가격은 2월 중 S&P GSCI(골드만삭스 상품지수) 기준으로 19.1%나 급등하는 큰 폭의 오름세를 보였다. 2007년부터 바이오 대체에너지 바람이 옥수수를 중심으로 일면서 경작지가 줄어들고 재고가 감소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농가 입장에서도 아직은 옥수수가 대두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안겨주고 있어 급격한 작물 전환 가능성도 낮다. JP모건은 올해와 내년에 걸쳐 미국 내 대두 경작지가 740만 에이커가량 늘어나지만 재고는 900만 부셸 증가에 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세계 최대 콩 소비 국가인 중국이 지난겨울 폭설로 전체 종자의 40%에 달하는 손상을 입은 데다 콩기름 수요도 급증하고 있어 당분간 불안한 수급을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급등세가 지속되고 있는 옥수수의 경우 현재 수요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나 잠재적으로 공급 부족 가능성이 높은 곡물이다. 미국 정부는 올해 재고량이 소폭 줄어드는 가운데 옥수수 수출량은 전년 대비 1억6400만 부셸 늘어난 12억 부셸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의 추정은 이상적 기후 조건을 전제로 에이커당 생산량을 154.9부셸로 전년의 151.1부셸보다 높게 잡아 다소 무리한 전망치라는 지적이다.기초 광물 가격도 올 들어 2개월 연속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고철의 경우 중국의 제철 수요가 급증하면서 수급이 불안정한 상태다. 또 겨울철이 끝난 북반구 지역 국가들이 본격적인 건설 시즌을 맞고 있는 것도 가격을 자극하고 있다. 고철 가격 오름세는 기초 광물 가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 혼다는 고철 가격 급등 부담 해소를 위해 자동차 외관의 알루미늄 적용 비중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알루미늄 가격도 오름세를 보이고 있어 본격적 적용에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동 가격은 지난달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골드만삭스 상품지수 기준으로 기초 광물의 3월 현재 선물지수 대비 누적 수익률은 14.7%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구리 역시 세계 최대 생산국인 칠레에서 1월 생산량이 전년 대비 1.4% 줄어드는 등 불안한 움직임이다.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남아공이 산업용 전력 소비를 10%가량 줄이고 잠비아 정부가 광산 소유 기업들의 반발에도 불구, 구리 광산에 대한 세금과 로열티를 늘린 것도 악재다. 또 짐바브웨에는 외국인의 광산 지분 소유를 51%로 축소하는 등 주요 기초 광물을 생산하는 아프리카에서의 불안한 정책 요인이 기초 광물 가격을 자극하는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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