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기 침체와 역발상 투자 전략

가의 새해 표정은 ‘우울’ 그 자체다. 어디를 둘러봐도 좋은 소식은 없다. 들리는 것이라곤 ‘급락, 손실, 감소, 감원’ 등이다. 하반기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데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보지만 가능성은 희미해지는 상황이다. 그래서 월가에게 주어진 또 다른 명제는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다.이처럼 월가를 막다른 골목에 내몰고 있는 요인의 핵심엔 ‘경기 침체(recession)’가 자리 잡고 있다. 경기 침체란 경제성장률이 2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것. 말하자면 경기가 뒷걸음질하는 것이다. 이미 경기가 침체에 빠져 들었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많다. 그런가 하면 침체는 간신히 모면할 것이란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어찌됐건 분명한 것은 미 경기가 침체의 언저리 정도에 와 있다는 점이다. 실제 침체에 빠지지는 않더라도 그만큼 경기가 좋지 않다는 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투자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경기가 침체 상태에 빠지면 방어적 전략을 취하는 것이 맞다. 가능하면 안전 자산 위주로, 경기방어주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구사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이런 때일수록 멀리 내다보는 시각에서 이른바 역발상 전략도 검토할만하다. 크레디트스위스와 HSBC 등은 최근 글로벌 포트폴리오에서 미국 주식 비중을 늘리고 유럽이나 이머징 마켓 비중을 줄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경기 침체에 대한 경고음이 요란한 만큼이나 각종 대책도 이어질 전망이므로 이럴 때일수록 역발상 투자가 필요하다는 권고다. 어떤 것이 맞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투자 전략 점검을 위해서도 미국 경기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살펴볼 필요는 있을 성싶다.미국은 소비 천국이다. 소비를 위해 살고 소비를 위해 죽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비가 넘쳐난다. 지난해 불경기라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쇼핑몰과 음식점은 소비 인파로 넘쳐났다. 돈을 쓰지 못하면 살 수 없도록 하는 게 미국이다.소비가 미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이른다. 소비가 활발하면 성장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반대로 소비가 둔화되면 성장률도 주춤해진다. 미 경제를 소비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작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파문과 신용위기에 휘청거리면서도 미 경기가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은 견조한 소비 덕분이다. 이유야 어쨌건 소비가 예상보다 견조하다 보니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는 말 그대로 ‘우려’로 끝나는 듯했다.그러나 새해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믿었던 소비가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에선 서민들의 생필품인 맥도날드 햄버거부터 사치품인 티파니 보석까지 어느 것 하나 빨간 불이 켜지지 않은 물품이 없다. 그런가 하면 미 최대 쇼핑 시즌인 작년 11, 12월 중 소매 업체들의 매출 증가율은 0.9%에 그쳤다. 지난 2002년 이후 최저다. 소매 업체들이 할인 폭을 늘리고 영업 시간을 연장하는 등 죽을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이 정도다.작년 12월만 따지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작년 12월 소매 판매 실적은 전월보다 0.4% 감소했다. 6개월 만에 첫 감소세다. 늘어도 시원찮을 12월 매출이다. 그런데도 줄었으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올 소매 판매는 지난 1991년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소비가 흔들리는 것은 두 가지 요인에서다. 하나는 주택 경기 침체다. 미국 사람들은 주택을 담보로 한 대출을 많이 이용한다. 집값 등락에 따라 대출금 총액이 바뀌다 보니 이를 소비 재원으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모기지의 30%가량이 개인 소비로 이어진다는 통계다. 이 자금줄이 막혔으니 소비가 빡빡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악화되는 고용 사정이다. 고용이 좋으면 그나마 가처분 소득이 생긴다. 작년 11월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작년 12월 실업률이 5.0%로 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용 사정마저 빠듯해지고 있다. 미국 가계로선 아무리 둘러봐도 돈이 나올 구멍이 없다. 방법은 한 가지다. 허리띠를 졸라 매는 수밖에 없다.소비가 둔화되면 성장률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나오는 게 경기 침체 우려다.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는 이미 미 경제가 침체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미 에너지정보청은 작년 4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 0.1%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했다. 작년 4분기부터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으니 경기는 ‘마이너스 성장률 행진’을 시작했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아직까지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렇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미 경기가 이미 침체에 빠졌거나 빠져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경기 침체 확률은 50% 이상”이라고 단언했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경기 침체 확률은 75%”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주택 경기는 여전히 한겨울이다. 신용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대형 금융 회사들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손실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기업들의 실적도 감소세다. 고용도 나빠지고 소비마저 오그라드는 형국이다. 수출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경기 침체란 비관론이 월가를 뒤덮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그렇지만 경기 침체는 없을 것이란 반론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글렌 허바드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장은 “사전적 의미의 경기 침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물론 경기가 나쁘고 1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도 있지만 2분기부터는 서서히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는 게 허바드 원장의 전망이다.이런 전망을 내놓은 주된 이유는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행정부와 FRB의 적극적인 노력 때문이다. FRB는 기준금리를 잇따라 떨어뜨리며 유연한 통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기준금리 인하는 상반기 내내 지속될 전망이다. 골드만삭스는 3분기까지 기준금리가 연 2.5%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 행정부도 감세 정책을 다시 빼들었다. 세금을 감면해 줌으로써 소비를 직접적으로 자극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고 나섰다. 그런 만큼 경기 침체는 방지할 수 있을 것이란 게 허바드 원장을 비롯한 낙관론을 견지하는 월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에비 코헨 골드만삭스 투자 전략가는 뉴욕 증시를 쥐락펴락하는 월가의 대표적 스타다. 지금까지 낙관적 전망을 잘한다고 해서 ‘강세장의 여제(女帝)’란 별명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요즘 죽을 맛이다. 작년 말 올 S&P500지수 기준 주가가 10%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웬걸. 오르기는커녕 뒷걸음질하고 있으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게다. 낙관적 전망을 내놨던 다른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그렇다고 이들이 연간 전망을 수정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수정할 기미도 없다. 이들은 길게 보자는 입장이다. 지금은 좋지 않지만 하반기부터는 회복될 것이란 믿음을 깔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주식 비중을 늘리라는 ‘역발상 투자 전략’이 나왔다.크레디트스위스(CS)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주식에 대한 비중을 확대하라고 권고했다. CS는 미국 증시에 대한 투자 의견을 ‘5% 비중 확대’로 상향 조정했다. 이유는 FRB의 유연한 통화 정책. CS는 “FRB는 전 세계에서 경제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유일한 중앙은행”이라며 “올 상반기 기준금리를 연 3%까지 인하할 것”으로 내다봤다. CS는 유럽 증시에 대한 투자 의견을 ‘10% 비중 축소’로 낮춰 대조를 보였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여전히 매파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분석에서다. HSBC도 미국 증시에 대한 의견을 종전 ‘비중 축소’에서 ‘비중 확대’로 상향 조정했다. HSBC는 “미국 증시의 분위기가 2003년 이후 가장 좋지 않지만 악재들은 대부분 소화됐고, 금리가 인하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미국 증시가 올해 하반기 신고점을 경신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HSBC는 유럽과 이머징 마켓에 대해서는 모두 ‘중립’ 의견을 내놨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비록 지금 미국 경기와 뉴욕 증시가 좋지 않지만 최악의 경우에 빠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미국 증시 비중을 늘리는 게 좋다는 점이다. 대신 상대적으로 경기에 대한 경고음이 덜한 유럽이나 이머징 마켓에 대해서는 비중을 줄이라는 권고다. 현재의 상황에 비춰보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멀리 보는 전략이 성공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이들의 역발상 전략을 한번쯤 되새겨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하영춘 한국경제신문 뉴욕특파원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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