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네 명품 와인‘그리보’
자는 얼마 전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본 로마네를 방문했다. 그곳은 이탈리아 포도 품종인 피노누아가 화려하면서 감미롭게 춤추는 마을이었다. 처음 찾은 곳은 도멘 장 그리보(Domaine Jean Grivot). 그리보 집안은 16세기부터 본 로마네(Vosne Romanee) 마을에 정착해 살아 왔지만 본격적인 양조로만 본다면 현 책임자인 에티엔 그리보(Etienne Grivot, 1959)가 5세 후손이다.그는 모두 18가지의 레드와 1가지의 화이트를 만든다. 본 로마네에서 화이트를 만든다는 말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더니, 피식 웃으며 그냥 가족끼리 마시기 위해 만든 거라면서 최근에는 달라는 곳이 있어 팔기도 한단다. 19가지의 와인이라, 와인 1~2가지를 만드는 보르도에 비하면 여간 많은 게 아니다.부르고뉴에 익숙하지 않다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거기선 와인의 품질이 곧 밭의 품질이다. 밭이 좋아야 와인이 좋다. 그래서 밭의 위치에 따라 와인의 등급이 매겨지고, 그 등급을 라벨에 표시한다. 그러니 밭의 위치가 상이한 와인은 같은 품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다른 와인이 된다. 하지만 세밀하게 구분된 밭의 특징을 와인으로 표현해 내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고뉴 와인의 장점인 개별성이 시시때때로 단점인 비예측성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푸념을 자주 듣는다. 값비싼 부르고뉴 와인을 마실 때마다 실망이라는 말들 말이다. 결국 포도밭의 테르와가 와인의 개별성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양조가의 집념이 융합돼야 한다.품질의 비예측성은 에티엔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아버지에 이어 1982년부터 양조한 직후 10년간 품질이 확 떨어졌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냥 묵묵히 양조에 힘썼다. 에티엔은 당시 인기 있었던 한 양조가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레바논 출신으로 발효 전에 며칠간 저온으로 포도를 침용하는 것을 중히 여겼다. 낮은 온도에서 길게는 일주일 정도 침용하면 우선 색이 진해지고, 과일 아로마가 풍부해지며, 오랫동안 숙성할 수 있는 타닌이 배어나오게 된다. 강건하고 밀도 높은 와인을 선망한 에티엔은 그런 실험을 즐겼지만, 고객들은 달랐다. 고객들은 그런 와인은 부르고뉴답지 않다며 사지 않았다. 에티엔은 결국 이 시기에 고객의 7할을 잃고 말았다.1993년 들어서 에티엔의 경험은 무르익었고, 더 이상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양조가와의 친분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더 이상 조언을 듣지 않았다. 에티엔 스스로도 마흔이 돼가니 와인 양조가 무엇인지 좀 깨닫게 됐다고 한다. 틈틈이 헬리콥터를 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말 수가 적은 그는 무척이나 꼼꼼하게 헬기를 체크하더니 아주 능숙하게 이륙하고 아주 사뿐히 착륙했다.에티엔은 양조장에서만 변화를 시도한 게 아니다. 그는 아버지의 방식에 수정을 가했다. 당시 많은 양조장들은 포도밭에 비료 쓰기를 즐겼다. 이는 포도나무 스스로 튼실히 성장해 나가는데 결국 방해가 된다. 토양 자체가 화학비료에 길들어져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동력을 망실하게 된다. 요사이 유기농법이니 비오디나미 농법이니 하는 것들이 비슷한 맥락에서 실행되는 것이다.이제는 대부분의 양조장에서 자연스러운 방식의 농법을 쓰지만, 이때만 해도 비료의 도움을 많이 받던 시절이었다. 에티엔은 포도나무의 생장이 자연스러워야 좋은 포도를 얻게 된다는 걸 여러 배움을 통해 알고 더 이상 화학비료에 의존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스스로도 많이 달라졌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처음 아버지를 이어 만들 당시보다 아주 겸허해지고 무척 경험이 많아졌으며 무엇보다도 편안한 마음으로 양조장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1998년 빈티지부터는 이곳의 와인이 확실히 달라졌다는 평가를 여기저기서 접했다.품질에 비해 여전히 합리적인 가격이 큰 매력인 이곳 와인 중 레 보몽(Les Beaux Monts, 0.94헥타르)을 수확 연도별로 시음했다. 갓 담근 2006년산에서는 새 오크통에서 나오는 바닐라 향기에 체리와 장미향이 넘실거렸고, 2005년산은 오크의 풋내는 사라지고 예의 화려한 체리향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무더웠던 2003년산은 농익은 과일향의 일부가 묵은 부케로 화하기도 했고, 좋은 빈티지인 2002년산은 방향, 질감, 여운의 삼박자가 잘 갖춰져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뛰어난 빈티지인 1999년산은 질감이 무르익어 가볍게 입 안을 자극했지만, 굉장한 타닌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고 삼키는 동안 시음자에게 강한 숙성력을 주장하고 있었다. 어느 빈티지를 맛보아도 본 로마네라면 응당 선사해야 할 미려한 터치와 풍만한 과일향은 여전히 풍성했다.조정용 아트옥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