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천 “스페셜 라이어는 선물이자 숙제였죠”

어느새 쉰을 넘겼다. 그러나 꿈을 향한 열정, 인간에 대한 예의와 정이 넘치는 배우 홍석천의 눈망울은 여전히 소년처럼 빛이 났다. 과연 그 식지 않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소년은 늙지 않는다.’
배우, 사업가, 엔터테이너, 국내 1호 커밍아웃 연예인 등 홍석천에 대한 키워드는 차고 넘친다. 모든 수식어마다 그는 늘 뜨거웠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신만의 구심점을 찾고, 꿈을 이루기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래서일까. 쉰을 넘긴 그와의 대화는 여전히 고루하지 않았고, 생기가 묻어났다. 꿈꾸는 자들만이 발산할 수 있는 에너지랄까. 이런 그가 아주 오랜만에 연극 무대 위로 돌아왔다. 홍석천이란 이름 세 글자를 세상에 알린 첫 무대, 연극 <스페셜 라이어>로 말이다.

레이 쿠니(Ray Cooney)의 희곡을 번역 각색한 <스페셜 라이어>는 하나의 거짓말을 시작으로 서로 속고 속이는 상황과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 걸려드는 폭소 유발 캐릭터들이 공연 내내 웃음 폭탄을 던지는 수작이다.

국내에서는 <라이어>라는 제목으로 지난 1998년 1월 초연된 이후, 24년 아시아 최장 기간 연속 공연 기록, 4만2000회 아시아 최다 공연 수립, 국내 누적 관객 수 630만 명 돌파 등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스테디셀러’ 연극으로 자리매김했다.

<라이어>의 제작사인 파파프로덕션은 지난 2017년 <라이어>의 20주년을 기념해 <스페셜 라이어>라는 이름으로 이 공연을 선보였다. 올해는 2017년 출연했던 서현철, 홍석천, 김원식, 오대환, 나르샤, 오세미를 비롯해 이한위, 김인권, 김민교, 정태우, 정겨운, 테이, 신소율, 배우희, 이주연, 박정화, 이도국, 이동수 등의 인기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특히, 극 중 사랑스러운 게이 바비 프랭클린 역할로 초연과 20주년 기념공연을 함께했던 홍석천의 출연은 더욱 뜻 깊다. <스페셜 라이어>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인 동시에 숙제였다고 말하는 그와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봤다.

우선, 정말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소감이 궁금해요. 무엇보다 초연과 20주년 기념에 이어 또다시 <스페셜 라이어>에 오르는 기분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 어떤가요.
"대학교 시절 권해효, 설경규, 안내상, 이문식 등 주변 선배들과 함께 대학로 소극장에서 <라이어>의 초연을 했어요. 제게 큰 선물과 숙제를 함께 작품이죠. 당시만 해도 저는 연기도 처음이고, 제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하기 전이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당시 국민 시트콤이었던 <남자셋 여자셋>에 '쁘아종' 역할에 연이어 캐스팅 될 수 있었어요. 쁘아종도 극 중 패션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바비를 연기했던 것이 쁘아종 캐릭터 연구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 이후로 제 방송 커리어도 이어졌어요. 인생의 큰 선물이죠. 동시에 성소수자 연기에 관한 숙제를 준 작품이기도 해요. 그래서 한동안 이 작품 출연을 멀리했어요. 그러다 지난 번 20주년 기념 공연에 다시 참여했죠. 오랜만에 해보니 역시 코미디 연극으로서는 완벽한 작품이 아닐까 싶었고, 기분도 좋았죠. 무엇보다 요즘은 모두가 우울하고, 힘든 시기잖아요. 웃음과 위로가 필요한 시기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바쁜 일정에도 흔쾌히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스페셜 라이어>는 그야말로 국민 연극인데,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작품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가령, 역할 자체는 평범한데 무대 위에 있는 모든 배우들은 너무 진지해요. 그 진지함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더해지면서 웃음이 터지죠. '누구나 그 상황에선 저럴 수 있겠다'는 공감도 생기고요. 무엇보다 훌륭한 대본과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서 오랜 기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시종일관 터지는 웃음이 이 작품의 매력인데, 배우들도 연기하면서 웃음 참기 힘들 것 같아요.
"맞아요. 너무 힘들죠.(웃음) 특히 저 때문에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연습할 때 엄청 많이 웃죠. 서로 '무대 위에서 웃음을 못 참으면 어떡하지' 싶을 정도였어요. 뭐, 그래도 연습하면서 익숙해졌죠. 오히려 웃음 참는 것보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비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예전과 다른 고민은 좀 생겼어요. 20대부터 40대까지는 바비를 귀엽게 연기하는 데 큰 불편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쉰한 살이 되니까 '내가 이렇게 (귀여운 척을) 해도 되나' 괜히 낯부끄러울 때가 종종 있어요. 이제는 좀 다른 각도로 바비를 표현하는 건 어떨까 매일 고민하고, 수정하고 있어요. 약간 재수 없는 캐릭터로 할까도 생각 중이랍니다."

일각에서는 <스페셜 라이어> 작품 속 성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 희화화가 불편하다는 입장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도 시대와 의식이 변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변화를 피부로 느끼시나요.
"저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올바른 (변화의) 방향이라고는 느껴져요. 다만, 아직은 우리 사회에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중적이라고 생각해요. 실생활에서는 변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누군가 목소리를 내면 '야, 너 왜 그런 얘길 해'라고 짓누르는 사회적 분위기가 여전히 있어요. 이와 반대로 영화, 드라마, 소설, 연극 등 예술작품에서 나오는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간극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이건 늘 제 숙제이기도 해요."

어떤 숙제인가요.
"가령, 제가 방송에서 오버하거나 가벼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성소수자 입장에서 퀴어 코드를 활용해 유머를 할 때가 있죠. 그럴 때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대중들이 또 다른 선입견을 가지면 어쩌지'라고 참 많이 고민했어요. 그래서 되레 제가 커밍아웃 하고 나서 몇 년 동안 바비나 뿌아종 같은 역할을 거부했어요. 일부러 더 안 했죠.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일종의 저만의 무브먼트(movement, 운동)랄까요.

그런데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성소주자) 사람들 중엔 분명 이런 모습을 한 사람도 있고, 이보다 더 한 사람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그중 하나를 역할에 차용하는 것뿐인데 그걸 왜 그저 가볍다, 희화화한다고 말할까. 어쩌면 그것 또한 다른 의미의 차별이 아닐까'라고 말이죠. 저는 이런 배역들이 작품에서 필요한 역할이기에 주어진 거라 생각해요. 저는 그저 제가 맡은 캐릭터의 몸짓과 대화를 제 나름대로 진지하게 연기하는 데 힘을 쏟을 뿐이죠."

이 작품은 결국 거짓말에 관한 이야긴데,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밝혀도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죠. 문득 배우님이 생각하는 진실이란 어떤 건지도 궁금하더라고요.
"굉장히 안타까워요.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기가 힘든 세상이죠. 최근에도 여러 뉴스를 보면서 '과연 저 사람이 말하는 것에 진실성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해요. 저 역시 실제 홍석천의 모습과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 그리고 또 다른 곳에 숨겨놓은 모습까지 어느 정도까지 내 진실한 모습이 보일 수 있을지 조금 심각하게 고민 중이에요.
그 과정에서 혹시 살면서 제 말이나 행동에 기분 나빴거나 상처받은 사람에 대한 반성이 있기도 하고, 내가 표를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관한 (회의나 실망) 것 일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무조건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좀 해방되고 싶기도 해요."

배우님은 거짓말과는 거리가 있어보이시는데, 혹시 살면서 했던 가장 큰 거짓말이 있다면요.
"많죠. 예를 들면 제가 현재 이태원에서 요식업은 접었지만, 온라인 몰은 물론, 자연식 애견사료 회사도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어요. 각 사업마다 이윤 추구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순수한 사업 목적을 지켜나가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죠.
다만, 지인들이 부탁에는 쉽게 '노(NO)' 하지 못한 경우는 있어요. 솔직히 요즘은 그러지 않는데, 과거 홈쇼핑 일을 할 때 굳이 예쁘지 않은 옷인데 너무 예쁘다고 얘기해야 할 때 좀 힘들었죠. 웬만하면 '그래 해주자' 했어요. 다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 미안해'라고 말하는 편이에요. 다만, 여전히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선에서는 도와주려고 한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자영업자로서도 힘든 일을 겪으셨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공연 전 관객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선물을 나눠주시는 것도 그렇고요. 정을 나눌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올까요.
"사실 저도 살면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고, 사기도 당하고, 상처도 참 많이 받았죠. 그럴 때마다 저라고 다 포기하고, 놓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만큼 산 것도 참 잘 살았다 싶어요. 제가 충남 청양 출신이거든요. 어머니가 처음 하숙비와 등록비를 도와주시긴 했지만 열아홉 살에 용돈 7만 원만 가지고 혈혈단신 서울에 왔어요.

그랬던 제가 이만큼까지 왔으면 정말 잘 살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현재 빚이 얼마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말 열심히 살고, 이만큼 이룬 나를 인정해주자고 토닥이는 편이에요. 사실 그전까지는 늘 저를 타인과 비교해서 저 사람만큼 만큼 갖고 싶고, 더 지키고 싶고 키우고 싶었는데, 이제는 지금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종종 교통 정리는 필요하죠. 아무튼 그런 순간마다 시골 소년이었던 저의 본질을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비싼 밥을 먹고 유명한 사람들을 어울려도 제 본질은 충남 청양 칠갑산 촌놈이죠. 아마 우리 고향에서 제가 출세한 거로는 10등 안에 들걸요.(웃음) 그 정도면 잘 살지 않았을까요."

이번에 함께 무대에 서는 분들 모두 쟁쟁한 연기파 배우들이 많습니다. 다들 훌륭하시지만 연습이나 공연하면서 ‘이 배우는 정말 예상보다 더 잘한다’ 싶은 배우가 있다면요.
"한 사람을 꼽자면 저는 인권이요. 장르 불문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지만 그간 인권이가 조연을 많이 맡았잖아요. 이 작품에선 이 친구가 주인공 중 한 사람인데 확실히 초반에는 힘이 조금 들어간 게 보였어요. <스페셜 라이어>는 극의 흐름상 계속 웃음을 주는 극이기 때문에 연기의 강약 조절을 하지 않으면 배우도 관객도 자칫 지치고 힘들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해줬더니 고맙게도 인권이가 너무 잘 받아주더라고요. 뭐 연기력은 더 말할 것 없이 훌륭하죠."

여전히 동안이신데 벌써 50대라는 게 믿기지 않아요. 어떠세요.
“좋기도 하고, 좀 서운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과거의 그 어려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단, 만약 제가 서른 살 커밍아웃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와는 달리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하고 했을 것 같아요. 아마 그랬더라면 우리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덜 힘들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그런데 막상 또 준비를 너무 많이 하면 못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이루고 싶은 꿈과 목표가 있다면.
“젊은 아티스트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돕고 싶어요. 실제로 이태원 주변 경리단이나 해방촌 부근에 젊은 아티스트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구심점이 없어요. 그래서 제 건물에 그 친구들이 공연이나 전시할 수 있도록 무료로 공간을 빌려주기도 했고, 그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네트워크 중심 역할을 했죠. 물론, 이번에 아쉽게 그 공간은 없어졌지만 다른 곳에 또 하나 만들어줄까 고민 중이에요. 또한 쉐어키친 형식의 공간을 통해 그들만의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고도 싶고요. 그런 것들이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 아닌가 싶어요. 나 참 오지랖도 많아.(웃음)”

나에게 연기란.
“열아홉 살에 서울에 온 목적이 연기하고 싶어서였거든요. 그런데 연기를 하고 싶다고, 열심히 준비한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죠. 동시에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하기도 하고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래도 제가 느끼기에 끝까지 연기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면 누군가는 꼭 나를 불러주는 거 같아요. 지금 배우를 지망하는 분들, 분명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서 이 시기를 견디시길 바라요. 꼭 기회가 올 겁니다.”

글 김수정 기자 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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