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F IN ART] 피라미드(pyramid): 변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
입력 2021-05-17 13:12:43
수정 2021-05-17 13:12:43
피라미드라 하면 보통 이집트에 있는 고대 유적을 떠올린다. 완벽한 형태에 거대한 규모, 오랜 역사와 신비한 상징이 더해져 그 형태는 오늘날에도 문화와 예술에서 계속 차용된다.
영혼의 집, 승천의 장소 이집트에는 피라미드로 분류된 석조 건축물이 100여 개 남아 있다. 대부분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데,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로 외곽 기자의 세 피라미드다. 세 명의 왕을 각각 모신 장소로 기원전 26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세워졌다. 모두 밑면이 정사각형이고 옆면이 이등변삼각형인 거대한 정사각뿔이다. 그중 가장 웅장한 것이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로, 높이가 140m 가까이 된다. 거대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데 거기에는 수학의 비밀이 숨어 있다. 밑변, 높이, 빗변의 요소들이 서로 황금비 관계를 갖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다. 역사상 가장 정밀한 계산과 축조술로 피라미드는 세계 건축의 불가사의로 꼽힌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는 단순히 죽은 자를 안치하는 무덤이 아니라 사후의 거처이자 영혼이 승천하는 장소였다. 피라미드의 정점은 태양과 만나고 내세를 얻는 신성한 지점이었다. 대형 피라미드는 꼭대기가 황금에 싸여 해가 높이 떠오르면 반짝여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광명의 장소에서 신의 대리자인 파라오가 승천해 백성들을 끌어올려 준다고 믿었다. 피라미드는 삶과 죽음을 연결하며 영생을 보증하는 곳으로, 그들에겐 지상의 가장 완벽한 성소였다.
시간이 흘러 이집트가 몰락하면서 파라오의 영광은 쇠퇴하고 그를 따르던 민중의 염원도 과거 속에 묻혔다. 그러나 위대한 건축 피라미드는 긴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살아남았다. 더는 숭상 받지 못하는 쇠락한 구조물이지만, 오랜 문명의 흔적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얻고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낭만적 폐허 속 피라미드
피라미드와 같은 옛 건축물의 폐허는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성취와 그것을 압도하는 자연의 위력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처럼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대상 앞에서 경험하는 공포, 불안, 경이가 뒤섞인 열락의 감정을 미학 용어로 '숭고'라고 한다.
'숭고' 개념은 고대 그리스부터 있었지만, 18세기 중엽에 와서 중요한 미적 범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감정이나 본능, 상상력, 열정 등을 표출하는 낭만주의 예술이 발달하게 된다. 화가들은 숭고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찾아 묘사하곤 했는데, 웅장한 자연과 그 속에 방치된 폐허가 좋은 소재가 됐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1808년)는 '폐허의 로베르'라고 불릴 만큼 평생 폐허에 집착했다. 그는 청년 시절 로마에 11년간 체류하면서 고대의 유적을 스케치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풍경화가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Giovanni Paolo Pannini, 1691~1765년)의 화실에 다니며 '카프리치오'라는 회화 양식을 습득했다.
카프리치오란 실제와 환상이 결합된 풍경화의 일종으로, 역사적인 건물이나 유적, 기타 건축 요소를 조합해 창의적으로 배치하는 그림이다. 18세기에 폼페이 발굴을 계기로 이탈리아를 탐방하는 대여행 붐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는데, 이에 편승해 카프리치오 회화가 급속히 부상했다. 특히 로마의 유적을 고전적으로 묘사한 판니니의 그림이 인기가 있었다.
그의 폐허 그림에는 건물과 함께 피라미드도 가끔 등장한다. 그 피라미드는 고대 로마의 종교인이었던 가이우스 세스티우스의 무덤으로,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됐다. 기자의 피라미드보다는 훨씬 작고 빗면의 경사가 심하지만, 이집트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파리로 돌아온 로베르는 로마 폐허를 그린 카프리치오 회화로 대성공을 거두며 이름을 날리게 된다. 로베르가 만년에 그린 <이집트 기념비들 사이의 파랑돌>에는 고대의 거대한 기념물들이 황폐한 풍경 속에 배치돼 있다. 부러진 오벨리스크 뒤로 높은 하늘 밑에 꼭대기가 부서진 피라미드 세 채가 하나씩 희미하게 멀어지고 있다. 인간의 피땀 어린 업적이 유구한 자연의 시간 속에 허무하게 사라져 간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자연의 위력에 비해 인간의 존재는 너무나 왜소하고 나약하기만 하다.
그런데 무거운 폐허가 압도하는 황량한 곳에서 사람들이 손을 잡고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그들에게 폐허의 장면은 헛되고 우울한 것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견딘 고대의 유적은 비록 낡았지만 아직도 살아남아 인간의 위대한 능력을 칭송한다. 자연이 계속해서 파괴한다 해도 인간은 또다시 자신의 흔적을 지상에 남기고 업적을 쌓아올릴 것이다.
폐허는 인간의 삶이, 세상 만물이 언젠가는 끝날 거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인간의 유한함을, 죽음을 인정하라고 엄중히 촉구한다. 두려운 사실이지만, 유한함이 있기에 역으로 무한함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는 정신이 유한 속에 매몰되지 않고 무한을 향해 고양됨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도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는 게 아닐까.
국가의 상징이 된 피라미드
오늘날 미국의 옥새에는 피라미드가 새겨져 있다. 그 피라미드는 미화 1달러짜리 지폐 뒷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전통적 피라미드를 차용해 변형한 형태로, 꼭대기가 잘려 있다. 잘려 나간 부분에는 삼각형이 빛을 발하고 있고, 그 속에서 눈동자 하나가 지켜보고 있다. 그 눈은 국가를 보호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의 눈이다. 아래쪽은 대지에 돌을 쌓아 구축한 현실의 피라미드다. 그것은 인간이 이룩한 업적이자 국가를 뜻한다. 현실에서 피라미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미완의 부분은 사람들이 협력해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다. 이렇게 변형된 피라미드는 여러 민족이 모여 구축한 미국의 역사를 의미하며 프런티어 정신에 입각한 국가의 이상을 암시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었던 피라미드가 현대 미국에서는 민주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표면적인 의미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그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항상 불가침의 영역을 남겨뒀다는 점이다. 신의 눈동자가 있는 미국의 피라미드나 황금으로 태양을 맞이하던 옛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물론이고, 무한한 시간과 자연의 힘으로 꼭대기가 풍화된 폐허의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피라미드가 여러 문화에서 흔히 차용되는 것은 그 속에 변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닐까.
글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
영혼의 집, 승천의 장소 이집트에는 피라미드로 분류된 석조 건축물이 100여 개 남아 있다. 대부분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데,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로 외곽 기자의 세 피라미드다. 세 명의 왕을 각각 모신 장소로 기원전 26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세워졌다. 모두 밑면이 정사각형이고 옆면이 이등변삼각형인 거대한 정사각뿔이다. 그중 가장 웅장한 것이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로, 높이가 140m 가까이 된다. 거대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데 거기에는 수학의 비밀이 숨어 있다. 밑변, 높이, 빗변의 요소들이 서로 황금비 관계를 갖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다. 역사상 가장 정밀한 계산과 축조술로 피라미드는 세계 건축의 불가사의로 꼽힌다.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는 단순히 죽은 자를 안치하는 무덤이 아니라 사후의 거처이자 영혼이 승천하는 장소였다. 피라미드의 정점은 태양과 만나고 내세를 얻는 신성한 지점이었다. 대형 피라미드는 꼭대기가 황금에 싸여 해가 높이 떠오르면 반짝여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광명의 장소에서 신의 대리자인 파라오가 승천해 백성들을 끌어올려 준다고 믿었다. 피라미드는 삶과 죽음을 연결하며 영생을 보증하는 곳으로, 그들에겐 지상의 가장 완벽한 성소였다.
시간이 흘러 이집트가 몰락하면서 파라오의 영광은 쇠퇴하고 그를 따르던 민중의 염원도 과거 속에 묻혔다. 그러나 위대한 건축 피라미드는 긴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살아남았다. 더는 숭상 받지 못하는 쇠락한 구조물이지만, 오랜 문명의 흔적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얻고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낭만적 폐허 속 피라미드
피라미드와 같은 옛 건축물의 폐허는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성취와 그것을 압도하는 자연의 위력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처럼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대상 앞에서 경험하는 공포, 불안, 경이가 뒤섞인 열락의 감정을 미학 용어로 '숭고'라고 한다.
'숭고' 개념은 고대 그리스부터 있었지만, 18세기 중엽에 와서 중요한 미적 범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감정이나 본능, 상상력, 열정 등을 표출하는 낭만주의 예술이 발달하게 된다. 화가들은 숭고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찾아 묘사하곤 했는데, 웅장한 자연과 그 속에 방치된 폐허가 좋은 소재가 됐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1808년)는 '폐허의 로베르'라고 불릴 만큼 평생 폐허에 집착했다. 그는 청년 시절 로마에 11년간 체류하면서 고대의 유적을 스케치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풍경화가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Giovanni Paolo Pannini, 1691~1765년)의 화실에 다니며 '카프리치오'라는 회화 양식을 습득했다.
카프리치오란 실제와 환상이 결합된 풍경화의 일종으로, 역사적인 건물이나 유적, 기타 건축 요소를 조합해 창의적으로 배치하는 그림이다. 18세기에 폼페이 발굴을 계기로 이탈리아를 탐방하는 대여행 붐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는데, 이에 편승해 카프리치오 회화가 급속히 부상했다. 특히 로마의 유적을 고전적으로 묘사한 판니니의 그림이 인기가 있었다.
그의 폐허 그림에는 건물과 함께 피라미드도 가끔 등장한다. 그 피라미드는 고대 로마의 종교인이었던 가이우스 세스티우스의 무덤으로,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됐다. 기자의 피라미드보다는 훨씬 작고 빗면의 경사가 심하지만, 이집트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파리로 돌아온 로베르는 로마 폐허를 그린 카프리치오 회화로 대성공을 거두며 이름을 날리게 된다. 로베르가 만년에 그린 <이집트 기념비들 사이의 파랑돌>에는 고대의 거대한 기념물들이 황폐한 풍경 속에 배치돼 있다. 부러진 오벨리스크 뒤로 높은 하늘 밑에 꼭대기가 부서진 피라미드 세 채가 하나씩 희미하게 멀어지고 있다. 인간의 피땀 어린 업적이 유구한 자연의 시간 속에 허무하게 사라져 간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자연의 위력에 비해 인간의 존재는 너무나 왜소하고 나약하기만 하다.
그런데 무거운 폐허가 압도하는 황량한 곳에서 사람들이 손을 잡고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그들에게 폐허의 장면은 헛되고 우울한 것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견딘 고대의 유적은 비록 낡았지만 아직도 살아남아 인간의 위대한 능력을 칭송한다. 자연이 계속해서 파괴한다 해도 인간은 또다시 자신의 흔적을 지상에 남기고 업적을 쌓아올릴 것이다.
폐허는 인간의 삶이, 세상 만물이 언젠가는 끝날 거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인간의 유한함을, 죽음을 인정하라고 엄중히 촉구한다. 두려운 사실이지만, 유한함이 있기에 역으로 무한함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는 정신이 유한 속에 매몰되지 않고 무한을 향해 고양됨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도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는 게 아닐까.
국가의 상징이 된 피라미드
오늘날 미국의 옥새에는 피라미드가 새겨져 있다. 그 피라미드는 미화 1달러짜리 지폐 뒷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전통적 피라미드를 차용해 변형한 형태로, 꼭대기가 잘려 있다. 잘려 나간 부분에는 삼각형이 빛을 발하고 있고, 그 속에서 눈동자 하나가 지켜보고 있다. 그 눈은 국가를 보호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의 눈이다. 아래쪽은 대지에 돌을 쌓아 구축한 현실의 피라미드다. 그것은 인간이 이룩한 업적이자 국가를 뜻한다. 현실에서 피라미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미완의 부분은 사람들이 협력해 영원히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다. 이렇게 변형된 피라미드는 여러 민족이 모여 구축한 미국의 역사를 의미하며 프런티어 정신에 입각한 국가의 이상을 암시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었던 피라미드가 현대 미국에서는 민주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표면적인 의미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그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항상 불가침의 영역을 남겨뒀다는 점이다. 신의 눈동자가 있는 미국의 피라미드나 황금으로 태양을 맞이하던 옛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물론이고, 무한한 시간과 자연의 힘으로 꼭대기가 풍화된 폐허의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피라미드가 여러 문화에서 흔히 차용되는 것은 그 속에 변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닐까.
글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