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산운용 시장이 기존 펀드 중심에서 상장지수펀드(ETF)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국내외 투자 대가들의 ETF 예찬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운용사들도 ETF 경쟁력 강화로 태세 전환에 돌입한 모습이다. 사실 ETF가 글로벌 시장에 처음 등장은 시기는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투자자들로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20여 년 전이다. 국내 도입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ETF는 글로벌 자산관리 시장에서 필수 키워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최근 국내 자산운용 업계에서는 외국계 운용사들의 잇단 한국 철수가 이슈화됐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자산운용과 매쿼리투자신탁운용에 이어 프랭클린템플턴투자신탁운용 등 반년 새 3곳의 외국계 운용사들이 잇따라 국내 시장에서 발을 뺐다.
관련 업계에서는 한국 시장의 까다로운 금융 규제 탓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기존 펀드 판매망이 대형 금융지주사 위주로 재편되면서 설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ETF 등 패시브 투자가 늘어난 영향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여기에 ‘똑똑한’ 개인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직구 행렬도 외국계 운용사들의 수익성 악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팔방미인’ ETF, 펀드와 주식의 장점 합쳐
ETF는 특정 자산의 수익률과 유사한 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도록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운용하는 인덱스펀드 기법에서 발전했다. 거래소에 상장돼 있어 주식 매매와 마찬가지로 1주 단위로 거래할 수 있다. 개별 자산이 아닌 ‘묶음’ 자산에 투자하기 때문에 변동성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만기가 정해져 있는 펀드와 달리 주식처럼 ‘사고팔기’ 쉽다는 점에서 펀드와 주식의 장점을 합쳐놓은 금융상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수수료 부담도 낮다. 글로벌 ETF의 평균 보수율은 지난 2016년 0.23%에서 지난해 말 0.19%로 낮아졌으며, 국내 ETF도 후발 주자들의 공격적인 저가 전략으로 같은 기간 0.25%에서 0.10%로 크게 하락했다. 여기에 주식부터 채권, 부동산, 원자재, 외환 등 투자 대상에 대한 특별한 제약이 없다는 점도 ETF의 매력 요소로 꼽힌다.
특히 ETF는 선물옵션 등 파생상품과 달리 ‘만기’와 ‘증거금’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 증권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품이 아니다. 대다수 파생상품의 경우 증시 급등락에 따라 원금을 초과하는 손실을 보기도 하는데, 계좌잔고가 유지증거금에 못 미칠 경우 반대 매매로 강제 청산되기도 한다.
파생상품 시장에서 대부분의 개인들이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구조적 요인에 기인하고 있다. 반면 ETF는 투명하고 간단한 구조 덕분에 ‘분산투자’라는 투자 원칙만 잘 세운다면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이 같은 이유로 ETF는 국내외 유력 인사들로부터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투자 상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최근 공개석상에서 “개별 종목을 찾고 투자수익률을 높이는 것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며, 개인투자자는 분산투자를 위해 성장 산업의 ETF에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윤종규 KB금융 회장은 “금융사의 서비스에서 ETF는 자산 배분 등에 꼭 필요한 상품인 만큼 상품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에 앞서 가치투자의 대가로 꼽히는 워런 버핏은 평소 투자철학으로 “당신이 잘 아는 종목에 장기 투자하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인덱스펀드에 투자하라”고 강조해 왔다. 또 사후를 대비한 유서에는 “내가 죽으면 투자 자산의 10%는 미국 국채 매입에, 나머지 90%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인덱스펀드에 투자해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져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ETF, 투자 트렌드 선행…운용사·투자자, 직접 연결
ETF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로는 글로벌 투자 트렌드를 선행해 왔다는 점이 꼽힌다. 대표적인 사례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다. 현재는 전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너도나도 ESG 경영에 나서고 있지만, ESG ETF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0년여의 기간 동안 50여 개 수준을 유지했던 ESG ETF는 지난 2016년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말 500여 개까지 늘어났다. 관련 ETF의 전체 운용자산(AUM)만 1870억 달러에 육박한다. 국내 ETF 시장 역시 최근 부진을 면치 못하는 사모·공모펀드와 달리 꾸준한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ETF 순자산 규모는 58조 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20% 이상 급증했다.
금정섭 미래에셋자산운용 이사는 “ETF의 근본 경쟁력은 제조사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의 혁신’에 있다”며 “제조사인 운용사가 소비자인 투자자에게 거래소를 통해 ‘산지직송’으로 공급하다 보니 가격이 저렴해지고 투자자 수요에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양하게 진화하는 ETF 투자 기법
글로벌 주식시장에 상장된 ETF는 각각의 상품명 앞에 고유 식별 브랜드명이 붙어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운용자산을 보유한 블랙록은 ‘아이셰어(iShares) ETF’ 시리즈를 내놓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코덱스(KODEX, 삼성자산운용), 킨덱스(KINDEX, 한국투자신탁운용), 타이거(TIGER, 미래에셋자산운용), 아리랑(ARIRANG, 한화자산운용), KB스타(KBSTAR, KB자산운용) 등의 브랜드로 각각의 자산운용사를 식별할 수 있다.
인덱스펀드로부터 진화한 ETF의 속성상 대표 상품은 지수 ETF다. 이 종목은 코스피, 코스닥, S&P500, 상하이종합지수처럼 시장지수를 복제하는 상품이다. 국내 최초의 ETF는 지난 2002년 삼성자산운용이 상장한 코덱스200 ETF로, 한국거래소의 대형 200개 종목으로 구성된 코스피200 지수를 복제해 운용하는 인덱스펀드다.
사실 국내에서 ETF가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로, 시장과 반대로 수익을 내는 ‘코덱스 인버스 ETF’의 높은 수익률 때문이었다. 이후 원금보다 2배 더 많은 투자효과를 내는 코덱스 레버리지 ETF의 등장으로 국내 ETF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삼성자산운용이 국내 ETF 시장 점유율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도 이런 선점효과에 기인한다.
ETF 도입 초기와 달리 ETF를 활용한 다양한 투자 기법도 속속 소개되고 있다. 경기순환 이론을 적용한 ‘4계절 투자법’도 주요 기법 중 하나다. 4계절 투자법이란 시기별로 적합한 자산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투자 대가로 꼽히는 워런 버핏과 빌 그로스 역시 같은 방식의 투자 기법을 활용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주식시장이 대략 10년에 한 번 큰 변곡점을 지나며 3년 이내의 상승, 횡보, 하락의 사이클을 보인다는 점 역시 ETF 투자 시 염두에 둘 부분으로 꼽힌다.
이 같은 투자 기법은 ‘시장은 결국 우상향 한다’라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데, 로보어드바이저 기반의 자산관리 핀테크 앱들이 ETF를 주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여기에 투자 상품의 고평가, 저평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벤저민 그레이엄의 밸류에이션 방식을 활용하면 글로벌 시장과 글로벌 업종의 고평가, 저평가 여부에 대한 판단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예측하기 힘든 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장기적으로 안정적 수익을 낼 수 있는 금융상품은 ‘ETF’뿐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장기 투자와 함께 ETF 투자 시 지켜야 할 투자 원칙은 적립식 투자다. 정액적립식 분할 매수는 코스트 애버리지 효과를 갖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분할 매수 시기에 대해 펀드처럼 ‘월 단위’를 가장 추천한다.
물론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다. ETF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수료가 장점이지만, 해외 ETF에 투자할 경우에는 세금 부담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국내 주식형 ETF는 분배금에만 15.4%의 배당소득세가 부과되지만, 해외 ETF는 매매차익과 분배금 모두에 15.4%의 세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퇴직연금 계좌를 활용하면 매매차익과 분배금에 대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대신 퇴직 후 퇴직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 수령 방식에 따라 퇴직소득세나 연금소득세만 내면 된다.
액티브 ETF 출격…투자자 선택 폭 확대
국내 ETF 시장 전반의 구조적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기존 국내 ETF 시장은 인덱스형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현재는 테마형, 업종 섹터, 해외 부문 등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테마형 ETF는 특정 주제를 선정해 투자하는 ETF로 AI, 클라우드, 자율주행, 로봇 등 혁신 기술은 물론 환경, 에너지, 바이오 등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를 이끄는 기업에 투자한다.
또 5월 말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등을 비롯해 국내 주요 자산운용사들이 잇따라 액티브 ETF를 출시하면서 투자자들의 선택 폭도 더욱 넓어졌다.
액티브 ETF는 지수를 단순히 따라가는 패시브형 ETF와 달리 포트폴리오의 70%가량은 비교지수를 따르지만, 나머지는 자산운용사의 운용 노하우가 반영되는 상품이다. 각사의 운용 실력에 따라 플러스 ‘알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국내 액티브 ETF는 2017년 채권형이 최초로 상장된 후 2020년 주식형이 새롭게 도입됐으나 종목 수는 10여 개로 아직까지는 초기 단계”라며 “미국 시장과 같이 자산구성내역(PDF) 일간 공개 등에 대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테마형 ETF의 경우 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이었던 지난해에는 바이오, 2차전지 등 성장주 관련 ETF가 주목받았다면 올 들어서는 철강, 원유, 은행 등 경기민감주 관련 ETF가 수익률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글로벌 경제가 코로나19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는 기대 섞인 분위기가 ETF 수익률에도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김성길 SC제일은행 투자자문팀 부장은 “코로나19 이후 언택트 테마 등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던 IT 업종 중심의 성장주는 올 들어 금리 상승세와 함께 높은 밸류에이션에 대한 우려로 인해 상대적으로 약세를 나타내고 있는 반면, 지난해 증시에서 소외됐던 경기민감 가치주들은 저평가 매력과 경기 회복 수혜가 기대된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성장주에 대한 관심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다각화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되 백신 접종에 따른 경제 정상화의 수혜가 예상되는 경기민감 가치주의 비중을 당분간 높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공인호 기자 ba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