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조정은 인터뷰
단아한 외모, 청아한 목소리, 깊이 있는 연기와 노래까지. 매 무대마다 본인만의 색채로뮤지컬의 정석을 보여주는 배우 조정은을 만났다. 그가 말하는 일과 사랑, 그리고 꿈은 무엇일까.
무대 위 배우 조정은의 모습은 흡사 고려청자를 닮았다. 화려하기보다는 단아하고, 강렬하게 빛을 내뿜기보다는 고고히 그러모은다. 그 단단하고 섬세한 빛줄기에 사람들의 눈과 귀가 쏠리고 이내 그에게 매료된다. 팬들은 이런 그를 ‘선녀’라고 부른다. 곱씹을수록 어울리는 닉네임이다. 선녀 같은 그가 무대에 오른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뮤지컬 <피맛골 연가>, <닥터지바고>, <엘리자벳>, <드라큘라>, <레미제라블> 등 제목만으로도 관객들의 기대감을 자아내는 대형 뮤지컬의 주역으로 활약한 그는 한국 뮤지컬 대상에서 신인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관객들이 뽑은 최고의 여자 배우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명실공히 국내 최정상 뮤지컬 배우다.
정작 배우 본인은 뮤지컬이 처음부터 꼭 맞는 옷은 아니었다고 한다. 장르 특성상 몸짓부터 발성, 노래, 연기, 감정표현까지 모든 걸 무대에서 쏟아내야 하는 뮤지컬이 자신의 타고난 ‘결’과 적잖이 다르다고도 했다.
하지만 2014년 뮤지컬 <드라큘라> 한국 초연에서 ‘미나’ 역할에 캐스팅되면서 그의 뮤지컬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오로지 한 여인만을 사랑한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로, 프랭크 와일드혼의 드라마틱한 음악, 스펙타클한 무대 장치까지 삼박자가 어우러진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014년 초연 당시 2개월 만에 10만 관객을 모으며, 2주간의 재연 공연에서는 3000석 이상의 객석을 메우며 매 시즌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조정은이 맡은 ‘미나’는 드라큘라에 대한 자신의 수많은 감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이다. 현재의 삶에서 약혼자 조나단을 뿌리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드라큘라에 대한 이끌림과 연민을 복합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역할이다. 결코 쉽지 않은 배역이지만 조정은은 도전해보기로 했다.
단, 혼자가 아닌 연출가와 배우들과 함께 상의하며 상상 속 미나의 실체를 그려 나갔다. 그 과정이 그는 좋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얻는 배움과 재미, 감동은 조정은이 뮤지컬 배우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더 큰 보폭으로 진화하는 데 단초가 됐다. 그래서일까. 최근 다시 ‘미나’로 돌아온 그는 이 작품을 두고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는 파트너”라고 했다. 배우 조정은이 말하는 뮤지컬 <드라큘라>의 찐 매력과 무대 안팎의 인간 조정은에 대해 두루두루 이야길 나눠봤다.
우선, 2014년 초연과 지난해 삼연에 이어 2021 시즌 드라큘라에 합류한 소회가 궁금해요.
“사실 이번에 출연하는 것을 두고 처음엔 조금 고민이 되기도 했죠. 혹시라도 관객들이 ‘또 나오나’ 하실까 봐요.(웃음) 그런데 일단 지난해 삼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공연이 한 달가량 일찍 막을 내려서 아쉬움이 컸어요. 무엇보다 이 작품에 제가 정말 애정이 크거든요.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사람들과 다시 무대에 서는 것도 반갑고, 새로운 캐스트들과의 조합은 새롭고, 즐거워요. 여전히 미나의 노래와 연기는 까다롭지만, ‘이것 역시 (더 나은 것을) 찾아가는 거구나’ 생각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미나 역을 맡으면서 연기에 재미를 느꼈다고 들었어요. 복잡 미묘한 미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나요.
“아직도 머리로는 그녀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항상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딱 떨어지듯 설득되는 게 아니잖아요.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제자리에 머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일들도 생기고요. 그래서 미나를 연기할 때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나요.
“초연 작업을 할 때 연출님과 미나 역할에 대해 정말 많은 얘길 나눴어요. 당시만 해도 미나에 대해 ‘딱 이거다’라고 정해진 게 없었죠. 그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강점이자 매력이었어요. 정해진 게 없어서 제가 상상하는 미나, 그리고 함께 의견을 나누며 그려 나가는 미나를 연기하면서 제가 비로소 연기에 재미를 느끼게 됐거든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과정들을 통해 저는 그간 제가 발견하지 못한 제 내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점이 작품에도 도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시너지를 줬다고 할까요. 저에겐 그야말로 ‘파트너’ 같은 존재인 작품이랍니다.”
작품 속 드라큘라의 유혹처럼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빠진 적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사실 저는 좀 평소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에 대해서든, 일에 대해서든 머뭇거리거나 미리 앞서 결과를 고민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쉽게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정말 앞뒤 안 재고 ‘아, 이거다’ 했던 건 유학이에요. 그건 정말 꼭 해야 했어요.”
왜인가요.
“그때는 정말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느낌이었어요. 물론, 당시 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유학 가는 게 마냥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고민은 없었어요. 그땐 정말 그게 꼭 필요했어요.”
혹시 아직도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나요.
“지금은 배움에 대한 갈증보다는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요즘은 그게 뮤지컬이든 어떤 것이든 뭔가를 창작하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생겨나요.”
그게 꼭 연기가 아니더라도요.
“네네. 심지어 그게 목적과 결과가 명확한 공연의 형태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꼭 무엇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기보다 누군가 대화를 하다가, 혹은 뜻이 맞아 좋은 아이디어를 함께 디벨로핑하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가령, 2019년 제 단독콘서트를 했을 때도 (이런 갈망들이) 일정 부분은 좀 해소가 됐기도 했어요. 처음이었기에 만들어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막상 하고 나니 ‘아, 이래서 콘서트를 하는구나’ 싶더라고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제작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완벽주의자 성향을 좀 내려놓았다고 들었습니다. 변화가 있었나요.
“네, 그럼요. 사실 예전에 저는 ‘난 좀 뮤지컬이란 장르랑 안 어울리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 적이 많아요. 그래서 기존 틀에 무작정 저를 맞추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제 소리를 냈다기보다는 되고 싶은 걸 흉내 내고, 자꾸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이 제가 타고난 성향이나 ‘결’과는 좀 다르다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뭐든 완벽할 수 없고, 내 안의 진짜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만족할 수 없더라고요. 완벽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학대하지 않으려 해요. 그저 매사 최선을 다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세 명의 드라큘라와 호흡은 어떤가요.
“정말 잘 맞아요. 준수 씨와 동석 씨는 이전 시즌에서도 합을 맞춰서 편하고, 새롭게 만난 성록 씨랑도 과거에 여러 작품에서 만났거든요. 그래선지 호흡도 잘 맞고 성록 씨를 통해 이전에는 몰랐던 작품 속 의미들도 새롭게 발견하게 돼요. 무엇보다 3인 3색 드라큘라가 저는 정말 좋아요. 같은 작품이지만 각 드라큘라마다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고, 매회 그날만의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어서 참 좋더라고요.”
드라마나 영화 제안이 들어오신다면 어떠세요.
“몇 차례 드라마나 영화 쪽에서 생각지도 못한 제안들이 온 적이 있어요. 좀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죠. 과연 그 역할을 내가 할 수 있을까, 혹은 새로운 제작 환경에 내가 적응할 수 있을까 싶어서 고사한 적이 있어요. 만약 또 그런 기회가 온다면 가장 ‘조정은다운’ 모습부터 자연스럽게, 작은 것부터 해보겠다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아직까지 큰 계획은 없습니다.”
벌써 데뷔 20년이에요. 격세지감을 느끼시나요.
“크게 다른 건 모르겠고, 확실한 건 하나 있어요. 선배보다 후배가 현저히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죠. 특히, 후배들이 인사할 때요. 요즘도 <드라큘라> 연습이나 공연하러 가면 후배들이 ‘안녕하십니까’라며 아주 소스라치게(?) 인사해요.(웃음) 그럴 때마다 ‘아 내가 이 친구들과 나이나 경력이 많이 차이가 나는구나’ 싶죠.”
눈에 띄는 후배가 있나요.
“저는 현재 같이 공연하는 예은 씨요. 예은 씨는 저한테 없는 에너지가 정말 많아요. 항상 배역을 깊이 연구하고, 열심히 하죠. 무엇보다 무대를 즐길 줄 아는 배우예요. 처음 예은 씨를 본 건 뮤지컬 <레미제라블> 연습실에서였어요. 그때는 예은 씨가 앙상블에 참여했는데 이후 <드라큘라>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정말 다르더라고요. ‘와, 이렇게 잘하는 친구구나’ 싶었죠. 막상 이번에 함께 해보니까 더는 그저 후배란 느낌이 안 들어요. 심지어 이제는 예은 씨가 저를 이끌어 갈 때도 있답니다.”
배우의 삶이 고단할 것 같은데 평소에는 뭘 하며 시간을 보내세요.
“저는 정말 특별히 뭘 안 해요. 그저 가만히 있어요. 졸리면 자고, 몸의 긴장을 빼려고 해요. 심지어 음악을 많이 듣는 편도 아니에요. 그런 것도 쉴 때 저한테는 피곤하게 느껴져서, 그저 가만히 저를 두려고 해요. 아, 간혹 김연아 선수의 과거 스케이팅 모습이나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레 무대, 김혜자 선생님의 연기를 종종 찾아볼 때는 있어요. 그것들을 통해 영감을 받기도 하고요. 그 외에는 종종 동네 친구랑 근처 대학교 캠퍼스에 산책을 가거나 맛있는 것 함께 먹는 거 좋아합니다. 제가 또 배고픈 건 잘 못 참아요.(웃음)”
작품이 끝나면 긴 휴식을 갖는 편인데, <드라큘라>가 끝나면 또 어떤 쉼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혹시 추후 작품 활동이나 콘서트 계획이 있으신지요.
“올해는 쉬지 않으려고요. 무언가를 더 해보고 싶은데 아직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더라고요. 다만, 올해든 내년이든 온라인상에서라도 기회가 된다면 공연이든 뭐든 한번 팬들과 만나보려고 구상 중이에요. 온라인상의 만남도 재밌고 좋더라고요.”
수많은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보셨는데 유독 합이 좋았던 배우나 롤모델로 삼는 인물이 있나요.
“파트너들마다 저한테 좋은 영향을 정말 많이 주셨어요. 그중 지금 생각나는 분들을 꼽자면 뮤지컬 배우 박은태 씨와 김준수 씨요. 은태 씨는 뮤지컬 <피맛골 연가>에서 만났어요. 일단 은태 씨는 사람들을 참 편하게 해줘요.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고, 어딜 가도 적응력이 빠르더라고요. 거추장한 체면치레도 없고, 늘 상대에 대한 배려가 깊은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죠. 어떤 작품에서 만나도 편할 것 같아요. 준수 씨는 뭐랄까 저한테 없는 걸 참 많이 가진 친구예요. 무엇보다 감각이 뛰어나고요. 갖고 있는 에너지도 크고, 그런 것들을 본능적으로 어떻게, 폭발적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굉장히 잘 알고 있어요. 무엇보다 늘 밝고 긍정적이고, 똑똑해요. 드라큘라를 할 때도 자기 배역만을 하는 게 아니라 극 전체를 꿰뚫고 시너지를 내죠.”
드라큘라는 결국 사랑에 대한 얘기잖아요. 배우님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
“사실 좋아하는 마음을 잘 표현하질 못해요.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훅 빠지기도 하죠. 저는 저에게 없는 매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게 연기든 노래든 성격이든 저에게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이요. 보태어 제가 감정적인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안정되고 무던히 저를 지켜줄 수 있는 분이면 좋겠어요. 제 약점을 편하게 드러내도 괜찮은 사람이면 참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뮤지컬을 하고 있다는 게 무척 감사하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해요. 돈과 시간, 심지어 혹시 모를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연장을 온다는 건 엄청난 열정이거든요. 그리고 배우들에게 쏟아주시는 관심과 자비 등을 느낄 때면 제가 참 좋은 직업을 갖고 있구나 싶죠. 감사해요. 관객들이 극장에 들어와서 막이 오르고 내리는 2시간 30분 동안 아무 방해 없이 작품에 푹 빠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제 바람이랍니다.”
글 김수정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