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그저 먼 나라, 부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신탁’이 어느새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유언대용은 물론, 상속 및 자산관리, 치매 간병,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안전망으로까지 진화 중인 팔색조 신탁의 매력을 소개한다.
100세 시대 우리는 행복할까. 아니,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2000년 고령화사회에 들어선 뒤 2018년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인간의 숙원이자 본능인 무병장수를 향한 꿈이 현실에 더 가까워졌지만 저금리와 저성장의 늪은 노후를 불안하게 한다. 은퇴를 앞둔 세대는 물론 장기간 미래 계획을 세워야 하는 2030세대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뿐만 아니다. 고령화로 인한 치매 등 인지 능력 저하는 자산관리의 복병이다. 부모세대의 상속재산을 놓고 벌이는 가족 간 피도 눈물도 없는 상속 분쟁이 최근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 신탁은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투자 등 재테크 역할뿐만 아니라 자산관리의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생존신탁(가족을 수익자로 지정해 생존 시 파산, 질병 등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의 생활비 등을 보호), 유언신탁(사망 시를 대비해 상속재산 처분 계획을 미리 설정), 사회안전망 역할을 담당할 후견신탁이나 복지신탁 등 그 변주는 무한대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은 이미 신탁에 의한 생전 노후 관리가 보편화돼 있다. 일본은 2000년부터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됐고, 2012년에는 후견제도지원신탁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치매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사기를 당하거나 금융 피해를 입는 상황을 막기 위한 ‘시큐리티형 신탁’, 이미 치매에 걸려 의사결정이 어려운 경우를 위한 ‘후견제도지원신탁’, 원활한 상속을 위한 ‘유언대용신탁’·‘자산승계신탁’·‘자사주승계신탁’ 등 종류도 다양하다.
2019년 3월 기준 일본 후견제도지원신탁의 수탁 건수는 2만1397건, 수탁 잔고는 6474억 엔으로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금융권 역시 안전한 노후 관리를 위한 신탁 상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61개 신탁사의 총 수탁고는 1032조3000억 원으로 전년 말 대비 68조1000억 원(7.1%)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 신탁 시장 규모가 1000조 원을 돌파한 것은 사상 최초다. 이는 고령화 시대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상속과 관련한 신탁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노후 대비는 물론, 상속·증여 관련 신탁 상품을 문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과거와 달리 자산가들뿐만 아니라 생활형, 대중형 신탁 상품에도 관심을 갖는 고객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신탁의 ‘유연성’ 덕분에 다양한 고객들의 니즈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산관리부터 치매 케어까지
신탁의 변주는 다양하지만 그중 백미는 ‘유언대용신탁’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영국 등 외국에서는 상속과 관련해 유언장 대신 ‘신탁’을 한 방편으로 널리 이용하고 있다. 신탁이란 기본적으로 위탁자가 ‘위탁자’의 재산권을 ‘수탁자’인 신탁 회사에 이전해 수탁자(신탁 회사)가 이를 운용해 수수료를 얻고, 나머지 수익을 수익자 또는 위탁자에게 주는 법률관계다.
신탁은 재산 보호라는 목적 외에 재산의 관리와 증식, 다양한 재산 승계 방법의 활용, 절세효과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된다. 또한 생전에 재산을 자손들에게 이전하면서 자손들이 함부로 재산을 처분하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도 쓰인다.
신탁 계약은 위탁자의 자유의사대로 그 계약 내용을 매우 유연하게 정할 수가 있고 계약 내용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 특히 신탁을 할 경우, 도산격리(insolvency protection)가 가능한데 이는 위탁자의 파산재단에도 귀속되지 않고, 수탁자의 파산재단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가령 A씨가 B씨에게 돈을 수탁했을 경우, 수탁자 B씨가 파산을 당해도 A씨가 수탁한 돈이 B씨의 채권단은 물론 법적으로도 손을 댈 수 없다. 안정적인 상속을 위해 이 신탁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유언신탁, 유언대용신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유언대용신탁은 상속을 하는 사람이 예금, 채권, 부동산 등 자산을 금융사에 맡기고 금융사가 계약에 따라 상속 집행을 책임지는 서비스를 말한다.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체결하면, 생전에는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받음으로써 자산 형성에 도움이 되고, 사후에는 계약에서 정한 재산 배분이 신속하게 정해진다. 금융사가 상속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일주일 정도면 상속재산 분배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언대용신탁은 기존의 유언장이 갖고 있는 법적 효력의 한계를 보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상속제도는 크게 법정상속과 유언상속으로 나뉘는데, 아무리 유언을 남기더라도 유언법정주의에 근거해 피상속인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상황을 유언장에 담을 수 없게 돼 있다. 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일종의 ‘거래 계약’인 만큼 피상속인이 계약 형식을 통해 자신의 요구 사항을 폭넓게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속 절차의 투명성도 확보할 수 있다.
더불어 고령화 시대에 본격 진입하면서 국내 치매발병률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치매로부터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신탁 상품들도 잇따라 출시됐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은행이 2019년 12월 금융권 최초로 특허출원을 완료한 하나금융그룹 협업 상품 ‘하나 케어신탁’이다.
‘하나 케어신탁’은 고령화 시대에 치매 등 건강 악화로 자산관리가 힘들어질 때를 대비해 안전하게 금융자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특화된 대중형 유언대용신탁 상품이다.
건강할 때 지급 절차를 미리 지정했다가 치매 등으로 의사 판단 및 거동이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사전에 정한 절차에 따라 병원비, 요양비, 간병비 등을 효율적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이와 관련해 특허출원까지 완료했다.
하나은행은 ‘하나 케어신탁’과 하나생명의 ‘무배당 안심케어 연금보험’을 연계해 신탁과 보험의 장점을 결합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 ‘무배당 안심케어 연금보험’은 LTC(일상생활 장해 상태 또는 중증치매 상태) 진단이 확정될 경우 종신 시까지 생존 연금에 케어 연금을 더해 연금액을 2배로 수령할 수 있는 LTC 특화 연금보험 상품으로, 연금수령액이 ‘하나 케어신탁’으로 지급돼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 신한은행은 2019년 11월 환자가 직접 병원비를 출금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사전에 지정한 대리인이 병원비를 출금할 수 있게 한 ‘신한 메디케어 출금 신탁’을 내놨으며, KB국민은행은 치매를 대비하기 위해 성년후견제도에 대한 법률 상담을 제공하는 ‘치매안심상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사회안전망으로 신탁 활용↑
사실 초기 신탁제도는 자산가를 위한 상속 설계와 자산관리 기능을 주로 수행했다. 하지만 사회가 변모하고, 정부와 공공 영역의 손이 오롯이 닿지 못하는 다양한 사회안전망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미성년자나 장애우 등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재산 보호 기능까지 맡는 등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실례로 최근 고령화 시대를 맞아 간혹 부모보다 결혼한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도 더러 생긴다. 이 경우 손자녀가 대습상속인 자격으로 상속권을 갖게 되는데, 손자녀가 미성년자라면 상속재산을 관리하기 쉽지 않아 고민이 될 수 있다.
이때 신탁을 활용하면 상속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고,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하다. 또한 이혼과 재혼이 증가하면서 무책임한 부모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탁을 활용하거나 복잡한 가족관계 속에서 어린 자녀를 보호하는 대비책으로 신탁을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에 하나은행은 ‘신탁법’ 개정 이전인 2010년 국내 첫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했다. 유언대용신탁은 유언장 없이도 위탁자 생전에 유언 효과 및 생전·사후의 재산 관리는 물론 안정적 운용까지 가능한 종합자산관리 상품이다. 유언장보다 더 안전하고 정확한 재산 분배는 물론 미성년 자녀를 위한 재무 보호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우리은행의 경우 2018년 장애인특별부양신탁제도를 바탕으로 ‘우리장애인사랑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장애인특별부양신탁이란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52조의2에 의거, 장애인이 증여받은 재산을 신탁할 경우 해당 재산의 증여세를 면제받는 제도를 적용했다.
이 밖에도 신탁 활용은 광범위하다. 시중은행들도 가입 기준을 낮춘 이색 신탁 상품을 속속 출시하며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펫신탁(PET信託)’이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국내 반려동물 양육가구는 591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6.4%에 달한다. 네 집 중 한 집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관련 시장규모도 2015년 1조8000억 원에서 지난해 5조8000억 원으로 3배가량 늘어나는 등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아끼는 ‘펫팸(pet+family)족’이 늘면서 관련 산업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주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반려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펫트러스트(pet trust)’ 형태의 상속 시스템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는 양상이다. 실제로 펫팸 문화가 뿌리 깊은 미국의 경우, 명예신탁의 형태로 사망한 주인을 대신해 신탁 회사가 남겨진 반려동물을 보호하고 있다. 명예신탁이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에게 이익을 주려는 의도로 설정된 것으로 비공익적 목적을 가진 신탁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물을 위한 명예신탁으로 이는 특정 애완동물의 보호 및 이익을 위한 신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남겨진 동물을 보호하는 명목상 명예신탁을 할 경우에도 이를 허용하는 실정법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6년부터 반려동물을 위한 신탁 상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주로 신탁 가입 고객이 죽거나 병환 등으로 반려동물을 돌볼 수 없는 상태가 될 때를 대비해 은행에 반려동물의 양육자금을 맡기는 상품이다. 은행은 새로운 부양자에게 반려동물 보호 및 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지급하게 되는데, 하나은행의 ‘PET사랑신탁’과 KB국민은행의 ‘KB 펫코노미 신탁’이 대표적이다.
하나은행의 ‘PET사랑신탁’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손님(위탁자)이 생전에 미리 하나은행(수탁자)과의 신탁 계약을 통해 본인 유고 시 반려동물을 돌봐줄 귀속권리자(사후수익자)를 정한다.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남길 수 있는 가족배려신탁 상품 중 하나다.
무엇보다 신탁의 가장 큰 장점은 남은 가족들 간 재산 다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가족을 구성하는 형태와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재산을 소유한 자가 유언장 없이 세상을 등지게 되면 남은 가족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점점 더 늘고 있다. 부모가 갑작스레 치매에 걸렸을 때 부모의 자산을 두고 자식들이 재산 싸움을 벌이는 것도 대표적인 케이스다. 한 은행관계자는 “신탁은 공신력 있는 제삼자(은행)가 상속을 집행하기 때문에 갈등 구조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부동산관리, 해외거주자를 위한 자산관리, 기업승계까지 신탁의 폭풍 변주는 계속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4사4색 신탁상품]
하나은행
‘100년 운용 치매 대비 신탁’
‘100년 운용 치매 대비 신탁’은 건강한 시기에는 적립과 자산 운용을 통해 수익을 추구하고, 치매, 질병 등으로 자금 관리가 필요한 때에는 상황에 맞게 △노후케어 기능 △상속 기능 △생활비 지급 기능 △안심 지급 기능 등 종합 생활 관리를 제공하는 상품이다. 특히 하나의 신탁계좌로 정기예금부터 투자 상품까지 다양한 운용자산을 통합해 운영된다.
KB국민은행
‘KB내생애(愛)신탁’
‘KB내생애(愛)신탁’은 평소에는 투자를 통해 자산 운용이 가능하고, 건강 악화 시엔 의료비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다. 사후에는 상속이나 기부 등 자산의 처리에 대한 설계도 가능하다. 특히 고객들의 의료 편의를 위해 ‘행복 건강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전문가의 자산관리 및 상속·증여 컨설팅 서비스와 성년후견제도지원 등 부가 서비스 제공도 가능하다.
신한은행
‘에스라이프케어 증여신탁’
‘에스라이프케어 증여신탁’은 기존 증여신탁을 리뉴얼해 출시한 상품으로 기존 증여신탁의 운용자산인 국고·통안채, 가치주에 상장지수펀드(ETF)를 운용자산으로 신규 편입해 상품성을 강화했다. 이 상품은 10년 주기로 받을 수 있는 증여세 공제 한도를 활용해 장기 투자 후 발생한 투자 수익에 대해 절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우리은행
‘시니어플러스 우리안심신탁’
우리은행은 고객 재산을 사전에 지정된 상속자에게 안전하게 승계될 수 있도록 하는 ‘시니어플러스 우리안심신탁’ 등을 판매하고 있다. 우리안심신탁은 생전에 고객이 직접 재산을 통제할 수 있어 효율적인 재산 관리가 가능하고, 고객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상속도 가능하다. 또한 위탁자 생전에 상속재산과 상속자가 지정돼 사후 신속한 상속이 이뤄질 수 있다.
100세 시대 우리는 행복할까. 아니,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2000년 고령화사회에 들어선 뒤 2018년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인간의 숙원이자 본능인 무병장수를 향한 꿈이 현실에 더 가까워졌지만 저금리와 저성장의 늪은 노후를 불안하게 한다. 은퇴를 앞둔 세대는 물론 장기간 미래 계획을 세워야 하는 2030세대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뿐만 아니다. 고령화로 인한 치매 등 인지 능력 저하는 자산관리의 복병이다. 부모세대의 상속재산을 놓고 벌이는 가족 간 피도 눈물도 없는 상속 분쟁이 최근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 신탁은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투자 등 재테크 역할뿐만 아니라 자산관리의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생존신탁(가족을 수익자로 지정해 생존 시 파산, 질병 등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의 생활비 등을 보호), 유언신탁(사망 시를 대비해 상속재산 처분 계획을 미리 설정), 사회안전망 역할을 담당할 후견신탁이나 복지신탁 등 그 변주는 무한대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은 이미 신탁에 의한 생전 노후 관리가 보편화돼 있다. 일본은 2000년부터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됐고, 2012년에는 후견제도지원신탁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치매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사기를 당하거나 금융 피해를 입는 상황을 막기 위한 ‘시큐리티형 신탁’, 이미 치매에 걸려 의사결정이 어려운 경우를 위한 ‘후견제도지원신탁’, 원활한 상속을 위한 ‘유언대용신탁’·‘자산승계신탁’·‘자사주승계신탁’ 등 종류도 다양하다.
2019년 3월 기준 일본 후견제도지원신탁의 수탁 건수는 2만1397건, 수탁 잔고는 6474억 엔으로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금융권 역시 안전한 노후 관리를 위한 신탁 상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61개 신탁사의 총 수탁고는 1032조3000억 원으로 전년 말 대비 68조1000억 원(7.1%)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내 신탁 시장 규모가 1000조 원을 돌파한 것은 사상 최초다. 이는 고령화 시대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상속과 관련한 신탁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베이비붐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노후 대비는 물론, 상속·증여 관련 신탁 상품을 문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과거와 달리 자산가들뿐만 아니라 생활형, 대중형 신탁 상품에도 관심을 갖는 고객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신탁의 ‘유연성’ 덕분에 다양한 고객들의 니즈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산관리부터 치매 케어까지
신탁의 변주는 다양하지만 그중 백미는 ‘유언대용신탁’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영국 등 외국에서는 상속과 관련해 유언장 대신 ‘신탁’을 한 방편으로 널리 이용하고 있다. 신탁이란 기본적으로 위탁자가 ‘위탁자’의 재산권을 ‘수탁자’인 신탁 회사에 이전해 수탁자(신탁 회사)가 이를 운용해 수수료를 얻고, 나머지 수익을 수익자 또는 위탁자에게 주는 법률관계다.
신탁은 재산 보호라는 목적 외에 재산의 관리와 증식, 다양한 재산 승계 방법의 활용, 절세효과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된다. 또한 생전에 재산을 자손들에게 이전하면서 자손들이 함부로 재산을 처분하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도 쓰인다.
신탁 계약은 위탁자의 자유의사대로 그 계약 내용을 매우 유연하게 정할 수가 있고 계약 내용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 특히 신탁을 할 경우, 도산격리(insolvency protection)가 가능한데 이는 위탁자의 파산재단에도 귀속되지 않고, 수탁자의 파산재단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가령 A씨가 B씨에게 돈을 수탁했을 경우, 수탁자 B씨가 파산을 당해도 A씨가 수탁한 돈이 B씨의 채권단은 물론 법적으로도 손을 댈 수 없다. 안정적인 상속을 위해 이 신탁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유언신탁, 유언대용신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유언대용신탁은 상속을 하는 사람이 예금, 채권, 부동산 등 자산을 금융사에 맡기고 금융사가 계약에 따라 상속 집행을 책임지는 서비스를 말한다.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체결하면, 생전에는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받음으로써 자산 형성에 도움이 되고, 사후에는 계약에서 정한 재산 배분이 신속하게 정해진다. 금융사가 상속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일주일 정도면 상속재산 분배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언대용신탁은 기존의 유언장이 갖고 있는 법적 효력의 한계를 보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상속제도는 크게 법정상속과 유언상속으로 나뉘는데, 아무리 유언을 남기더라도 유언법정주의에 근거해 피상속인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상황을 유언장에 담을 수 없게 돼 있다. 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일종의 ‘거래 계약’인 만큼 피상속인이 계약 형식을 통해 자신의 요구 사항을 폭넓게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속 절차의 투명성도 확보할 수 있다.
더불어 고령화 시대에 본격 진입하면서 국내 치매발병률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치매로부터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신탁 상품들도 잇따라 출시됐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은행이 2019년 12월 금융권 최초로 특허출원을 완료한 하나금융그룹 협업 상품 ‘하나 케어신탁’이다.
‘하나 케어신탁’은 고령화 시대에 치매 등 건강 악화로 자산관리가 힘들어질 때를 대비해 안전하게 금융자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특화된 대중형 유언대용신탁 상품이다.
건강할 때 지급 절차를 미리 지정했다가 치매 등으로 의사 판단 및 거동이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사전에 정한 절차에 따라 병원비, 요양비, 간병비 등을 효율적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이와 관련해 특허출원까지 완료했다.
하나은행은 ‘하나 케어신탁’과 하나생명의 ‘무배당 안심케어 연금보험’을 연계해 신탁과 보험의 장점을 결합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한다. ‘무배당 안심케어 연금보험’은 LTC(일상생활 장해 상태 또는 중증치매 상태) 진단이 확정될 경우 종신 시까지 생존 연금에 케어 연금을 더해 연금액을 2배로 수령할 수 있는 LTC 특화 연금보험 상품으로, 연금수령액이 ‘하나 케어신탁’으로 지급돼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 신한은행은 2019년 11월 환자가 직접 병원비를 출금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사전에 지정한 대리인이 병원비를 출금할 수 있게 한 ‘신한 메디케어 출금 신탁’을 내놨으며, KB국민은행은 치매를 대비하기 위해 성년후견제도에 대한 법률 상담을 제공하는 ‘치매안심상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사회안전망으로 신탁 활용↑
사실 초기 신탁제도는 자산가를 위한 상속 설계와 자산관리 기능을 주로 수행했다. 하지만 사회가 변모하고, 정부와 공공 영역의 손이 오롯이 닿지 못하는 다양한 사회안전망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미성년자나 장애우 등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재산 보호 기능까지 맡는 등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실례로 최근 고령화 시대를 맞아 간혹 부모보다 결혼한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도 더러 생긴다. 이 경우 손자녀가 대습상속인 자격으로 상속권을 갖게 되는데, 손자녀가 미성년자라면 상속재산을 관리하기 쉽지 않아 고민이 될 수 있다.
이때 신탁을 활용하면 상속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고, 효율적인 운용이 가능하다. 또한 이혼과 재혼이 증가하면서 무책임한 부모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탁을 활용하거나 복잡한 가족관계 속에서 어린 자녀를 보호하는 대비책으로 신탁을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에 하나은행은 ‘신탁법’ 개정 이전인 2010년 국내 첫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했다. 유언대용신탁은 유언장 없이도 위탁자 생전에 유언 효과 및 생전·사후의 재산 관리는 물론 안정적 운용까지 가능한 종합자산관리 상품이다. 유언장보다 더 안전하고 정확한 재산 분배는 물론 미성년 자녀를 위한 재무 보호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우리은행의 경우 2018년 장애인특별부양신탁제도를 바탕으로 ‘우리장애인사랑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장애인특별부양신탁이란 ‘상속세 및 증여세법’ 제52조의2에 의거, 장애인이 증여받은 재산을 신탁할 경우 해당 재산의 증여세를 면제받는 제도를 적용했다.
이 밖에도 신탁 활용은 광범위하다. 시중은행들도 가입 기준을 낮춘 이색 신탁 상품을 속속 출시하며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펫신탁(PET信託)’이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국내 반려동물 양육가구는 591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6.4%에 달한다. 네 집 중 한 집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관련 시장규모도 2015년 1조8000억 원에서 지난해 5조8000억 원으로 3배가량 늘어나는 등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아끼는 ‘펫팸(pet+family)족’이 늘면서 관련 산업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주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반려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펫트러스트(pet trust)’ 형태의 상속 시스템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는 양상이다. 실제로 펫팸 문화가 뿌리 깊은 미국의 경우, 명예신탁의 형태로 사망한 주인을 대신해 신탁 회사가 남겨진 반려동물을 보호하고 있다. 명예신탁이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에게 이익을 주려는 의도로 설정된 것으로 비공익적 목적을 가진 신탁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물을 위한 명예신탁으로 이는 특정 애완동물의 보호 및 이익을 위한 신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남겨진 동물을 보호하는 명목상 명예신탁을 할 경우에도 이를 허용하는 실정법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6년부터 반려동물을 위한 신탁 상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주로 신탁 가입 고객이 죽거나 병환 등으로 반려동물을 돌볼 수 없는 상태가 될 때를 대비해 은행에 반려동물의 양육자금을 맡기는 상품이다. 은행은 새로운 부양자에게 반려동물 보호 및 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지급하게 되는데, 하나은행의 ‘PET사랑신탁’과 KB국민은행의 ‘KB 펫코노미 신탁’이 대표적이다.
하나은행의 ‘PET사랑신탁’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손님(위탁자)이 생전에 미리 하나은행(수탁자)과의 신탁 계약을 통해 본인 유고 시 반려동물을 돌봐줄 귀속권리자(사후수익자)를 정한다.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남길 수 있는 가족배려신탁 상품 중 하나다.
무엇보다 신탁의 가장 큰 장점은 남은 가족들 간 재산 다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가족을 구성하는 형태와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재산을 소유한 자가 유언장 없이 세상을 등지게 되면 남은 가족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점점 더 늘고 있다. 부모가 갑작스레 치매에 걸렸을 때 부모의 자산을 두고 자식들이 재산 싸움을 벌이는 것도 대표적인 케이스다. 한 은행관계자는 “신탁은 공신력 있는 제삼자(은행)가 상속을 집행하기 때문에 갈등 구조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부동산관리, 해외거주자를 위한 자산관리, 기업승계까지 신탁의 폭풍 변주는 계속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4사4색 신탁상품]
하나은행
‘100년 운용 치매 대비 신탁’
‘100년 운용 치매 대비 신탁’은 건강한 시기에는 적립과 자산 운용을 통해 수익을 추구하고, 치매, 질병 등으로 자금 관리가 필요한 때에는 상황에 맞게 △노후케어 기능 △상속 기능 △생활비 지급 기능 △안심 지급 기능 등 종합 생활 관리를 제공하는 상품이다. 특히 하나의 신탁계좌로 정기예금부터 투자 상품까지 다양한 운용자산을 통합해 운영된다.
KB국민은행
‘KB내생애(愛)신탁’
‘KB내생애(愛)신탁’은 평소에는 투자를 통해 자산 운용이 가능하고, 건강 악화 시엔 의료비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다. 사후에는 상속이나 기부 등 자산의 처리에 대한 설계도 가능하다. 특히 고객들의 의료 편의를 위해 ‘행복 건강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전문가의 자산관리 및 상속·증여 컨설팅 서비스와 성년후견제도지원 등 부가 서비스 제공도 가능하다.
신한은행
‘에스라이프케어 증여신탁’
‘에스라이프케어 증여신탁’은 기존 증여신탁을 리뉴얼해 출시한 상품으로 기존 증여신탁의 운용자산인 국고·통안채, 가치주에 상장지수펀드(ETF)를 운용자산으로 신규 편입해 상품성을 강화했다. 이 상품은 10년 주기로 받을 수 있는 증여세 공제 한도를 활용해 장기 투자 후 발생한 투자 수익에 대해 절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우리은행
‘시니어플러스 우리안심신탁’
우리은행은 고객 재산을 사전에 지정된 상속자에게 안전하게 승계될 수 있도록 하는 ‘시니어플러스 우리안심신탁’ 등을 판매하고 있다. 우리안심신탁은 생전에 고객이 직접 재산을 통제할 수 있어 효율적인 재산 관리가 가능하고, 고객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상속도 가능하다. 또한 위탁자 생전에 상속재산과 상속자가 지정돼 사후 신속한 상속이 이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