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업체, 발 빠른 '투자 전쟁'



세계 반도체 산업의 매출이 올 들어 세 번째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반도체 호황을 맞이한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은 발 빠르게 투자 전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7월 세계 반도체 산업 매출액은 454억 달러(약 53조 원)로 집계돼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같은 달(352억 달러)보다는 29%, 전월(445억 달러)보다 2.1%나 늘었다. 올해만 벌써 역대 월간 최고 매출 기록을 3번이나 경신하는 등 호황세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SIA는 1976년 이래로 이 통계를 매월 작성하고 있다. SIA는 매출이 증가하는 것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주요 지역 시장에서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면서 반도체 칩 생산과 출하량이 최근 몇 달 동안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했다.

이런 세계 반도체 산업의 매출 증가는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 등이 앞으로 성장이 둔화할 것이라고 전망한 것과는 반대다. 오히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가 올해 반도체 시장 성장률을 기존 19.7%에서 25.1%로 상향 조정하는 등 당분간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 맞는 듯하다.

실제로 올해 2분기 전 세계 반도체 제조장비 시장 규모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글로벌 반도체 제조장비 업계 주문액은 248억7000만 달러(약 28조9163억 원)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2분기보다는 48%, 지난 1분기보다는 5%나 늘어난 규모다.

제조장비 매출이 증가했다는 것은 반도체 업계가 수요 증가에 따라 생산량을 대폭 늘리기 위해 수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수요가 증가하는 이유는 각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첨단 제품 생산에 적극 나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라 비대면 비즈니스 등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업체, 대규모 시설 투자 ‘올인’
반도체 수요 증가에 따라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이 시설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미국의 인텔이 시설을 대폭 확장할 계획을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9월 7일 독일 뮌헨 오토쇼(IAA) 기조연설에서 “반도체 수요가 계속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대담한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면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겔싱어 CEO는 “인텔이 앞으로 10년에 걸쳐 최대 800억 유로(약 110조3000억 원)를 투자해 유럽 지역에 반도체 공장 2개를 지을 계획”이라면서 “유럽에서의 공장 신설 계획은 더욱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인텔의 대규모 생산시설 투자 계획은 지난 3월 200억 달러를 들여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 2개를 신설하고 35억 달러를 투자해 뉴멕시코주 공장을 확대하겠다고 밝힌 지 6개월 만에 나왔다. 당시 겔싱어 CEO는 인텔이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하겠다면서 오는 2025년까지 파운드리 분야 1위인 대만의 TSMC와 2위인 한국의 삼성전자를 뛰어넘겠다고 밝혔다.

인텔이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는 이유는 TSMC와 삼성전자도 시설을 증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TSMC는 지난 4월 향후 3년에 걸쳐 1000억 달러(약 116조 원)를 투자해 생산능력 확대에 나선다고 발표했었고, 삼성전자도 지난 8월 앞으로 3년간 170조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인텔은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지만 파운드리 시장에서의 존재감이 미약하다. 인텔로선 TSMC와 삼성전자의 양강 구도인 파운드리 시장을 3강 구도로 재편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점유율을 높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대규모 투자에 나선 것이다.

겔싱어 CEO의 계획 중에서 눈여겨볼 점은 아일랜드에 차량용 반도체 생산에 특화된 공장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겔싱어 CEO는 “2020년대 말까지 차량용 반도체 시장이 현재 2배인 1150억 달러(약 134조 원)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그는 “프리미엄 자동차의 경우 재료비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이 2019년 4%에서 향후 20% 이상으로 치솟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럽은 BMW, 폭스바겐, 다임러, 스텔란티스 등 세계적인 완성차 업체들이 있는 지역으로, 차량용 반도체 수요가 많다. 게다가 유럽연합(EU)도 반도체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EU는 오는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 비중을 2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2024년까지 반도체 산업에 1450억 유로(약 200조 원)를 지원한다는 반도체 육성 계획을 내놓은 바 있다. 인텔의 유럽 투자 계획은 이런 점을 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 수요 ‘급증’…업체들 분주
차량용 반도체는 전기자동차 등 친환경차 확산과 자율주행 기술 발달로 시장 수요가 급증하고 있지만 기술 난도는 비교적 낮다.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나 중앙처리장치(CPU) 등의 반도체보다 난도가 낮은 28~100나노미터(nm: 1nm는 10억 분의 1m) 정도의 공정 수준에서도 생산이 가능하다. 현재 인텔의 첨단 공정은 10nm이지만, TSMC와 삼성전자는 3nm 공정의 제품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따라서 인텔의 의도는 TSMC 및 삼성전자와는 첨단 공정을 놓고 경쟁하되 차량용 반도체 등 기술 난도가 낮은 제품을 석권해 수익을 높이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TSMC는 전체 생산하는 반도체 중 4% 정도만 차량용이고, 삼성전자는 차량용 반도체는 거의 생산하지 않는다. 차량용 반도체는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10분의 1 정도로, 네덜란드 NXP(점유율 21%), 독일 인피니언(19%), 일본 르네사스(15%),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14%),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13%) 등이 주요 생산 업체다.

이런 가운데 중국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이자 세계 5위인 중신궈지(SMIC)도 대규모 시설 투자에 나설 계획이다. SMIC는 9월 3일 상하이 자유무역시범구의 린강 관리위원회와 손잡고 상하이에 88억7000만 달러(약 10조2000억 원)를 투입해 반도체 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SMIC는 상하이 공장에서 28nm 제품 생산에 주력할 계획이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선봉장인 SMIC의 최대 주주는 정부 기관(지분 11.8%)으로 사실상 국가가 관리하는 기업이다. SMIC는 지난 3월과 8월 선전과 베이징에도 반도체 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SMIC의 올해 전체 투자액은 1226억 위안(약 22조 원)으로 추산된다.

SMIC는 신설되는 공장들에서 차량용 반도체를 집중적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SMIC는 지난해 미국 정부의 제재로 수출 규제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위기에 몰리는 듯했지만, 오히려 매출이 크게 늘었다. SMIC의 2분기 매출액은 13억4400만 달러(약 1조5400억 원)로 전년 대비 43.2%나 증가했다. 당기순이익도 6억8800만 달러(약 7900억 원)로 전년 대비 398.5%나 뛰었다.

SMIC의 매출 증가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지와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SMIC에 대해 7nm 이하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도록 첨단 제조 장비들의 수출을 통제해 왔다. 그러자 SMIC는 제재 대상이 아닌 차량용 반도체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삼성전자나 TSMC보다 기술력이 떨어지는 SMIC도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중국의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차량용 반도체들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 언론매체인 디이차이징(第一財經)에 따르면 지난 7월 이후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이 계속 심각해진 가운데 일부 중국 토종 자동차 기업과 중외 합작 자동차 기업의 생산량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광저우자동차와 일본 혼다자동차의 합작 법인인 광치혼다(廣汽本田)의 경우 지난 6∼7월 생산량이 전년 동기 대비 40% 이상 떨어졌으며, 일부 차종의 경우 80% 이상 생산량이 줄었다.

올해 중국 자동차 판매는 2700만 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인해 달성이 어려울 전망이다. SMIC는 차량용 반도체 수요 증가에 따라 앞으로 상당히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차량용 반도체 수요 증가가 미국 정부의 강력한 제재 조치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SMIC를 비롯해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들도 시설 투자에 나서고 있다. 세계 3위인 대만 UMC는 최근 대만 남부에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36억 달러(약 4조2000억 원)가 투입되는 이번 증설 작업은 내년 2분기에 완료될 예정이다. 세계 4위인 글로벌 파운드리즈는 60억 달러(약 7조 원)를 들여 독일 드레스덴과 미국 뉴욕, 싱가포르에 있는 파운드리 공장을 확장할 계획이다.

전 세계적인 차량용 반도체 부족과 공급난은 앞으로 2~3년은 계속 될 것으로 글로벌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내다보고 있다. 올라 칼레니우스 다임러 CEO는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은 내년까지 영향을 주고 그다음 해에야 완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보기술(IT) 전문 조사 업체 서스퀘나 파이낸셜에 따르면 반도체 발주에서 납품까지 걸리는 리드타임은 지난 7월 20.2주로 2017년 이후 가장 길었다. 이 중 자동차, 가전제품 기능을 제어하는 마이크로 컨트롤러 유닛(MCU) 등의 리드타임은 26.5주로 통상 6~9주보다 3~4배 길어졌다. 이에 따라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8월 반도체 부족으로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에 있는 8개 공장에서 1~4주간 감산 결정을 내렸다. 포드 자동차도 인기 차종인 F-150 픽업트럭을 포함한 일부 차종의 생산량을 줄였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 역시 전 세계 생산량을 당초 계획보다 40% 줄일 계획이다.

일각에선 전기차 시대가 조만간 도래하는 만큼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이 더욱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군나르 헤르만 포드 자동차 유럽법인 CEO는 “자동차 시장이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전환되면서 반도체 공급난이 악화되고 있다”며 “자동차용 반도체 대란은 2024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정확히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헤르만 CEO는 “포드의 소형차인 포커스에 반도체가 300개 정도 들어가지만 포드의 신형 전기차에는 반도체가 3000개 이상 탑재된다”면서 “앞으로 차량용 반도체 수요가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고 공급은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은 내연기관차 생산 중단과 전기차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판매량은 지난해 200만 대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500만 대 이상으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글로벌 자동차 통계 기관인 마크라인즈에 따르면 올해 1~7월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288만 대로 집계됐다. 올해 남은 5개월(8~12월) 동안 이 같은 성장세가 이어지면 500만 대 판매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는 올해 글로벌 전기차 시장 규모를 전년 대비 40% 이상 성장한 688만 대로 전망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차량용 반도체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한 만큼 반도체 업체들도 더욱 치열하게 ‘투자 전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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