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차영석
펜의 마법이 펼쳐진다. 단색의 연필과 컬러 펜만의 놀라운 조합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최소한의 미’는 고스란히 간직한 화면이다. 균형, 공간, 무게, 리듬, 강약, 그리고 감출 수 없는 완벽함과 적당한 위트가 교묘하게 녹아 있다. 철저히 계획적이되, 되도록 덜 드러나는 것이 어떤 장점인지를 잘 보여준다. 차영석 작가의 그림이 추구하는 이 ‘최소한의 미학’은 결코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 데서 나온다. 그 위에 절제된 생동감을 더했기 때문이다. 마무리 단계에서 최적화된 색채 작업까지 아주 조금만 가미하면 차영석만의 완결미가 탄생된다.성실한 감각이란 무엇일까. 차영석 작가의 그림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연필의 첫 선(線)이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지 못한다. 화면 전체를 동시에 찍어낸 것처럼 균일한 평면성을 지녔다. 어느 지점도 허투루 돌출된 곳이 없다. 마치 애초부터 ‘눈에 덜 띄는 것’을 추구한 듯하다.
하지만 표현된 대상들은 화면 안에 머물되, 언제나 충분히 여유롭다. 거기엔 이미 완벽한 ‘느슨함의 철학’이 존재한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모여 메마른 계곡이 강을 이루듯, 일관되고 지속적인 느릿한 필선이 쌓여 세밀한 면(面)의 언어가 된다. 차 작가만의 소통방식이다.
차 작가는 그림 그리기를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화두에 집중하고 있다. 이 화두는 그가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원동력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친숙하면서 동시에 새로움을 전하는 방식을 좇았다. 해법은 간단했다. 그림에서 세 가지를 없앴다. 일정한 시점(視點)이 없고, 빛의 영향이 없으며, 수정하는 일이 없다. 연필을 사용하면서도 지우개를 쓰지 않는 것은 웬만한 직관력과 집중력 없이는 결코 쉽지 않다. 구상화(具象畵)임에도 빛의 양감과 그림자를 포기한다는 것 역시 명확한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의 그림은 일정한 정법을 따르지 않으니, 맞고 틀리다는 이분법적인 판단이 무의미하다. 그저 쉽게 ‘사물을 잘 그렸다’는 평가보단 완성됐을 때 ‘좋은 느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이 처음엔 뭔가 어색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단결처럼 그림이 온몸을 감싸듯 스며드는 마력을 부린다. 비록 속도는 느려도 종이 위에 연필로 마법을 부린 그의 작업에서 ‘노동력의 숭고함’을 발견하게 된다. 차 작가는 그것을 ‘우아한 노력(an elegant endeavour)’이라고 부른다.
전시 제목 혹은 작품 제목에 ‘우아한 노력’이라고 달기까진 쉽지 않았다. 미술대학을 두 번 다녔다. 구상화법에 강세였던 대구의 영남대에 이어 현대미술 트렌드를 리드한다는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워낙 힘들었던 생활 형편상 첫 번째 대학생활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오랜 기간 미술학원의 데생수업 경험은 오히려 지금 연필 작업의 기반이 돼줬다. 가장 기본에 충실하되 본인만의 조형적 감수성을 직조해낼 조형 세계를 완성해준 귀중한 자산인 셈이다.
명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다. 차 작가에겐 펜 한 자루면 충분하다. 그를 명장(名將)으로 자리매김한 전장의 탁월한 무기가 돼줬다. 더욱이 길고 고된 외로움과의 사투를 감내해야 할 숙명마저 거뜬히 이겨낸 그는 미술계의 명장(明匠)이다.
초기의 ‘건강한 정물’ 시리즈 대작 <웰 스틸 라이프(Well Still Life)_20>만 봐도 연필 하나로 얼마나 풍부한 조형적 감성 표현이 가능한지를 잘 보여준다. 마치 먹색 하나로 우주만물의 색감을 다 보여줄 수 있다는 전통 수묵화 못지않다. 소소한 일상의 갖가지 기물이 지닌 제각각의 특성을 엑스선(X-ray)으로 찍어낸 것처럼 생생하다. 신이 한줌의 흙과 숨결로 인간을 빚어내듯 차 작가의 연필선 끝에서 만물이 소생한 기적을 이뤘다.
차 작가의 그림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교한 기품을 잃지 않는다는 것도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기세가 당당하다. 그 이유는 잘 짜인 포치(布置) 덕분이다. 위치와 전후 또는 원근 관계, 전체적 균형 등을 철저하게 감안한 차 작가 특유의 직관적 판단력이 돋보인다.
공중에 비상한 청색의 매를 표현한 작품 <언 엘리건트 인데버(An Elegant Endeavour)_158>은 긴장감의 극치를 보여준다. 활짝 펼친 양쪽 날개는 세로 화면을 무한대로 확장시켜줄 것만 같고, 매서운 눈빛을 좇다 보면 어느새 저 멀리 먹잇감까지 발견하게 되는 착각에 빠진다. 특히 위아래에 수많은 꽃망울을 매단 매화나무는 문인화의 품격과 격조 그 이상의 멋을 뽐낸다.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을 보면 작가적 감성이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다. 차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감’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바로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초기 작품부터 삶의 정취(情趣)를 자아내는 일상의 소품들을 자주 그림 소재로 삼았다. 비록 겉보기에 잡동사니 같을지언정 사람들의 취미나 추억이 스민 기물들에서 색다른 시각적 유희를 발견한 것이다. 온갖 다양한 이유로 수집된 사물들은 개인적 관심사나 욕망이 발현돼 그가 속한 사회나 동시대의 감성까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최근 작품에선 한 단계 더 나아가 특화된 수집 아이템을 선보인다. 운동화가 주인공이다. 단순히 스포츠용이나 일상생활에서 착용할 목적의 운동화가 아니다. 마치 극소수 마니아들을 위한 고가(高價)의 편집숍을 보는 듯하다. 주로 특정 명품 브랜드와 아트 협업한 운동화 같다. 가령 컬러펜 운동화 작품 중에 은 화려한 색조의 극치로 눈부시다. 확대해보면 한땀 한땀 바느질한 섬세한 세공이 놀랍기 그지없다. 마치 운동화를 수집한 소장가의 들뜬 흥분의 감정까지 밴 것처럼 뜨거운 감흥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차 작가 그림의 바탕은 종이다. 특히 한국 전통한지 중에 아교를 칠한 장지를 선호한다. 여기에 연필과 컬러펜, 수채물감, 아크릴 과슈 등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한 것이다. 물론 선 긋기는 일정한 호흡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고집스러운 작업 방식은 ‘차영석 스타일의 조형 실험’으로도 여겨진다. 또한 단순한 ‘연필 드로잉’ 단계를 넘어서 ‘연필회화’라는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즉흥적인 ‘한 방’이 아닌, 자기 타협 없이 지고지순하게 시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물을 선물하고 있다. 참으로 ‘우아한 노력’의 고귀함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신작 운동화 소품의 전시 가격은 300만 원, 100호(130.3×162.2cm) 크기는 1200만 원 정도다.
차영석 작가는…
1976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학과 예술사 및 예술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이화익갤러리, 금호미술관 등 국내외에서 1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08년 제30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중앙일보사), 2007년 신진예술가 뉴 스타트 프로그램 선정(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7년 제6회 금호영아티스트 선정(금호미술관) 등을 수상했다. 갤러리 퍼플 스튜디오 입주작가(2013~2014년), 스튜디오 박영 제3기 입주작가(2011~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2008~2009년) 등의 작가 지원 프로그램 중에 선정된 바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아부다비 로열 컬렉션, 에코랜드(제주도), 에코에너지 홀딩스(서울), 벤타코리아(서울), 신세계(서울), LG(서울)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글·사진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