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월클 패션디자이너 우영미 “K-패션, 해외서 ‘전 세계 톱급’ 찬사 듣죠”
입력 2021-10-26 07:00:05
수정 2021-10-26 07:00:05
우영미 솔리드 옴므·우영미 대표·패션디자이너 인터뷰
현재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논할 때 우영미 대표는 가장 먼저 언급될 만한 패션 거장이다. 국내보다 해외, 그것도 패션의 중심 유럽에서 독보적인 패션 아이덴티티를 쌓아 온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시대와 성역을 넘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패션의 본질과 K-패션의 미래 가능성 등을 들어봤다.우영미 솔리드 옴므·우영미 대표. 사진 우영미 제공.
‘클래스는 변하지 않는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우영미 대표. 그의 패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저 문장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불과 30여 년 전까지 하이패션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한국에서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패션철학과 아이덴티티를 고수해 왔다. 그것이 현재 자신의 입지를 월드클래스로 다지는 데 시금석이 됐다. 그래서일까. 우 대표의 닉네임에는 유독 ‘최초’가 많이 붙는다.
우 대표는 1988년 한국 여성 패션디자이너 최초로 남성복 브랜드 ‘솔리드 옴므(SOLID HOMME)’를 론칭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디자인, 견고한 재단으로 남성복의 새 기준을 제시한 그는 2002년부터는 ‘우영미(WOOYOUNGMI)’라는 이름으로 파리 패션위크에 진출해 현재까지 패션쇼에 참가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패션 조합의 회원이 되는 쾌거를 일궜다. 지난해에는 ‘우영미’가 글로벌 패션 격전지 프랑스 파리의 봉마르셰 백화점 남성관에서 오프화이트, 아미는 물론 아크네, 발렌시아가를 제치고 매출 1위에 등극할 정도로 국내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인기가 높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최근 MZ(밀레니얼+Z) 세대들 사이에서 그의 브랜드 가치가 다시 한 번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간 우 대표의 상대적 약점은 세계적 명성에 비해 국내 인지도와 시장점유율이 적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대기업이 패션 유통을 장악한 국내 패션 업계 실정과 명품 패션에 대한 일종의 사대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으면서 국내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 된 측면이 컸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소비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패션에 대한 평가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MZ세대가 있다. MZ세대들은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중시하고, 어린시절부터 몸에 밴 정보력(빅데이터)을 필두로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한다. 이들은 단순히 미디어를 통해 유명세를 얻은 값비싼 명품을 맹목적으로 소비하기보다는 진짜 나만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것, 브랜드 가치의 철학과 클래스까지 꼼꼼히 따져서 물건을 구매한다. 매 시즌 온라인을 통해 패션 컬렉션을 구경하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발 빠르게 패션 흐름을 읽고,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을 실시간으로 팔로우 한다.
그 과정에서 MZ세대들은 ‘우영미’를 발견했고, 열광하고 있다. 그야말로 ‘시대가 클래스를 알아본 셈’이다. 이에 대해 우 대표는 “스마트한 영제너레이션과 ‘우영미’가 만날 수 있었던 건, 오랜 시간 나만의 패션 아이덴티티를 쌓아 왔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패션철학과 K-패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길 나눠봤다.
K-패션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최전선에 계신 분이 우영미 대표님 같은데, 체감하시는지요.
“진짜 말 그대로 천지차이예요. 20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할 때만 해도 ‘한국에 하이패션이 있긴 하느냐’는 질문을 전해 받기도 했었죠.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무척 컸어요. 그만큼 그 당시 유럽에서는 한국 패션의 존재감 자체가 없었죠.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들도 많지 않았고요. 그런데 요즘은 K-컬처와 함께 K-패션에 대한 인식이 정말 높아졌어요. 종종 외신 기자들이 한국에 방문하면 한국인들, 특히 젊은 남성들의 피지컬(신체)은 물론 패션 수준에 굉장히 놀라요. ‘시크하다’, ‘쿨하다’, ‘전 세계 톱급이다’라는 찬사들을 쏟아내죠. 한 5년 전부터 그런 얘기들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다양한 이유들이 있지만 저는 한국의 영제너레이션에 주목해요. 이들은 탄탄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요. 똑똑하고, 트렌디한 소비자를 안방에서 만날 수 있으니 도움이 많이 됩니다.”
맞습니다. 여기에 최근 한국 MZ세대 사이에서 신(新)명품으로 떠오른 ‘우영미’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간 해외에 비해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저희 브랜드가 저평가된 부분이 있었어요. 저희 세대에는 으레 패션 명품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거 같아요. 유럽 명품에 대한 사대주의랄까요. 해당 브랜드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으레 사람들이 ‘이게 좋은 거래’라고 하면 소비하는 풍토가 있었죠.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똑똑해요. 그들은 그런 편견이 없어요. 유명 브랜드라고 해서 무조건 좇지 않죠. 자신의 니즈를 정확히 알고, 무엇이 좋은 건지 아주 야무지고 스마트하게 소비하죠. 여기에 SPA패션을 통해 다양한 옷들을 입어보면서 패션에 대한 경험과 안목을 높이다 보니, 정말 좋은 옷과 브랜드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고, 인정해주는 것 같아요. 가끔 저희에게 ‘영미 누나, 파이팅’이라고 말해주는 분들도 많이 생겼답니다.(웃음)”
지난 2011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패션 조합의 회원이 되신 이후 매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신상 컬렉션을 선보이고 계십니다. 끊임없이 창작을 할 수 있는 원천, 에너지가 궁금합니다.
“저도 사실 그게 궁금해요.(웃음) 아시다시피 패션은 끊임없이 변해요. 그게 곧 숙명이죠. 사람들은 늘 새로운 걸 원하니까요. 요즘은 그 속도도 더욱 빨라졌고요. 저희는 매해 크게 2번 컬렉션이란 큰 시험을 봐요. 어떻게든 꼭 치러야 하는 시험이니까 지금껏 떠밀리듯 해 온 것도 같아요. 그렇게 컬렉션을 하고 나면 완전히 번아웃이 돼요. ‘아, 난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할 거 같다’는 심정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좀 지나면 ‘자, 다음엔 무얼 하지?’라고 제 안의 안테나가 작동돼요. 이를 테면 이런 거예요. 저는 제 머릿속에 항상 안테나가 서 있는 느낌을 받아요. 그 안테나의 초점이 제가 여러 현상들을 보고, 경험하다가 탁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그때 영감을 얻는 것 같아요. 그 순간이 언제 어디서 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항상 그 순간을 생각하면서 안테나를 켜두는 것 같아요.”
주로 어떤 것들에 안테나를 세우고 계신가요.
“정말 여러 가지를 봐요. 거의 모든 것들을요. 뉴스도 보고, 파리에 갈 때면 웬만한 전시회는 다 보는 편이에요. 제겐 매우 반복적인 일상들이죠. 제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걸 제가 흡수하도록 계속 저를 열어놓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위) 우영미 2021FW 컬렉션. 사진 우영미 제공
요즘 사로잡힌 이미지가 있다면요.
“코로나19 사태로 2년 가까이 전 세계인의 심신이 지쳐 있잖아요. 그래선지 지나치게 자극적인 건 피하고 싶더라고요. 자연이나 옛것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2020년에는 쟁쟁한 럭셔리 브랜드를 누르고, 브랜드 ‘우영미’가 파리 봉마르셰의 남성관 매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2008년에 봉마르셰에 입점하고, 2012년에 단독 매장을 오픈한 이래 ‘우영미’는 남성관에서 거의 매년 톱(top) 매출 브랜드였어요. 해외 시장에서는 지난 10년 이상 좋은 성과를 내왔고, 그만큼 알려졌었지만, 국내에서 디지털 정보에 빠른 스마트한 젊은 소비자들이 앞서서 입소문을 내줘서 요즘 우영미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봅니다. 거기에 팬데믹(세게적 대유행)으로 인해 관광객 매출이 줄면서 오히려 파리지엥 중심의 매출이 집중된 우영미 브랜드엔 득이 되기도 했어요. 비결이라고 한다면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해 온 것이 아닐까 싶어요.”
패션이란 게 예술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비즈니스이기도 하죠. 그 사이에서 고민해보신 적은 있나요.
“그럼요. 지금도 계속 고민이죠. 요즘은 뭐든 게 비즈니스예요. 예술도 그렇고, 저희처럼 패션 산업군은 예술에 한 발자국 걸쳐 있으면서도 비즈니스도 해야 되고, 또 제조업이기도 해요. 굉장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비즈니스인데, 예나 지금이나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잘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위) 우영미 2022SS 컬렉션 ‘우영미’는 2020년부터 여성복 라인을 추가해 모던하고 성역 없는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 우영미 제공
패션디자이너, 비즈니스를 꿈꾸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이 길을 성공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조언해주실 만한 이야기가 있다면요.
“무엇보다 자기만의 아이덴티티(Identity, 독자성)가 있어야 해요. 누구나 ‘나는 이런 걸 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 다 있을 거예요. 그걸 지켜야만 독자적 가치를 가질 수 있거든요.”
이를 테면요.
“제 경우 사실 그동안 힘든 일이 많았어요. 주변에서는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 브랜드 파이를 많이 못 키운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도 일종의 자괴감이 든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때마다 전 ‘난 내가 잘 하는 것만 한다’고 다짐했어요. 그것이 제가 말한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쭉 해 온 것 같아요. 보태어 말씀드리자면 과거 우리나라는 신진 디자이너가 성장하기 좋은 토양은 아니었어요. 척박했다는 표현이 더 맞죠.
너무 일찍 대기업이 패션을 비즈니스로만 생각하고 뛰어들어서 규모를 넓혔고, 그 속에서 디자이너 개개인이 살아남을 자리가 부족했죠. 참 힘들었어요. 자국민 소비도 부족했고, 그 사이 외국 명품이 대기업 유통을 통해 빗장을 열다 보니 한국 디자이너는 씨가 말랐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저는 운이 좋게도 생존했지만 그 세월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단,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한국 디자이너들이 강하게 성장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어요. 온실이 아닌 혼자만의 벌판에서 스스로 자립한 셈이죠.”
디자이너 우영미 하면 ‘독창적이다’, ‘성역이 없다’, ‘컨템퍼러리(동시대)하다’는 말들이 떠오릅니다. 대표님이 스스로 생각하는 디자이너 우영미는 어떤 사람인가요.
“어, 이건 정말 어려운 질문인데요(웃음). 글쎄요, 저는 어떤 사람일까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는 타고난 천재는 아니에요. 단, 저는 자기만족을 안 하는 사람입니다. 늘 자아비판적이죠. ‘난 이만했으면 최고야’라고 생각해본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패션을 오래했다고 반드시 잘하는 건 아니거든요. 대신 전 늘 열심히 노력해요. 누군가 그랬죠. ‘뭐든 오래, 많이 한 사람이 마스터가 된다’고요. 지금의 전 그런 유형의 사람에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긴 시간 꾸준히 노력했고, 이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최소한 저는 사람의 몸을 어떻게 하면 멋지게 꾸며줄지는 잘 아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해요. 보태어 말씀드리자면 나이가 좀 들어가면서 ‘나를 좀 벗어난다’는 느낌도 들고요.”
어떤 느낌이죠.
“패션디자이너에게 가장 큰 핸디캡은 결국 자기 자신이에요. 나의 테이스트(취향)와 몸의 한계를 사람은 쉽게 못 벗어나요. 가령 ‘나는 키가 굉장히 작은데, 이런 옷을 어떻게 소화해’, ‘저렇게 짧은 치마를 어떻게 입어’라는 식으로 자신의 나이, 육체, 캐릭터를 못 벗어나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규율로부터 점점 더 자유롭게 벗어나게 되더라고요. 일종의 아량도 생겼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복도 론칭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갖고 있는 테이스트와 소비자에 대한 아량과 온정이 생기면서 더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패션 업계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회상을 반영하는 (이를 테면 환경보호, 젠더리스 등등) 시도들이 정말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우영미 대표도 지향하는 패션계의 무브먼트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단지 마케팅만을 위한 무브먼트는 지양해요. 단,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전 현재 우리가 너무 과잉소비의 시대에 산다는 데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어디든 물건이 넘쳐나고 필요 이상의 생산과 소비, 소유가 이뤄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 뭐든 많이 갖기보다는 딱 나한테 맞고, 필요한 것만 소유하는 풍토가 왔으면 해요. 옷도 그래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남녀노소가 옷장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남자와 여자는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결국 같은 인간이죠. 옷도 공유할 수 있다고 봐요. 모자관계, 남매관계, 부부, 연인끼리도 충분히 함께 옷을 나눠 입을 수 있고, 그런 움직임들이 과잉소비 시대에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저 역시 어떠한 성역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옷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과 꿈이 있다면요.
“단기적으로는 저희 여성복 라인을 강화하고 싶어요. 동시에 올해부터는 홀 세일 계획도 있고, 주얼리 라인도 론칭할 계획입니다. 토털 패션하우스로서 외연을 갖추고 싶어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제 자식 같은 브랜드 ‘우영미’와 ‘솔리드 옴므’를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로 구축하고 싶어요. 그간 패션 업계에서 명품은 유럽만의 리그였어요. 저희가 그 자리를 오랜 히스토리와 탄탄한 브랜드 가치로 채울 수 있는 브랜드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