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와 일출을 만나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시작됐다. 평범했던 우리네 일상은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 낙조와 일출을 테마로 서해와 동해를 여행하며 간절한 바람을 띄워 보냈다.


1. 변산반도 곰소항 낙조여행
젓갈을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주말과 김장철에는 관광버스까지 줄을 잇던 곰소항이 차분해졌다.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때때로 여행지의 진면목은 사람을 걷어낸 후에 드러난다. 관광버스가 사라진 주차장에 개인 차량이 멈춰 섰고 여행자들은 젓갈이 아닌 곰소를 만나기 시작했다.




곰소의 떠오르는 핫 플레이스, 슬지제빵소
곰소항 부근을 지날 때마다 대기 줄이 길었던 멋진 건물의 정체는 2대째 찐빵을 만들어 판다는 ‘슬지제빵소’다. 아버지가 2000년 전북 부안 읍내에 처음 찐빵집을 열었고 가업을 이어받은 딸이 2017년 지금 자리에 제빵소를 다시 앉혔다. 슬지는 현 대표인 김슬지 대표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딸 사랑이 애틋하게 담겨 있다.

이곳의 찐빵은 뭔가 다르다. 이름부터가 크림치즈찐빵, 오색찐빵, 쑥쌀찐빵 등 퓨전색이 물씬하다. 게다가 찐빵집 건물이 고급 카페에 버금갈 만큼 화려하며 20~30대가 고객층의 주류를 이루는 것 또한 특별하다.

‘슬지네찐빵’이 사용하는 팥은 모두 국산으로 지역주민들이 조합을 만들어 생산한 것이다. 100% 국산밀, 천연 발효, 누룩의 베이스도 탄탄하다. 한 입 베어 물면 영락없는 찐빵이지만 씹을수록 팥앙금과 재료의 맛이 앙상블을 이뤄낸다. 결론은 찐빵이지만 찐빵이 아닌 비주얼과 맛, 그런 데도 쫄깃함은 다시 찐빵의 몫이다.

‘슬지네찐빵’은 곰소를 이끌어 가는 어엿한 핫 플레이스다. 흑당과 발효 소금을 섞어 만든 아이스라테의 이름도 ’곰소흑당 소금커피‘다.

갯벌의 붉은 감성, 낙조 스폿 곰소항 방파제
채석강에서 곰소항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 변에는 꽤 알려진 낙조 스폿들이 많다. 실버샌드드라이브경관쉼터, 변산자연휴양림, 왕포항 등이 그것이다. 상계재에 국비 36억이 들어간 ‘노을경관쉼터’가 막바지 공사 중이다. 그런데도 사진 애호가들은 곰소항 방파제를 최고의 낙조 촬영지로 꼽는다.

‘슬지네제빵소’ 곰소항까지는 차로 5분 거리, 부지런히 달렸지만 이미 태양은 수평선 너머로 반쯤 모습을 지운 후였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사람들을 비집고 겨우 몇 컷을 담아냈다.

“곰소항이 출사지로 좋은 것은 갯벌 때문이에요. 갯벌이 좋으니 사물들이 살아나고 결국 단조롭지 않은 노을을 만나게 되는 거죠.” 누군가의 한마디는 모여든 사람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받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갯벌에서 시작된 붉은 감성은 바다, 배, 등대, 섬을 지나 하늘 위 구름까지 이어졌으며 그 여운은 태양이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방파제 뒤편의 작은 동산에는 ‘나룻산’이란 이름을 가진 공원이 조성돼 있다. 배 모형을 한 전망대가 있어 또 다른 각도로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밥이 모자라는 젓갈백반
배가 고파졌다. 최근 백종원과 허영만이 각자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젓갈백반을 전문으로 하는 이곳의 몇몇 식당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특히 어린 갈치를 조림 요리로 만들어 각종 젓갈과 함께 내놓은 풀치백반 또한 곰소항의 인기 메뉴다.

일단 TV 맛집을 제외하고, 방문자 평가가 좋은 젓갈백반 전문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리뷰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에 낙점한 곳은 ‘곰소등대길식당’이다. 젓갈백반 1인 가격은 1만5000원, 얼마 후 정갈한 접시에 담긴 12가지 젓갈과 풀치조림, 그리고 바지락탕이 상 위에 올랐다. “명란젓, 창란젓, 낙지젓, 가리비젓, 꼴뚜기젓, 오징어젓, 어리굴젓, 밴댕이젓, 청어알젓, 황석어젓, 갈치속젓, 아가미젓” 하나하나 설명을 들었지만 몇 번이고 되묻고 나서야 구분이 됐다. 재래 김에 밥과 젓갈을 올려 싸 먹은 뒤 바지락탕 국물을 한 수저 먹어줘야 제 맛이란다.

다른 식당의 젓갈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맛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비싸다는 어리굴젓과 청어알젓을 몇 번이고 리필해줬기 때문이다. 밥을 두 공기나 먹었는데도 접시에는 젓갈이 남았다. 젓갈의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 제육볶음이나 생선구이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문득 꼬막탕, 꼬막불고기, 꼬막샐러드 등 온통 꼬막투성이었던 벌교의 꼬막정식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밥을 먹고 나오니 대부분 상가에 불이 꺼졌다. 젓갈을 몇 통 사려던 계획엔 차질이 생겼지만
카메라엔 멋진 낙조 컷을 넣어 배는 그득해졌으니 특별히 아쉬울 건 없다.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지엔 곰소 노을의 여운처럼 한 끼의 감동을 이어갈 정도의 남은 젓갈이 담겨 있었다.



BOX
곰소항 젓갈 맛의 비결은 소금
곰소만은 변산반도와 고창군 사이의 크게 만입 된 바다를 말한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갯벌’ 중 하나인 고창 갯벌이 바로 곰소만에 속해 있다. 곰소항은 소래포구, 강경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젓갈 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곰소 젓갈이 유명해진 데는 소금이 역할을 크게 했다.

곰소는 청정갯벌에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소금 산지로의 입지가 탁월하다. 그러다 보니 이미 조선 시대부터 포구로 들어오는 해산물을 소금에 절여 김치에 쓰고 반찬으로 먹었다. 당시의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 만든 화염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말 조성된 제방과 간척지에 염전이 생겨나면서 천일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곰소 천일염은 송화가루가 날리는 여름에 주로 생산되는데 간수가 충분히 빠져 짜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2. 추암에서 삼척까지 일출여행
일출로 유명한 추암해변은 동해시 북평동에 있다. 하지만 삼척시의 영역까지는 불과 200m. 따라서 추암에서 시작한 여행엔 늘 삼척의 스폿들이 동반된다. 일출의 의미는 희망이다. 새해 첫날의 설렘과 결연함 대신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이제 동해 일출의 상징은 추암 능파대
추암해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니 삼각대를 메고 촛대바위로 올라가는 무리들이 보였다. 일출을 촬영하기 위해 찾아온 일명 진사들이다. 별안간 마음이 총총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일출 시각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새로 지은 능파대 앞 전망 좋은 자리는 먼저 온 사람들이 선점하고 있었다.

능파(凌波)란 물결을 건너듯 미인의 걸음걸이가 가볍고 우아함을 뜻하는 말이다. 조선시대 도제찰사로 추암(당시의 지명은 용추)을 찾았던 한명회가 절경의 지형을 보고 ‘능파대’라 불렀다. 2021년 동해시가 촛대바위가 보이는 동산의 봉우리에 같은 이름의 정자 건립을 완료하고 현판식을 했다. 일출의 방향은 촛대바위와는 거리가 있는 듯했다.

대신 갈매기 한 마리가 꼭대기에 서서 셔터 세례를 즐기고 있었다. 이윽고 태양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 있는 일이지만 또 다른 시작은 늘 경이롭고 크든 작든 의미가 있다. 개인적인 바람보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여행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했다.

유난히 눈부신 아침이 열렸다. 추암해변은 작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해변 바로 뒤로는 오토캠핑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해안 유일의 해상 출렁다리와 추암 해안의 비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250m 길이의 산책로도 조성해 놓았다.




"삼척번개시장에서 기 받아 가세요!"
동해시 추암에서 삼척역 건너편의 ‘삼척번개시장’까지는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삼척번개시장는 매일 새벽 5시에 열려 10시면 시들해지는 특화 시장이다. 시장의 기원은 무려 9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삼척항으로 들어온 수산물들을 거래하기 위해 자연스레 생겨났다.

겨울이 되면서 시장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생선은 바로 곰치다. 곰치는 덩치가 크고 거무스름한 것이 수컷, 비교적 작고 붉은색을 띠는 것이 암컷이다. 수컷은 주로 곰치국에 사용하고 암컷은 말려 먹는다.

올해는 곰치가 많이 잡혀 가격이 싼 편인데 수컷은 1마리 2만 원, 암컷은 2마리 1만 원이다. 평일임에도 번개시장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활어 가격은 조금 더 내려갔다. 한 팩에 1만 원 하던 가자미회가 2만 원에 3팩이 됐다. 열혈 시장 상인들의 기를 받으니 힘이 솟았지만, 대신 허기가 찾아 왔다. 곰치국이 더욱 간절해졌다.



술을 안 마셔도 해장 되는 곰치국
삼척항의 곰치국 맛집으로는 ‘만남의 식당’과 ‘바다횟집’이 팽팽하다. 물론 매스컴을 타면서 유명세가 확장된 면도 있지만, 두 식당 모두 지역민들이 애호하는 로컬 맛집으로 탄탄한 기반을 다져 왔다.

단, 곰치국과 생태, 대구해장국의 세 메뉴에 주력하는 ‘만남의 식당’이 전문성 면에서 앞서 있다. 삼척항의 곰치국 베이스는 김칫국이다. 김치와 곰치의 단순한 조합이 칼칼하고 개운한 맛을 낸다. 오래전 곰치는 잡자마자 바다에 버리면 텀벙하고 소리가 난다고 해서 ‘물텀벙이’라 불렀다. 맛과 식감도 별로였지만, 특히 비늘 없는 모습이 비호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물텀벙이, 아니 곰치가 이제는 동해안의 명물 해장음식으로 통한다. 조업에 바쁜 어부가 김치와 함께 끓여 밥과 함께 훌훌 마시고 나간 것이 일반인들에게 별미로 여겨지면서부터다. 곰치의 표준어는 꼼치다. 남해안에서는 꼼치를 물메기라 부른다. 꼼치보다 몸집이 큰 미거지는 물곰이라 부르는데, 간혹 동해안의 식당에서 곰치국과 구별해서 판다.

‘만남의 식당’이 문을 닫는 날이라 ‘바다횟집’에서 곰치국을 먹었다. 전날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속이 시원하게 풀리며 해장이 되는 느낌이다.




BOX/
BTS <버터> 앨범재킷 촬영지 맹방해변
삼척항에서 7km 거리에 있는 맹방해변은 요즘 동해에서 가장 핫한 곳이다. 방탄소년단(BTS)의 <버터(Butter)> 앨범재킷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BTS 성지’, ‘BTS 맹방’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맹방해변에는 총 연장 4.5km의 긴 백사장이 놓여 있다. 입구의 덕봉산에는 해안생태탐방로가, 뒤편 해송숲에는 ‘산림욕장’이 조성돼 있어 산책을 즐기기도 좋다. 캠핑장과 리조트, 민박촌을 베이스로 삼척여행의 만족도를 한껏 높일 수 있는 곳이 바로 맹방해변이다.


글 김민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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