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박사의 바로 이 작가 - 박성옥
거울은 스스로 웃지 않는다. 마주선 또 다른 나에게서 나를 본다. 비록 온전한 내가 아닌 반대편 그림자지만, 그 속에서 잊혔던 나의 심상(心象)을 다시 만난다. 박성옥의 그림에선 이런 거울효과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부드럽고 섬세한 연필 드로잉 작업이다. 마치 쉼 없이 자아성찰의 번민을 씻어내듯 수만 번의 선긋기 수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점(點)과 같은 찰나의 순간이 이어져 시간의 선(線)이 되고, 겹겹이 쌓인 시간의 선들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세월의 면(面)이 된다. 박성옥 작가는 연필 그림으로 ‘감각의 시간’을 스케치해 가고 있다.“왜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어떤 불가피한 이유나 거대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반복했던 일들이 그림으로 남은 것 같아요. 참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참선은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한 수행이죠. 참선은 여러 형태로도 가능합니다. 얇은 선으로 종이를 빼곡하게 채워 가는 일이 저에게는 참선과 같죠. 사각사각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그리다 보면, 마음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꺼내지는 느낌입니다. 고민했던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제가 진짜 무엇을 원했던 건지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요. 어쩌면 내면의 감정 모두를 쏟아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반복적인 노동은 생각을 단순하게 진정시킨다. 그 집중력이야말로 나를 들여다보는 창과 같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듯, 마음만 고요하게 진정된다면 극단의 섬세한 감각도 되살아난다. 박성옥 작가의 선긋기도 ‘청정의 나’를 찾는 여정이다. 사각~, 사각~, 사각~ 무한반복의 선긋기 노동. 자청한 그 고통의 뒤에 따라오는 개운함을 즐긴다. 그 느림의 미학에서 자신만의 직관력으로 얻어내는 통찰력을 담아낸 그림이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일관된 삶을 이어간다. 거의 365일 작업에만 몰두해야 가능한 작품들이기에 화면 위에 ‘시간의 탑’처럼 쌓인 흑연의 밀도감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커다란 눈동자의 단발머리 소녀가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성인이 채 되기 직전의 미소녀 누드상이다. 그렇다고 관능적이거나 섹슈얼리티(sexuality)한 인상을 자아내진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 그렇게 물들지는 않을까 은근히 소녀를 염려하게 되는 긴장감이 감돈다. 성인이면 누구나 내면에 그런 소녀(소년)의 순수함을 간직했다고 믿는다. 박 작가의 ‘소녀’ 연작이 지극히 사랑스럽고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림에서 소녀 주변엔 늘 다양한 소재들이 함께 등장한다. 그녀만의 은밀한 연민의 대상일 수도 있고, 소녀의 감정을 대신하는 순수한 욕망의 상징일 수도 있다. 또한 그림 속 소녀들은 작가 자신이 투영된 ‘내면의 자아’일 수도 있다.
왜 연필 그림일까. 특히 검은색 연필을 고집할까. “까만색이 모든 색을 담고 있다는 것이 좋고, 너무 깊어 알 수 없음을 뜻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요.” 박 작가는 ‘검을 현(玄)’에 매료됐음을 고백한다. 흑(黑)이 평면이라면, 현(玄)은 공간이다. 흑이 대지(大地)에 비유된다면, 현은 우주(宇宙)인 셈이다. 비록 겉보기에 단순한 검은색의 연필 그림처럼 보이더라도, 그 안엔 작가의 엄청난 공력이 스민 ‘검은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박 작가는 그림 그리기와 삶을 같은 연장선에 놓고 있다. 놀이와 수행을 동시에 펼치며, 자신만의 재미와 행복을 찾는 것이다.
“그림 그릴 때 생각을 담는다기보다, 그리는 목적이 오히려 제 생각을 비워내고 무(無)를 향해서 가는 느낌입니다. 왜 애를 써서 무를 향해 가는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확실한 건 그림을 그릴 때는 잡생각이 없어지고 개운해진답니다. 이미지에 실리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한 것 같아요. 옛날에 삐삐밴드라는 그룹의 ‘딸기가 좋아’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시종일관 ‘딸기가 좋다’고 외치는 노래였어요. 한 기자가 ‘노래의 의미가 뭐냐’고 물으니, 노래를 만든 멤버가 ‘그냥 딸기가 좋아서 만든 노래’라고 답하더군요. 그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창작물에 남다른 의미를 담아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냥 좋아서 그렸다”는 작가적 감성이 더 존중돼야 한다. 그 안에 진심이 담겼기 때문이다. 좋다는 감정에는 선행조건이나 계산이 작용하지 않는다. 그 감정엔 작가의 가장 진솔하고 신성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박 작가는 그림에 등장하는 형상들이 지닌 의미의 해석을 ‘보는 이들의 몫’으로 열어둔다. 초기엔 소녀의 얼굴을 중심으로 그렸다면, 점차 몸 전체로 확장되고, 이런저런 소품들이 등장하며, 최근엔 고양이가 비중 있게 합류했다. 특히 검은 고양이의 신묘한 느낌에선 연필 그림이 지닌 ‘현의 미학’이 겹쳐 더욱 남다른 인상을 자아낸다.
박 작가가 유독 검은색의 농도 조절에 특별한 감각을 보여주는 이유는 따로 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덕분이다. 재학시절 흑백사진을 찍으면서 ‘존 시스템(Zone System)’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지금까지 옮아온 것이다. 존 시스템은 ‘사진의 어떤 영역에서 밝고 어두움을 계측할 수 있게 조율하는 기준’과도 같다. 이로 인해 특정한 농도를 가진 톤을 10단계로 나눔으로써, ‘사전 시각화(previsualization)’가 가능한 것이다. 마치 본 그대로 예측한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듯, 박성옥 역시 미리 인지해둔 구성을 완성도와 밀도감 높게 작품에 투영시켜낸다.
가령 작품 <밀당(push and pull)>의 경우 박성옥 그림의 흥미로운 요소들을 한꺼번에 잘 보여주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 아이스크림 묻힌 딸기를 머리 위로 높게 쳐든 단발머리 소녀가 초콜릿 얹은 케이크에 올라서 있다. 거대한 크기의 뱀이 소녀의 온몸을 칭칭 휘감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긴 혀를 날름거린다. 발밑에 선 검은고양이는 이러한 상황은 아랑곳없이 케이크 위의 딸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그 아래 뒹구는 딸기와 케이크엔 애벌레와 달팽이가 단맛에 취해 있다. 그 무리들 너머엔 언제 녹아내릴지 모를 색동 코의 눈사람이 초연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한 모습이다.
얼핏 보면 인간 욕망의 사슬이 시작된 에덴동산의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모든 번뇌와 망상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팔정도 진리를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박 작가는 딸기를 진짜 좋아해서 그냥 그리는 것이고, 부드럽고 달달한 크림의 경우도 흘러내리듯 감싸주는 느낌이 좋아서 그리는 것이며, 뱀은 귀엽고 편안하게만 느껴지는 그림에서 뭔가 불편함과 긴장감을 주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연유야 어찌됐건 어떻게 이러한 유기적인 장면과 감성을 단지 연필 재료만으로 표현이 가능했을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아무리 단순한 재료라도 기술적인 한계점을 넘어서면 내재된 참 의미까지 발현할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결국 박 작가의 연필 선 긋기는 ‘마음의 그림자를 밖으로 꺼내는 과정’이다. 마음을 비우고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의 연필 그림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것일지라도 얼마든지 ‘숨은 빛을 발현시킬 수 있음’을 증명해준다. 박성옥 연필 그림의 전시가격은 10호(53×45.5cm) 크기가 대략 200만 원 내외다.
박성옥 작가는…
1981년생. 경성대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주로 호기심 많은 미소녀를 주인공과 검은 고양이가 어우러진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연필로 그려 큰 인기를 얻고 있다. 2021 호냥이(부산 비온후책방 전시공간 보다), 2021 무해한 친구들(서울 자인제노갤러리), 2020 미묘하여(부산 비온후책방 전시공간 보다), 2019 33GIRLS(서울 자인제노갤러리), 2017 소녀생활백서(서울 자인제노갤러리) 등 5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참여한 그룹전 및 아트페어로는 2021 아트콜렉션(더현대서울)·제로베이스(서울옥션 강남센터), 2020 원아트 타이페이(대만 셔우드), 2019 아트심천(중국 심천컨벤션센터)·아트부산(부산 벡스코)·어포더블아트페어(홍콩)·아시아컨템퍼러리 아트쇼(홍콩 콘래드호텔), 2018 어포더블아트페어(홍콩), 2017 아트 포르모사(대만)·행복한 그림전10-100(부산 맥화랑), 2016 어포더블아트페어(서울 DDP)·아트 코스모폴리탄(제주 신라스테이), 2015 환상 동화전(부산 신세계갤러리) 등이 있다.
글·사진 김윤섭 아이프 아트매니지먼트 대표(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