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영 작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 기적이라 불리는 인생들이 있다. 10여 년 전,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겪었던 안은영(56) 작가도 그랬다.하지만 그가 보여준 진짜 기적은 그 이후였다. 삶이 비극으로만 치닫던 순간, 안 작가는 돌연 연극에 뛰어들었다. 그것을 계기로 이제는 연극 연출은 물론, 작가, 강연자, 각종 단체의 대표 등등 그야말로 울트라 중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이 사람 참 오묘하다. 숨길 수 없는 예술가 기질이 있는 건지 대단히 예민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기다려주기,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람이다. 특히, 누군가의 눈이 밝아지고 삶이 달라지는 순간, 황홀해 한다. 바로 안은영 작가다.
그는 10여 년 전의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으며 난생처음 신변비관으로 죽음까지도 생각했다고. 하지만 안 작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활 중에 첫 책 <참 쉬운 시 1-무명본색>을 펴냈고, 우연히 발견한 연극 교실을 계기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무모하게 도전하고 꿈을 현실화하는 재주 덕분인지, 현재 치유적 글쓰기 강사, 표현력업(UP)훈련 강사, 연극연출가, 극작가, 초단편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2020년엔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자로 출연했다.
이 모든 것의 단초는 연극이었다. 특히, 안 작가가 이끄는 연극단 ‘B2S’의 단원들은 대개 그와 같은 중년들이다. 이들은 중년이 돼서야 오롯이 자신을 위한 선택, 연극에 뛰어들었다. 선택은 쉽지 않았지만 결과는 멋졌다. 뒤늦게 이름 세 글자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연극을 통해 찾은 ‘삶’을 책 <우리는 중년의 삶이 재밌습니다>에 담아냈다. 그 중심에 안 작가가 있다. 한때는 삶을 포기할까 고민했던 그가 도전하고, 성취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울트라 중년으로 거듭난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선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제 이름 석 자를 쳤을 때 ‘보건교사 안은영’ 말고 ‘바람 안은영’이 먼저 뜰 날을 기다리는, ‘N장르 표현러’입니다. 무모하게 꿈꾸고 과감하게 도전해 온 덕분에 나이 50에 연극에 뛰어들었고 인생 2막에 만난 벗들의 손을 잡고서, 극단 B2S의 연극연출가이자 극본가, 표현하는 인생연구소협동조합 대표, 2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 치유적 글쓰기 강사, 표현력업훈련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얻은 지체장애, 갱년기 장애, 경제적 어려움이 수시로 태클을 걸어오지만 넘어질 틈을 주지 않고 잘 넘어가는 중입니다. 어떤 장르가 됐든 나의 표현 활동은 #여성 #사회적 약자 #변화와 성장 #상호존중 #재밌게 늙어가기를 키워드로 삼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년세대를 ‘표현하는 인생’으로 유혹하고 안내하는 데 쓰임 받길 바라면서요.”
연극을 시작한 구체적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0년 늦가을. 저는 14년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고국의 품으로 막 돌아왔습니다. 미국 달라스에서 1년 7개월 정도 살았고, 1999년부턴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지냈죠. 멕시코에서는 교포들이 다니는 교회의 전도사로 일했습니다. 2009년 가을, 저는 베라크루즈라는 지역으로 선교사역을 가는 길에서 승합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간 큰 사고였습니다. 얼굴 아래로 몸의 왼쪽 대부분이 많이 상했습니다. 갈비뼈 다섯 곳, 가슴뼈, 무릎 뼈가 부러졌고, 비장이 파열됐고 폐를 다쳤습니다. 척추 관련 수술을 두 차례 받고서 장애가 왔죠. 감사하게도, ‘최소한 하반신 마비’라고 한 의사들 판단과 다르게 마비증세는 오지 않았습니다. 1년 동안 강도 높은 재활시간을 거친 후 남편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몸은 엉망이었지만 설마 내가 할 일이 없겠냐는 자신감이 컸지요. 그런데 현실은 너무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나요.
“중년의 삶에 대한 준비나 계획 없이, 느닷없이 중년이 돼 버린 것이죠.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공적 경력도 단절됐고요. 목회자가 재산 따윌 가지면 안 된다고 여기며 살았더니 진짜 빈털터리 신세였습니다. 무엇보다 척추를 다쳐서 하반신이 온종일 저리고 아파서 고통스러웠어요. 그런데 갑상선암까지 찾아와서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남편이 실직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부모가 사시는 아파트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결국 전 신변비관에 빠져들었습니다. 사람 만나기도 싫었고요. 난생처음 자신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자신감을 잃고,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서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사람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음을요. 다행히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지만, 여전히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2017년 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내 상태에서 가능한 돈벌이가 있을까?’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번쩍! ‘서울시50플러스재단 중부캠퍼스’ 창이 떴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봄 학기. 연극 교실’이란 홍보문이 보였지요. 진짜로 가슴이 쿵쿵 뛰더군요. 말도 안 되는 설렘이죠. 당장에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연극이라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순간,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무슨 장면이죠.
“열 살의 은영이가 시장통 아이들을 모아서 ‘의좋은 형제’ 콩트를 연습시키던 장면이었습니다. 이어서 파노라마가 펼쳐졌어요. 자라나면서 인생길 어디서든, 내가 몸담은 곳에 필요하다면 연극이나 공연물을 기획하고, 대본을 쓰고, 연출하며 행복했던 순간들이요. ‘그래, 난 그거 할 때 행복하지! 사람들하고 그거 한번만 해보고 싶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거 한 번만 해보고 죽자, Not today!’ 그 길로 연극교실 수강 신청을 했습니다. 한 학기 과정이 3만 얼마밖에 안 하니 부담도 전혀 없었지요. 그렇게 2017년 3월 초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간 연극교실. 거기에서 인생 2막을 함께 살아가고픈 인생의 벗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지금까지 말이죠. 그런데 그곳이 개미지옥이 될 줄 몰랐던 거죠. 하하하.”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연극의 참 매력은 무엇인가요.
“제게 연극은 사람냄새 진동하는 예술이라 매력적입니다. 긴 연습 과정 중에 서로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중간 필터 없이 사람 대 사람이 부딪혀서 만들어내는 예술이니까요. 한 사람의 애티튜드와 습성들이 서로를 괴롭히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지요. 물론 그런 매력이 때론 연극의 단점, 불편함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두 번째 매력은, 편집 없는 날것, 라이브가 주는 긴장감이랄까요. 관객을 앞에 둔 공연은 러닝타임 내내 생방송인 셈입니다. 연출가도 개입할 수 없죠. 오직 무대 위 배우들이 매순간 조화를 맞춰 가는 그 현장감이 기막히게 좋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연극 연출가만이 맛볼 수 있는 짜릿함도 매력이죠. 연습하다 보면, 참여자 내면의 상처, 욕망, 한, 재능, 꿈들이 툭툭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또 배우가 개인 아무개가 아닌 극 속의 캐릭터로만 변모할 때가 있습니다. 그걸 목격하는 순간, 무척 짜릿합니다.”
연극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들이 필요한가요.
“우선 연극에 뛰어드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정하기예요. 연극 자체가 목적인지, 공연 무대에서 조명 받는 게 목적인지, 좋은 사람들과의 활동이 목적인지, 시니어 전문배우로 살아갈 목적인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목적에 따라 출발지가 달라져야 하니까요. 두 번째는 체력입니다. 장기간 계속되는 연습들, 그리고 리허설과 본 공연을 견딜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는 좋은 애티튜드(태도)죠. 중장년층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나쁜 애티튜드들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경력, 지위, 나이, 성별, 신념, 기득권, 오래된 습관 등을 내세우면 곤란합니다. 그 외에도 연습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가족들의 이해와 응원 등도 준비하면 좋겠죠. 하지만 너무 준비에 골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일단, 도전하고 싶다면 해보는 거죠.”
배우보다 대본 집필과 연출에 더 관심을 두게 되신 이유가 있다면요.
“우리 배우들에겐 ‘이 얼굴로 무슨 배우를 합니까? 허리 아파서 오래 서 있기도 어렵고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합니다만, 실은 기질적으로 저는 배우보단 연출이 맞습니다. 직접 작품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죠. 집단 전체를 이끌고 지휘해야 신명이 나고요. 처음에 연극교실에 수강 신청을 할 때도 배우를 할 거란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순수문학으로서의 ‘희곡’ 작가는 아닙니다. 저는 철저히 공연을 생각해서 대본을 쓰니까요. 세상엔 훌륭한 희곡들이 많지만, 저는 우선은 나의 이야기, 우리 시대 중년층의 진짜 사는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싶답니다. 그래서 직접 대본을 쓰고요.”
연극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죠. 작가님이 협업을 하시면서 어려웠던 점, 혹은 보람됐던 일이 있었다면요.
“연극 특성상, 연출가의 역량이나 역할이 막강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연출가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죠! 저 역시, 배우들과 늘 ‘함께’ 해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진 않더라고요. 앞서 밝혔듯이, 저는 배우들과 같은 선상, 즉 연극교실 수강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땐 강사가 따로 있어서 그분이 연출가였죠. 연극커뮤니티 대표로 활동할 때도 저는 조연출 역할만 했고요. 그러다가 2018년 초에 ‘50+공연집단 달콤2막’을 창단하면서 제가 대본집필과 연출가로 나섰습니다.
단원들이 저를 갑자기 연출가로 만나야 했던 것입니다. 적응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저 역시, 배우들 한 명 한 명의 속사정, 욕망, 어려움 등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보니, 연출가가 아닌 ‘안 반장’으로서 배우들을 챙기게 됐고요. 무엇보다, 제가 연극을 전공한 사람도, 전문 연출가도 아니지요. ‘차라리 연출 비용을 지불하고 외부에서 전문연출가를 섭외하라고 할까?’ 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한 적도 있었네요.(웃음)
하지만 보람이 워낙 크니까 잘 버텨낼 수 있습니다. 특히, 배우들의 발전과 성장이 제겐 큰 선물입니다. 다른 극단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B2S 단원들은 저마다의 진한 고통과 어려움을 안고 연극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현재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분이 두 분인데, 노인데이케어센터에서 또 치매노인 자택상주자로 일하면서도 연극 무대를 포기하지 않고 있지요. 그분들이 시간이 가면서 배우로서의 역량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 나게 좋습니다.
또 단원 중에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오래 겪은 분도 있고, 대학을 못 간 콤플렉스를 가진 분도, 몸의 반쪽이 마비돼서 중증장애를 앓는 분 등등 다양해요. 그런데 연극하면서, 우울증 약이 줄어들고, 늦깎이 신입 대학생이 되고, 몸이 아파도 어떻게든 연습장을 찾아옵니다. 수개월의 연습을 버텨내더니, 어느새 제가 그려온 극 속 캐릭터로 우뚝 섭니다. 본 공연의 긴장감을 이기고 커튼콜을 받고요. 그 모든 순간들이 제겐 엄청난 보람이죠.”
연극을 여전히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가님이 관극 입문자들에게 추천하는 연극 작품들이 있다면요.
“관극 입문자에게 추천한다면 아무래도 재미있고, 볼거리 풍성하고, 극 전개가 빠르게 진행되는 공연으로 강추합니다. 예를 들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에쿠우스>, <라이어>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어떤 연극이든 다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중년층 입문자라면 너무 클래식한 정극이나 작가의식이 너무 강해서 난해한 극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러닝타임은 긴데 객석 의자는 불편한 경우도 피하시길요.”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취미 혹은 제2의, 제3의 인생을 준비하는 4050세대 중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연극 세계에서도 안 작가님 같은 사례가 많지요.
“요즘, 중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연극집단이나 프로그램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전문연극인 출신 중에서든 혹은 정부 출연기관이든 중년층을 대상으로 연극 관련 프로그램들을 열고 있습니다. 그만큼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 중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겠죠. 제가 ‘세바시’에 출연한 후에 따로 연락을 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또 공저 책 출간 이후로 저자 강연 등을 하다 보면 저와 함께 연극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문의도 오고요. 다만, 늦깎이 중년 연극인들이 설 무대가 지속성을 갖긴 어려워 보입니다.
강좌 형태의 프로그램이 많다 보니, 일회성 졸업발표회가 되기 쉽습니다. 기성 극단에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고요. 그래서 보다 주체적이고 자립적 운영이 가능한 중년극단이 출연할 때라 봅니다. 재정 기반을 갖추고, 극단 내에 공연물 제작이 있는 극단이죠. 그래서 단원들이 지속적으로 배우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로, 제가 하고픈 일이지요.”
비단,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닌데, 시작 앞에서 두려워하는 중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나이 들어서 연극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본 암기부터가 걸림돌이죠. 뇌가 연극과는 멀리 살았는데 갑자기 기성 배우처럼?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장에 대배우가 될 꿈만 꾸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인생 1막을 지나 하고픈 것 하면서 살았다면 모르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지요. 그래서 인생 2막엔 주저하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음을 압니다. 일단은 해보는 거죠. 판단은 그 후에 하고요.”
요즘은 어떤 도전들을 또 계획 중이신가요.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년간 미뤘던 ‘출간 다작러’의 꿈을 현실화하기로 했습니다. 2015년에 첫 책 <참 쉬운 시 1-무명본색>을 세상에 내고는 너무 잠잠했거든요. 그래서 <참 쉬운 시 2-시절방백>을 집필 중입니다. 또한 영화를 통해 슬기로운 중년생활의 길을 찾는 에세이도 집필 중이고, 예전에 써둔 자전적 성장소설 <낭만10세(가제)> 초고를 다듬어서 탈고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강의하는 ‘표현력훈련’의 교재가 될 만한 에세이도 준비 중이고요. 극단 관련해서는 무모한 도전을 2개 계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구적 예술가이자 좌절된 페미니스트 나혜석을 모티브로 한 프로젝트 공연입니다. 출연진 2, 3인 소규모 공연이되, 낮시간에 연습 가능한 배우들로만 모아서, 주 3회 이상 연습해서 티켓 팔고 무대에 올리는 공연물을 만들고 싶어서요. 또 하나는 지난해 11월에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공연한 입체낭독극 <강 여사의 선택 2021>을 각색해 낭독극 말고 일반 극으로 무대에 올리는 거죠.”
인생에서 가장 큰 난관에 부딪쳤을 때 다시 도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나 자신을 놓지 않는 것, 나를 향한 사랑이랄까요? 그게 가장 큰 힘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거죠. 내가 꾸었던 꿈들, 만난 사람들, 해낸 일들이 다 가치 있고 귀한 것임을 나 스스로 인정하면, 내 안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더라고요. 무엇보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가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나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믿음이죠.”
어떤 한 분야에 진심으로 빠지고, 공부하다 보면 그 관심이 관련 기타 분야로 확산되기도 하죠. 안 작가님의 경우는 어떤가요.
“제 경우엔 오히려 거꾸로 갑니다. 확산이 아닌 구체화랄까요? 너무 많은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너무 뜨거운 열정으로 주체가 안 될 지경이었거든요. 연극에 빠져들면서 제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프고 장애를 얻으면서는 빨리 포기해야 할 것들이 보이고요. 춤, 그림, 영화, 행사기획 등까지 뻗쳐 있던 관심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내가 현재 발을 내디딘 영역들을 구체적으로 더 공부해 들어가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연극이란 000이다. 뭘까요.
“저에게 연극이란 ‘가시 덮힌 보물 상자’라고 말하고 싶어요. 나이 오십에 죽음(?)을 유보한 채, ‘이거다!’ 하고 발견했으니 얼마나 소중하고 좋을까요. ‘심봤다!’입니다. 인생 2막을 멋지게 살 수 있는 보물들이 가득한 보물 상자 같아요. 문제는 날카롭고 방향도 제각각인 가시들이 뒤덮여 있단 것이죠. 그래서 보물 하나 꺼내려면 가시에 찔리면서, 또 온갖 정성을 들여서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야 하네요. 그래도 보물 상자를 포기하긴 싫어서 지금도 가시들과 싸우는 중입니다.”
글 김수정 기자 ㅣ 사진 안은영 제공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