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980년대 이후 지금의 연동, 노형동을 앞세운 신제주가 생겨나기까지 제주시의 중심은 관덕정, 칠성로, 탑동, 산지천, 동문시장 일대였다. 현재는 원도심으로 불리는 이곳, 그 시절의 추억과 아련한 고집을 돌아보며 제주다움에 취해보기로 했다.
필자의 고향은 제주도다. 취학 전 부모님을 따라 육지로 나갔으니 엄밀히 얘기하면 무늬만 고향인 셈이다. 어렴풋한 어린 날의 기억, 식생활 곳곳에 남아 있는 집안 풍습, 그리고 여행에서 경험했던 얇디얇은 제주에 대한 지식이 고작이다.
그래서 제주 베지근연구소의 김진경 소장에게 동행을 간청했다. 베지근연구소는 제주 음식의 가치와 문화를 전승해 제주 원도심 음식 여행, 재래시장 투어, 쿠킹 클래스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이다. 한편 ‘베지근’이란 말은 ‘기름지고 영양가 있다’라는 제주 방언이다.
동문시장의 봄
제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상설시장으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생겨난 제주동문상설시장이 그 시초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5년 ‘주식회사동문시장’ 건물이 준공됨과 때를 같이 한다. 동문시장은 주식회사동문시장, 동문재래시장, 수산시장, 골목시장, 공설시장, 야시장, 새벽시장 등 총 7개의 시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12개 게이트를 통해 출입할 수 있다.
동문시장이 원도심에 형성된 까닭은 첫째, 제주항 인근이며, 과거 동일주도로와 서일주도로의 종착 터미널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나 잔치 때 쓸 가장 신선한 생선을 사기 위해 성산이나 한림에서 버스를 타고 찾아온 곳이 바로 동문시장이다.
4월은 옥돔이 끝물이다. 수산시장 매대에는 당일바리(당일 조업해서 잡아 올린 생선) 옥돔이 분홍빛의 미끈한 자태를 자랑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생물 옥돔의 주 고객은 십중팔구 도민이다. 제주에서는 옥돔을 그냥 생선이라 부른다. 마리당 3만~4만 원이나 하지만 잘 말렸다가 제숙으로 쓰기 위해 지갑을 연다.
그러고 보니 1만2000원짜리 옥돔 백반이 수상하다. 식당에서 백반으로 상에 오르는 옥돔의 정체는 대부분 옥두어라 불리는 유사 어종이다. 맛과 모양이 흡사하지만, 옥돔에 비해 색이 비교적 희고 꼬리지느러미에 줄무늬가 없다.
자리돔이 등장했다. 자리돔은 여름 생선으로 알고 있지만 청보리가 익는 요맘때 가장 맛있단다. 서귀포 보목항과 모슬포항에서 많이 잡힌다. 일반적으로 보목항의 자리는 부드러워 물회에, 모슬포항의 자리는 크고 뼈가 억세서 구이나 젓갈용으로 쓴다. 비늘을 벗기고 내장을 떼어낸 자리를 깨끗이 씻어 적당한 크기로 썰어낸다. 그리고 자리와 갖은 채소에 된장을 넣어 버무리고 식초를 풀면 오리지널 물회가 완성된다. 요즘은 육지 관광객의 입맛에 맞춰 고추장과 설탕을 섞어 빨갛게 내는 식당이 많다.
새벽에 낚아 올렸다는 엄청난 크기의 은갈치와 일미 8만 원의 자연산 전복에 입맛을 다시다 떡집 앞에 섰다. 밀가루로 만든 상외떡, 동그란 제주 송편, 기름떡 등과 더불어 조리된 나물과 잡곡밥, 고기 산적 등 제사음식은 생선류만 빼고 다 있다. 제과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단팥빵과 큼직한 카스테라도 눈에 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풍습이다. 일본을 왕래하던 제주민들이 단 빵들을 들여와 제사상에 올리고 나눠 먹은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옷 가게의 전면에 나선 것은 고사리 앞치마다. 4월 중순부터 5월까지 본격적인 고사리 철이 시작된다. 앞치마는 아랫단에 지퍼가 달렸다. 고사리를 캘 때마다 주머니에 담고 불룩해지면 지퍼를 열어 쏟아 붓기 위한 기능이다. 김진경 소장은 얼마 후 긴 비가 내릴 거로 예측했다. 일명 고사리장마라 한단다. 질펀한 봄비가 내린 후 고사리가 우후죽순 자라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 고사리는 맛이 좋아 채취 후 삶아 건조하면 값이 많이 나간다. 고사리 철에 제주행 항공권이 비싼 까닭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김 소장이 숨겨놨다던 노포 식당은 골목시장 안에 있었다. 메밀꿩칼국수를 주 메뉴로 하는 이곳의 이름 또한 골목식당이다. 한 그릇 가득 담겨 나온 칼국수는 순도 100%의 메밀이다. 수저로 떠먹어도 될 만큼 뚝뚝 끊어진다. 게다가 꿩 살코기의 단백한 식감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베지근’할 수밖에.
관덕정에서 16세기 제주를 만나다
김 소장과 헤어진 후 관덕정을 향해 걸었다. 중앙로 골목에서 한때 제주 3대 해장국으로 통했던 40년 전통의 미풍해장국 본점을 지나고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 송림반점(1950년대 개점) 앞의 길게 늘어선 줄을 보았다.
관덕정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활터가 있는 관아 건물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제주시 관덕정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것으로 보물 322호에 지정돼 있다. 관덕정은 제주 역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이재수의 난으로 300여 명 천주교인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이며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삼일절 집회 또한 이곳에서 일어났다. 또한 제주 최초의 시장(제주시 민속오일장의 시작)도 1905년 관덕정에서 열렸다.
<탐라순력도>(보물 625-6호, 국립제주박물관)는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년)이 제주 곳곳을 순찰한 후 남긴 화첩이다. 관덕정 만경루 1층의 탐라순력도 체험관에서 16세기 당시 제주의 자연과 생활풍습 등을 그래픽 패널 및 영상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목사 이형상은 그가 남긴 <남환박물>에서 제주의 자연을 이렇게 표현했다. “섬을 둘러 있는 것은 모두 돌이다. 촉촉 궤궤한 낭떠러지가 바다에 걸쳐서 심겨 있으니 산이 아니면 바다다. 바다가 스스로 산을 뚫고 고래 같은 파도가 격렬히 뿜어대니, 눈 닿는 먼 곳까지 놀라울 뿐이다. 산에는 숲과 시내가 많은데 그윽하고 물이 맑으며 기이하고, 장엄해 경승 아닌 데가 없다.”
칠성로(통)를 지나 산지천으로
현재 제주도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북수구광장에 이르는 약 450m의 골목을 일컫는다. 칠성로는 탐라시대 있었던 ‘칠성단’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끝에 통(通)을 붙였던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다. 칠성로는 제주 최초의 백화점과 극장은 물론 양복점, 귀금속점이 늘어서 제주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번화했었다.
1980년대 브랜드 옷 가게, 고급 제과점과 커피숍,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면서 탑동 호텔가와 동문시장 등과 더불어 중심지로의 특혜를 누렸지만, 신제주의 등장과 함께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하지만 최근 칠성로는 제주 최대의 상점가가 조성되면서 젊은 도민들과 관광객의 발걸음이 점차 잦아지는 추세다. 또한 쇼핑, 문화, 역사가 어우러진 원도심의 중심 스폿으로의 역할 또한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산지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해서 제주항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칠성로의 우측 끝점, 동문시장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오래전 산지천은 제주시민의 생활용수 공급원이었고 때론 빨래터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들자 이후 급속도로 오염됐고 복개되기에 이른다. 이후 술집, 집창촌, 여관, 식당, 시장 등 서로 다른 삶의 북적임이 공존했던 산지천은 2002년 다시 뚜껑을 걷어내고 자연 하천으로의 모습으로 복귀했다. 또한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는 맑은 물이 흐르고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도심공원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산지천이 바다로 접어드는 끝자락에 공원 하나가 나타났다. 이름하여 산짓물공원, 공원 가득 피어난 빨갛고 노란 튤립이 피어났다. 앞서 가던 커플이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서쪽 하늘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전경의 일부가 돼 가는 느낌이다. 탑동광장으로 나서자 ‘서부두명품횟집거리’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한 잔 생각이 간절해졌고 잠시 후, 횟집 2층 창가에 앉아 촉촉이 저무는 제주 원도심의 하루를 보았다.
풀고레
베지근연구소의 서모란 대표와 김진경 소장이 야심 차게 준비해 오픈한 제주 전통요리주점으로 칠성통과 산지천이 만나는 북수구광장 앞 상가에 자리하고 있다. 풀은 젖은 곡식, 고레는 멧돌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곳의 요리는 제주 전통음식을 요즘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제사 때 주로 먹는 기름떡이 카나페로 변신하는가 하면 상외떡이 돼지고기 엿과 함께 등장한다.
결혼식 때 신부 상차림에만 놓였다는 삶은 달걀은 고기 튀김옷을 입었다. 제주식 피순대와 수육도 일품이다. 음식을 먹을 때면 옛 제주의 음식 이야기가 자상하게 곁들여진다. 꿀과 달걀노른자, 참기름, 생강즙에 청주를 넣어 발효시킨 보양식 오합주, 오메기청주와 탁주와 아울러 가장 제주스레 취해볼 수 있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 기자
1980년대 이후 지금의 연동, 노형동을 앞세운 신제주가 생겨나기까지 제주시의 중심은 관덕정, 칠성로, 탑동, 산지천, 동문시장 일대였다. 현재는 원도심으로 불리는 이곳, 그 시절의 추억과 아련한 고집을 돌아보며 제주다움에 취해보기로 했다.
필자의 고향은 제주도다. 취학 전 부모님을 따라 육지로 나갔으니 엄밀히 얘기하면 무늬만 고향인 셈이다. 어렴풋한 어린 날의 기억, 식생활 곳곳에 남아 있는 집안 풍습, 그리고 여행에서 경험했던 얇디얇은 제주에 대한 지식이 고작이다.
그래서 제주 베지근연구소의 김진경 소장에게 동행을 간청했다. 베지근연구소는 제주 음식의 가치와 문화를 전승해 제주 원도심 음식 여행, 재래시장 투어, 쿠킹 클래스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이다. 한편 ‘베지근’이란 말은 ‘기름지고 영양가 있다’라는 제주 방언이다.
동문시장의 봄
제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상설시장으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생겨난 제주동문상설시장이 그 시초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5년 ‘주식회사동문시장’ 건물이 준공됨과 때를 같이 한다. 동문시장은 주식회사동문시장, 동문재래시장, 수산시장, 골목시장, 공설시장, 야시장, 새벽시장 등 총 7개의 시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12개 게이트를 통해 출입할 수 있다.
동문시장이 원도심에 형성된 까닭은 첫째, 제주항 인근이며, 과거 동일주도로와 서일주도로의 종착 터미널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나 잔치 때 쓸 가장 신선한 생선을 사기 위해 성산이나 한림에서 버스를 타고 찾아온 곳이 바로 동문시장이다.
4월은 옥돔이 끝물이다. 수산시장 매대에는 당일바리(당일 조업해서 잡아 올린 생선) 옥돔이 분홍빛의 미끈한 자태를 자랑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생물 옥돔의 주 고객은 십중팔구 도민이다. 제주에서는 옥돔을 그냥 생선이라 부른다. 마리당 3만~4만 원이나 하지만 잘 말렸다가 제숙으로 쓰기 위해 지갑을 연다.
그러고 보니 1만2000원짜리 옥돔 백반이 수상하다. 식당에서 백반으로 상에 오르는 옥돔의 정체는 대부분 옥두어라 불리는 유사 어종이다. 맛과 모양이 흡사하지만, 옥돔에 비해 색이 비교적 희고 꼬리지느러미에 줄무늬가 없다.
자리돔이 등장했다. 자리돔은 여름 생선으로 알고 있지만 청보리가 익는 요맘때 가장 맛있단다. 서귀포 보목항과 모슬포항에서 많이 잡힌다. 일반적으로 보목항의 자리는 부드러워 물회에, 모슬포항의 자리는 크고 뼈가 억세서 구이나 젓갈용으로 쓴다. 비늘을 벗기고 내장을 떼어낸 자리를 깨끗이 씻어 적당한 크기로 썰어낸다. 그리고 자리와 갖은 채소에 된장을 넣어 버무리고 식초를 풀면 오리지널 물회가 완성된다. 요즘은 육지 관광객의 입맛에 맞춰 고추장과 설탕을 섞어 빨갛게 내는 식당이 많다.
새벽에 낚아 올렸다는 엄청난 크기의 은갈치와 일미 8만 원의 자연산 전복에 입맛을 다시다 떡집 앞에 섰다. 밀가루로 만든 상외떡, 동그란 제주 송편, 기름떡 등과 더불어 조리된 나물과 잡곡밥, 고기 산적 등 제사음식은 생선류만 빼고 다 있다. 제과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단팥빵과 큼직한 카스테라도 눈에 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풍습이다. 일본을 왕래하던 제주민들이 단 빵들을 들여와 제사상에 올리고 나눠 먹은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옷 가게의 전면에 나선 것은 고사리 앞치마다. 4월 중순부터 5월까지 본격적인 고사리 철이 시작된다. 앞치마는 아랫단에 지퍼가 달렸다. 고사리를 캘 때마다 주머니에 담고 불룩해지면 지퍼를 열어 쏟아 붓기 위한 기능이다. 김진경 소장은 얼마 후 긴 비가 내릴 거로 예측했다. 일명 고사리장마라 한단다. 질펀한 봄비가 내린 후 고사리가 우후죽순 자라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 고사리는 맛이 좋아 채취 후 삶아 건조하면 값이 많이 나간다. 고사리 철에 제주행 항공권이 비싼 까닭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김 소장이 숨겨놨다던 노포 식당은 골목시장 안에 있었다. 메밀꿩칼국수를 주 메뉴로 하는 이곳의 이름 또한 골목식당이다. 한 그릇 가득 담겨 나온 칼국수는 순도 100%의 메밀이다. 수저로 떠먹어도 될 만큼 뚝뚝 끊어진다. 게다가 꿩 살코기의 단백한 식감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베지근’할 수밖에.
관덕정에서 16세기 제주를 만나다
김 소장과 헤어진 후 관덕정을 향해 걸었다. 중앙로 골목에서 한때 제주 3대 해장국으로 통했던 40년 전통의 미풍해장국 본점을 지나고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 송림반점(1950년대 개점) 앞의 길게 늘어선 줄을 보았다.
관덕정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활터가 있는 관아 건물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제주시 관덕정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것으로 보물 322호에 지정돼 있다. 관덕정은 제주 역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이재수의 난으로 300여 명 천주교인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이며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삼일절 집회 또한 이곳에서 일어났다. 또한 제주 최초의 시장(제주시 민속오일장의 시작)도 1905년 관덕정에서 열렸다.
<탐라순력도>(보물 625-6호, 국립제주박물관)는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년)이 제주 곳곳을 순찰한 후 남긴 화첩이다. 관덕정 만경루 1층의 탐라순력도 체험관에서 16세기 당시 제주의 자연과 생활풍습 등을 그래픽 패널 및 영상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목사 이형상은 그가 남긴 <남환박물>에서 제주의 자연을 이렇게 표현했다. “섬을 둘러 있는 것은 모두 돌이다. 촉촉 궤궤한 낭떠러지가 바다에 걸쳐서 심겨 있으니 산이 아니면 바다다. 바다가 스스로 산을 뚫고 고래 같은 파도가 격렬히 뿜어대니, 눈 닿는 먼 곳까지 놀라울 뿐이다. 산에는 숲과 시내가 많은데 그윽하고 물이 맑으며 기이하고, 장엄해 경승 아닌 데가 없다.”
칠성로(통)를 지나 산지천으로
현재 제주도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북수구광장에 이르는 약 450m의 골목을 일컫는다. 칠성로는 탐라시대 있었던 ‘칠성단’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끝에 통(通)을 붙였던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다. 칠성로는 제주 최초의 백화점과 극장은 물론 양복점, 귀금속점이 늘어서 제주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번화했었다.
1980년대 브랜드 옷 가게, 고급 제과점과 커피숍,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면서 탑동 호텔가와 동문시장 등과 더불어 중심지로의 특혜를 누렸지만, 신제주의 등장과 함께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하지만 최근 칠성로는 제주 최대의 상점가가 조성되면서 젊은 도민들과 관광객의 발걸음이 점차 잦아지는 추세다. 또한 쇼핑, 문화, 역사가 어우러진 원도심의 중심 스폿으로의 역할 또한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산지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해서 제주항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칠성로의 우측 끝점, 동문시장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오래전 산지천은 제주시민의 생활용수 공급원이었고 때론 빨래터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들자 이후 급속도로 오염됐고 복개되기에 이른다. 이후 술집, 집창촌, 여관, 식당, 시장 등 서로 다른 삶의 북적임이 공존했던 산지천은 2002년 다시 뚜껑을 걷어내고 자연 하천으로의 모습으로 복귀했다. 또한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는 맑은 물이 흐르고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도심공원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산지천이 바다로 접어드는 끝자락에 공원 하나가 나타났다. 이름하여 산짓물공원, 공원 가득 피어난 빨갛고 노란 튤립이 피어났다. 앞서 가던 커플이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서쪽 하늘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전경의 일부가 돼 가는 느낌이다. 탑동광장으로 나서자 ‘서부두명품횟집거리’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한 잔 생각이 간절해졌고 잠시 후, 횟집 2층 창가에 앉아 촉촉이 저무는 제주 원도심의 하루를 보았다.
풀고레
베지근연구소의 서모란 대표와 김진경 소장이 야심 차게 준비해 오픈한 제주 전통요리주점으로 칠성통과 산지천이 만나는 북수구광장 앞 상가에 자리하고 있다. 풀은 젖은 곡식, 고레는 멧돌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곳의 요리는 제주 전통음식을 요즘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제사 때 주로 먹는 기름떡이 카나페로 변신하는가 하면 상외떡이 돼지고기 엿과 함께 등장한다.
결혼식 때 신부 상차림에만 놓였다는 삶은 달걀은 고기 튀김옷을 입었다. 제주식 피순대와 수육도 일품이다. 음식을 먹을 때면 옛 제주의 음식 이야기가 자상하게 곁들여진다. 꿀과 달걀노른자, 참기름, 생강즙에 청주를 넣어 발효시킨 보양식 오합주, 오메기청주와 탁주와 아울러 가장 제주스레 취해볼 수 있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