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여행에 진심이라면, 추자도 그리고 횡간도

EBS <한국기행>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섬 여행을 테마로 하는 출연 섭외다. 이미 통영 우도, 맹골도, 관매도를 소개했던 적이 있어 방송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출연을 결정하고 추자도와 횡간도를 촬영지로 제안했다.
제주에서 여객선을 타고 상추자항에 내리자 먼저 도착한 촬영팀이 마중을 나왔다. 17분의 방송 분량을 찍기 위한 촬영 스케줄은 2박 3일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특성과 동선, 날씨, 예기치 않은 변수 등을 감안하면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 작가

느림의 미학 ‘횡간도’
제일 먼저 횡간도로 가기 위해 작은 배에 올랐다. 횡간도는 추자군도에 속한 4개의 유인도 중 하나로 단 8명의 주민이 사는 섬이다. 상추자항에서 불과 5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정기여객선이 없어 하루 한 번(금요일은 2번) 다니는 행정선을 타야 입도할 수 있다. 횡간도까지는 20여 분, 때에 따라 1명의 주민이 사는 추포도를 거치고, 날씨가 좋으면 뱃길 위에서 한라산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드디어 횡간도, 제주의 최북단 섬이란 표지석이 선명하다. 선착장에 놓인 모노레일이 특별하다. 주민들은 배에서 내린 짐을 그것에 옮겨 싣고 산 중턱에 있는 마을까지 걸어서 올라간다.
섬의 첫인상은 느림의 미학이다. 연로한 주민들의 걸음이나 모노레일의 움직임이 거의 비슷하다.

횡간도는 거대한 자연을 품고 있다. 무성히 자라나 원시 숲을 재현한 나무들, 파도와 바람에 침식된 해안지형이 마치 무인도를 연상케 한다. 이토록 거칠고 가파른 섬에도 학교가 있었다. 1951년 개교해 폐교할 때까지 40년간 16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금은 그 터와 낡은 교사만 덩그러니 남겨졌지만 돌이켜보면 횡간도는 멸치잡이로 명성깨나 날리던 섬이었다.

횡간도에는 단 하나의 민박이 있다. 낚시꾼들이 주 고객이다. 대개 한 번 입도하면 일주일 이상 머무르며 고기를 잡는다. 솜씨가 좋은 민박집 안주인이 기꺼이 촬영에 응했다. 평소 숙박객에게 제공되는 찬들이 그대로 상 위에 올랐다. 섬에서 나는 방풍나물, 고사리가 맛깔스럽게 무쳐졌고 귀하다는 군소도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제주 고사리를 냄비 바닥에 깔고 살이 튼실한 추자 조기를 얹어 양념으로 조려낸 ‘고사리조기조림’은 비주얼과 맛에서 단연 압권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낚시꾼들이 볼락과 우럭 등의 수확물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많지는 않았지만 함께 나눠 먹기는 충분한 양이었다. 섬 여행을 하며 터득한 지혜, ‘낚시꾼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는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쫄깃한 트레킹 나바론 하늘길
다음 날 아침 추자도로 돌아왔다. ‘나바론하늘길’을 걸을 차례다. 전라도에 속해 있던 추자도는 1914년에 제주도로 편입됐다. 그 때문인지 섬의 정서와 문화는 전라권에 가깝다. ‘나바론하늘길’은 상추자 서남해안 거대한 수직 절벽 위에 놓인 2.1km의 걷기 구간이다. 추자올레 18-1과 18-2코스를 따라 하추자를 걷고 추자대교를 건너와 등대 방향으로 진입해도 되고 상추자 용듬벙에서 곧장 올라가 반대로 내려와도 좋다. 나바론하늘길은 상추자 대부분과 추자군도의 크고 작은 섬들을 발아래 품고 있을 만큼 풍광이 각별하다. 또한 걷기 여행자들은 이곳을 걸으며 스릴을 느낀다. 뾰족한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조차 높이의 아찔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추자 해녀 바다로 가다
추자도에도 해녀들이 많다. 오래전 추자도를 여행하며 인연이 된 오금성 하추자청년회장을 통해 묵리 어촌계를 소개받고 촬영 협조를 구했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날은 한 달에 12일 정도다. 작업일임에도 날씨가 흐리고 시야가 좋지 않아 모두가 걱정하던 순간, 솜씨 좋은 묵리해녀들이 출항 소식을 알려 왔다.

물양장을 무대 삼아 덩실덩실 노래와 춤으로 긴장을 풀어낸 해녀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작업선에 올랐다. 촬영팀이 따라간 곳은 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위섬 부근이었다. 깊은숨을 몰아 참고 자맥질을 반복하는 그녀들의 작업 시간은 대략 5시간 정도. 잿빛 바다는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체면을 살린 참돔 한 마리
해녀들이 작업하는 사이, 낚시 영상을 담기로 했다. 오금성회장의 낚싯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보니 포인트라 불리는 크고 작은 바위마다 열정적인 낚시꾼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이래서 추자를 낚시의 섬이라 했던가?

하지만 낚시에 대해 일도 모르는 출연자는 매사가 낯설고 서툴렀다. 즉석에서 배운 대로 새우 미끼를 바늘에 끼우고 낚싯대를 던졌다.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녹녹하게 잡혀줄 생선은 한 마리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허탕을 치고 있는 것은 비단 한 사람뿐만 아니었다. 그렇게 소득 없이 철수를 결정한 순간, 환호성이 들렸고 일행 중 한 사람의 낚싯대에는 바다의 여왕이라는 크고 어여쁜 참돔 한 마리가 걸려 있었다.


뿔소라 찬가
문어와 낚지, 해삼 등도 있었지만 물질의 최대 수확은 뭐니 뭐니 해도 뿔소라였다. 파도가 거친 추자 해역의 뿔소라는 육질이 단단하고 특히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뿔소라는 어촌계로 위판되기 전에 해녀에게 직접 살 수 있다. 1kg에 5500원이라니 시장보다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10kg을 주문하니 넉넉히 저울에 달아 줬다. 바다에서 갓 따온 뿔소라는 상온에서 2~3일 보관이 가능하단다. 통째로 삶아 알맹이를 내어 먹어도 좋고 망치로 껍질을 부숴 떼어낸 다음 회로 먹어도 그만이다. 중간 부분의 내장과 몸통에 붙은 막을 제거해야 하는데 쓴맛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엔 섬 여행 어때요?
모진이 해변에서의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오금성회장이 운영하는 민박에 여장을 풀었다. 이윽고 저녁시간, 뿔소라와 자연산 참돔이 횟감과 구이로 변신해 밥상의 중앙을 차지하고 앉았다. 촬영이 끝나고 나니 비로소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섬은 여행을 즐겁게 하는 많은 재주를 가졌다. 자연과 문화, 그리고 그 터를 지켜온 사람이 산다. 코로나19를 벗어낸 올여름, 섬으로의 여행을 강력히 추천하는 까닭이다.


추자도로 가는 법
완도나 해남 우수영에서 여객선을 이용하는 방법이 보편적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가서 추자도로 거슬러 오는 역발상도 고려해봄 직하다. 진도항에서 제주를 오가는 산타모니카호가 최근 새로이 취항했다. 진도항에서 추자도까지 소요 시간은 45분이다.
글 사진 김민수 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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