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경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최근 독일의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가운데 이러한 기조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관측도 나오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최대 경제국인 독일의 발목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러시아와 중국이다.
독일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4위인 경제대국이다. 세계 최대 단일경제권인 EU에서 최대 경제국이기도 하다. 자동차 산업을 비롯해 전통적으로 높은 생산성 및 기술 수준을 바탕으로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한 나라다. 독일은 이를 바탕으로 수출대국이라는 말도 들어 왔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수출 실적이 2020년 대비 14% 증가한 1조3755억 유로를 기록했다. 독일의 대표적인 수출 품목은 기계, 자동차, 전자기기, 의약품, 광학 정밀기기 등이다. 독일은 통일 이후 1991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무역흑자를 기록해 왔다. 그런데 독일의 지난 5월 무역수지가 9억 유로(약 1조22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수출은 전월 대비 0.5% 감소한 1258억 유로, 수입은 2.7% 증가한 1267억 유로로 집계됐다.
독일의 월간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것은 통일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제조업 수출을 바탕으로 우뚝 선 독일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이 무역적자를 기록한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이다. 석유, 천연가스 등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수입 규모가 크게 늘어난 반면,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로 수출은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의 5월 대(對)러시아 수입액은 전년 동월 대비 54.5% 크게 늘었다. 같은 기간 대러 수출액은 29.8% 하락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줄여 나가고 있지만 에너지 가격 상승세가 더 가팔랐던 것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제로 코로나’ 정책을 시행 중인 중국의 봉쇄조치로 독일의 대중 수출 규모가 크게 감소했다. 독일의 5월 대중 수입액은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이전인 1월보다 3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국에 대한 수출은 0.5% 증가하는 데 그쳤다.
러시아와 중국, 독일 경제 발목을 잡다
독일 내에선 앞으로 경제 전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독일이 역사적인 도전에 직면했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고, 코로나19 여파로 공급망마저 붕괴돼 위기가 몇 달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무역적자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유럽 각국 등에서 경기 침체가 현실화하면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진 독일의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 업체 ING의 카스텐 브제스키 거시연구팀장(수석 이코노미스트)은 “무역수지는 적어도 향후 몇 년간 플러스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컨설팅 업체 판데온 매크로이코노믹스의 클라우스 비스테센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은 올여름 내내 무역적자를 이어갈 것”으로 예측했다. 브제스키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독일 GDP가 2분기에 감소하고 올해 경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라이너 덜거 독일 고용주연합 대표는 “독일이 통일 이후 가장 어려운 경제 및 사회적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코로나19와 러·우 전쟁 이전에 경험했던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더 이상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은 건 러시아와 중국이다. 저렴한 러시아산 에너지와 거대한 중국 시장은 지난 20년간 독일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중국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지속하면서 독일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
독일은 1990년 통일 후 2000년대 중반까지 저성장·고실업에 시달리며 ‘유럽의 병자’라고 불렸다. 하지만 제조업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대폭 늘리면서 유럽 최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독일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2009년 유로존(유로화 사용국, 현재 19개국) 재정위기를 극복하고, 2012년 ‘인더스트리 4.0 전략’을 내세워 제조업 경쟁력을 키웠다. 이를 뒷받침한 건 러시아와 중국이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전기 작가인 랄프 볼만은 “독일 수출 성공의 비결은 러시아로부터 값싼 가스를 사들이고, 중국에 상품을 대량 수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지난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다. 독일은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1위 국가다. 게다가 중국의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 때문에 중국 공장들이 가동을 중단하면서 독일 제조업체들은 부품 공급망 문제에 부딪혔고, 무역 수지도 악화했다. 중국은 지난해까지 6년 연속 독일의 최대 교역국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독일 시가총액 상위 15개 기업 중 10개사가 매출액의 10분의 1을 중국 시장에 기대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독일이 중독됐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지나치게 러시아의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천연가스의 55%, 석탄의 52%, 석유의 34%를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전체 에너지원 중 25%가 러시아산이다. 독일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했고 석탄발전도 줄이면서 풍력과 태양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을 전체 전력의 40% 가까이 높여 왔다. 나머지 전력 생산은 러시아산 에너지로 메웠다.
독일 정치권은 진보·보수와 상관없이 친러시아 정책을 적극 추진해 왔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사민당 출신인 빌리 브란트 총리는 구소련과의 경제 교류를 통해 긴장을 완화한다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사민당 출신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도 “무역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며 에너지 수입을 늘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뒤이어 구소련이 붕괴하자 독일 정치인들은 “상호 의존 전략이 철의 장막을 걷어냈다”고 자평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도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대거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슈뢰더 총리는 퇴임 이후 러시아 국영 에너지 회사인 가스프롬의 노르트 스트림 담당 자문위원장을 맡았고, 최근까지 가스프롬 이사로 재직했다. 노르트 스트림은 러시아에서 발트해 해저를 거처 독일까지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을 말한다. 1222㎞ 길이의 노르트 스트림1은 이미 2011년 완공돼 연간 550억㎥ 규모의 천연가스가 공급되고 있다.
기독민주당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친러시아 행보를 보여 왔다.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고 재임 기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탈원전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2012년부터 노르트 스트림2 사업을 시작했다. 원자로 폐쇄 정책을 도입한 후 전기요금이 급등하고 석탄 사용과 탄소배출량도 늘면서 ‘대안’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이 완공되면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연간 550억㎥의 천연가스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미국은 당초 건설 과정부터 노르트 스트림2 사업을 반대해 왔다. 러시아가 이를 지렛대로 독일 등 유럽 에너지 시장에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우려는 적중했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로 유럽 국가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데다, 러시아의 에너지에 발목이 잡힌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노르트 스트림2는 현재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중단된 상태다.
메르켈의 에너지 정책은 완전한 실수?
독일 일간지 디 벨트는 “푸틴과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고 에너지 사업 계약과 조약에 정권을 묶어두려 했던 메르켈의 시도는 이제 ‘완전한 실수’라는 평가를 피하지 못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독일 일간지 쥐트 도이체 차이퉁도 “메르켈은 러시아와 긴밀한 경제적 유대를 모색하려는 열망으로 독일의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를 높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의 일간지 타임스는 “독일이 스스로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고 모스크바의 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보면서 푸틴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독일이 철저하게 러시아에 의존하는 메르켈의 정책이 푸틴을 대담하게 만들었으며, 메르켈에 의해 모스크바의 금고가 가득해지면서 푸틴에게 유럽을 만만하게 보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독일의 딜레마는 메르켈이 러시아를 대안으로 삼아 적극 주도한 탈원전 정책의 결과”라며 “푸틴에게 독일의 탈핵 정책은 절대적인 횡재”라고 비판했다.
물론 독일 정치권이 친러시아 정책을 추진한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은 석탄과 철광석은 풍부하지만 석유는 생산되지 않고 천연가스도 없다. 따라서 값싼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독일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무엇보다 필요했다. 게다가 독일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 때문에 러시아의 침공을 두려워해 왔다. 독일 정치권으로선 러시아와의 경제적 유대관계를 공고히 할 경우 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면서 구소련을 배신했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독일에 대한 배신으로 볼 수 있다.
독일은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완전히 중단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러시아의 가스관 운영사인 노르트 스트림 AG는 7월 11일부터 21일까지 기계적 요소와 자동화 시스템 등을 정기 점검하기 위해 노르트 스트림1 가스관을 일시 폐쇄했다. 러시아는 이미 6월 중순부터 가스관 설비 수리 지연을 이유로 노르트 스트림1을 통해 독일로 보내는 천연가스 물량을 60%나 줄였다. 이에 따라 독일 의회가 수도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국회의사당의 온수 사용을 전면 중단했다.
독일 최대 부동산 기업인 보노비아는 자사 보유 아파트의 난방 공급을 야간(오후 11시∼익일 오전 6시)에 일시적으로 줄여 실내온도가 최대 17도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가스관에서 발생한 기술적 문제는 핑계에 불과하다”며 “러시아가 가스관 유지보수를 마친 이후에도 가스 공급을 재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 때문에 초래되는 가장 큰 문제는 전기요금이 천정부지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 요금 비교 사이트 ‘베리복스’는 올해 독일 4인 가족 기준 난방비와 전기요금이 각각 1년 전보다 1881유로(약 255만 원), 235유로(약 32만 원)씩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독일경제연구소(IW)는 오일쇼크가 한창이던 1970년대보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IW는 독일에서 지난 5월 가계소득의 10% 이상을 난방, 온수, 전기 등 생활에너지 비용에 쓰는 ‘에너지 빈곤층’의 비중이 25%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14.5%)보다 10.5% 증가한 수치다.
게다가 독일은 올 연말까지 남아 있는 원전 3기를 모두 폐쇄한다. 독일은 이처럼 대표적인 탈원전 국가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기요금 부담을 안고 있다. 독일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2020년 기준으로 킬로와트시(㎾h)당 389.2원으로 원전대국인 프랑스 219.5원에 비해 77% 이상 비싸다. 독일 경제는 자칫하면 친러시아 에너지와 탈원전 정책으로 공장 가동마저 중단할 경우 더욱 추락할 것이 분명하다.
글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사진: 한국경제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