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의 역할이 다양해지고 있다. 고기 같은 식재료는 물론이고 자동차까지 자판기를 이용해 구입하는 시대. 미래의 유망 업종으로 떠오른 자판기의 스마트한 변신은 상상 그 이상이다.
자판기, 새 기술 입고 부활자판기의 사전적 의미는 ‘돈을 넣고 지정된 버튼을 누르면 구매하려는 제품이 자동으로 나오는 기계’다. 이는 사람이 아닌 기계가 판매하는 상점, 즉 대면 접촉이 없는 판매 방식이라는 의미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자판기의 의미를 새삼 되짚어보는 이유는 코로나19 이후 자판기의 활동 영역이 매우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공중전화 박스가 사라지듯 서서히 자취를 감추던 자판기가 비대면 판매라는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기인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마주하는 자판기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한편으론 잘 모르는 자판기다. ICT와 만나 스마트해지고, ‘이런 것까지?’ 싶을 만큼 판매하는 제품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자판기 커피’가 고유명사처럼 들릴 정도로 음료 쪽은 말할 것도 없고, 고기·반찬·피자·주류 같은 먹을거리와 상비약, 꽃다발, 자동차도 자판기로 구매가 가능하다.
자판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7년 국내 한 유통업체가 일본 샤프사로부터 커피 자판기 400대를 수입하면서다. 수입한 커피 자판기는 지하철 역사나 동네 슈퍼마켓에 설치되었고, 급속도로 인기를 끌며 새로운 사업 형태로 성장했다. 하지만 산업이 급변하며 소규모 슈퍼마켓이 줄고, 커피 전문점과 편의점이 확산하자 자판기 사업자나 이용자도 점점 줄었다. 그러다 최근 AI 중심의 4차 산업혁명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유통업계의 무인화·자동화 전환,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소비의 증가까지 더해져 자판기 시장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자판기는 점포에 대한 부담 없이 전기만 공급하면 원하는 장소에 설치할 수 있고, 직원 없이도 24시간 가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판매 제품이 한층 더 다양해지자 자판기만으로 운영하는 무인 매장까지 생길 만큼 새로운 성장 산업의 대안으로 급부상 중이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떠오른 리테일 테크최근 소매업은 첨단 정보 기술과 만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마트, 편의점, 백화점 등 전통적 오프라인 소매점부터 방문 판매, 홈쇼핑, e-커머스 등 온라인 사업에 이르기까지 전반적 유통시장에 ICT가 접목되고 있는데, 이렇게 소매에 첨단 정보 기술이 접목된 형태의 유통 시스템을 가리켜 리테일 테크라고 한다.
빅데이터, 머신 러닝, IoT, 가상·증강현실 등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기술들을 리테일 테크에 활용하면서 유통업계는 획일적 모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서비스로 소비자를 만나고 있다.
리테일 테크를 가장 활발하게 적용하는 사업이 무인 시스템이다. 무인 시스템은 키오스크·AI·로봇 같은 첨단 기술이 직원을 대신하는 것이 특징인데, 인력 없이 기술로만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무인 점포나 무인 자판기를 가리켜 기술집약적 산업이라 부른다.
시장조사 기관 리서치앤마켓에 따르면 스마트 자판기 글로벌 시장은 연평균 1.3% 이상씩 성장해 2027년에는 17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신용카드 결제나 앱 이용이 가능한 스마트 자판기로 진화하면서 산업 자체의 판도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편리한 기능에 더해 이색적인 제품까지 구입할 수 있는 자판기는 소비자에게 긍정적 반응을 얻고 있다.
없는 게 없는 요즘 자판기
소비자를 ‘요즘 자판기’로 이끄는 가장 큰 요인은 다채로운 판매 상품이다. 한 편의점은 정육 상품을 24시간 내내 구매할 수 있는 숍 인 숍 형태의 정육 자판기를 도입했고, 앱과 연동한 중고 거래 자판기도 몇 년 전 출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도서는 물론 노트 등 문구류를 판매하는 독립 서점 자판기도 점차 확산 중이다.
정부 기관도 자판기를 활용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 중구청의 AI 재활용품 무인 회수 자판기는 재활용캔과 페트병을 투입하면 현금으로 돌려준다. 등록한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면 포인트를 적립해주는 방식으로 포인트가 2천점 이상 쌓이면 은행 계좌에 현금으로 돌려준다.
의약품 구매도 자판기로 가능해질 전망이다. 자판기 형태의 화상 투약기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약사와 상담한 뒤 증상에 맞는 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다. 약국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이용할 수 있어 소비자의 반응은 꽤 긍정적이지만, 의약품 오투약으로 인한 부작용과 온라인 판매 가능성 등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여전히 입장차는 있지만 상용화를 통해 의약품 접근성만큼은 개선되지 않을까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해외의 경우 자동차 자판기도 등장했다. 2012년에 처음으로 중고차 자판기를 만들어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카바나는 지금까지도 오직 자판기에서만 차량을 판매한다. 카바나는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주가가 10배 가까이 폭등했다. 싱가포르의 중고차 판매업체 오토반 모터스도 자동차 자판기를 만들었다. 높이 15층, 4열 구조로 구성한 독특한 자동차 쇼룸 건물로, 주차 타워 같은 카바나의 자동차 자판기와 달리 진짜 자판기 형태를 갖췄다. 결제를 완료하면 유리문이 열리고 구입한 차가 출고되며, 바로 차량을 운전해서 갈 수 있다.
자판기 시장의 미래자판기 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엔데믹으로의 전환과 함께 아이템의 한계, 소비자의 취향 변화 등으로 성장 동력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판기 판매 아이템도 이전에 비해 매우 다양화되었으나 경쟁력을 말하기엔 아직 한계가 있다. 새로운 모습으로 이제 본격화되는 사업인 만큼 적절한 규제 마련과 법적 조치 등도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높은 접근성과 손쉬운 작동법이 자판기의 매력이지만, 스마트한 기술이 더해지면 제품 선택까지 입력해야 할 정보는 반대로 더 많아진다. 그만큼 무인 시스템이나 스마트 자판기가 익숙하지 않은 연령대는 사용하기 까다롭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을 입은 자판기의 성장 가능성이 이런 단점을 상쇄할 만큼 높게 점쳐지는 건 분명하다. 역사를 바꾸는 문명의 이기는 무엇이든 ‘처음’이 있기 마련이다. 기술이 더해지고, 편의성이 높아져 이용 빈도가 늘어나면 우리는 비로소 이 스마트 자판기에 익숙해지고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글. 이상헌(한국창업경영연구소장)
출처. 미래에셋증권 매거진(바로가기_click)
정혜영 기자 hy541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