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킹달러, ‘외환 트라우마’ 다시 엄습할까



‘외환위기’. 우리나라 경제사의 가장 큰 트라우마이자 아킬레스건으로 꼽을 수 있는 단어다. 1997년 불어닥쳤던 IMF 외환위기의 충격은 아직도 깊은 공포로 남아, 외환 시장이 크게 요동치는 시기마다 ‘위기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올 들어 급격하게 치솟은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서자 이 같은 시장의 공포감은 더욱 짙어지는 모습이다. 환율 트라우마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 사태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최근 슈퍼달러 현상까지 시기별로 짚어보며 환율 공포의 실마리를 풀어본다.



“말 그대로 킹달러입니다. 슈퍼달러죠.”

최근 외환 시장 분위기를 압축하는 환율 전문가의 한 마디다. 원·달러 환율이 지난 6월 1300원을 돌파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1400원 선까지 치솟은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을 넘어선 순간부터 심심찮게 떠오른 시장의 불안이 9월 21일 현재 1400원을 목전에 두면서 더욱 짙어지고 있다. 그만큼 경제 주체의 입장에서 ‘1달러=1400원’이라는 숫자가 주는 상징성은 가볍지 않다.

실제로 과거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섰던 각 시기는 한국 경제를 위기와 불안으로 물들였던 굵직한 사건과 맞물려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1997년 외환위기,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 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이라는 마지노선을 넘어선 사례는 전무하다.

위기마다 요동쳤던 환율의 기억,
우리 경제 ‘위기 트라우마’ 자극
최근 환율 급등 탓에 심심찮게 ‘위기론’이 거론되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한국 경제를 위협했던 큰 위기의 기억에는 고환율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은 상흔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트라우마의 중심에는 우리 경제의 가장 거대한 위기로 기억되는 IMF 외환위기 사태가 존재한다.

1997년 외환위기의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는 미국의 강한 성장세와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이머징 국가의 글로벌 유동성이 급격히 빠져나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국제 금융 시장에서 한국의 성장성과 펀더멘털에 대한 평가는 턱없이 깎였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시장에서 끝없이 이탈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자본 유출의 해일이 한국까지 덮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달러당 800원대 수준을 유지하던 환율은 1900원대로 치솟았다. 달러값이 불과 1년도 안 돼 2배 이상 오른 것이다.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 우리나라 외환당국이 보유했던 외환보유액은 200억 달러 아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기 직전 해인 1996년 말에도 외환보유액은 332억 달러 규모에 불과했다. 턱없이 부족한 외화보유액과 기업마다 떠앉고 있던 빚은 결국 우리나라 외환위기의 서막을 열었다.

특히 종합금융회사가 저렴한 금리로 빌려온 단기 외화 부채를 국내 기업에 무분별하게 투입했던 당시 분위기는 유동성 위기의 트리거가 됐다. 기업에 쌓인 외화 부채는 원·달러 환율의 급등과 함께 국내 경제의 시한폭탄 역할을 했다.

1997년 초 국내 기업 순위 14위였던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이어진 기업 연쇄 도산과 대규모 구조조정은 현재까지도 한국 경제의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무디스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투기(투자부적격) 등급으로 떨어뜨렸다.

환율과 국가 외환보유액의 중요성이 우리나라 경제 주체의 뇌리에 여전한 공포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더욱이 이 시기 외환위기는 우리 경제의 고질병인 가계부채가 심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기업의 투자가 줄고 경기가 급격하게 둔화되자, 경기 부양을 위해 유동성을 공급한 것이 가계부채 급증으로 이어졌다.



외환위기 사태 이후 약 10년 만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도 원·달러 환율은 크게 요동쳤다. 특히 2008년 9월 미국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국내 자본 유출이 본격화됐다. 9월 초 1100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리먼 사태 직후인 11월 1500원대로 급격하게 폭등했다. ‘두 번째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여지없이 흘러나왔다. 단기간 외채가 급증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심화된 양상이 1997년과 닮아, IMF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의 외환위기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이 시기 위기의 강력한 해법으로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카드가 쓰였다. 통화스와프는 국가 간 단기 자금 융통을 위한 통화 교환 협정이다. 두 나라의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를 상대방 국가와 현재 환율 기준으로 교환하고, 약속한 기간이 흐른 뒤 계약했던 환율로 원금을 다시 교환하는 방식이다. 한국은행과 미 Fed는 2008년 10월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했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외환 시장을 진정시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1997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과 외환보유액(2008년 9월 말 기준 2397억 달러) 덕도 컸다.

결과적으로 외환위기와 같은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환란 문턱까지 갔던 이 사건은 국내 경제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줬다. 당시 대한상공회의소가 진행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 조사 결과를 보면, 기업의 36.4%가 외환위기 때보다 경영을 해 나가기 어렵다는 답을 내놨다. 외환위기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답변도 42.5%에 달했다. 또 중소기업의 85.5%는 외환위기보다 어렵거나 비슷하다고 체감했다. 중소기업의 이런 인식에는 환헤지 상품인 ‘키코(KIKO)’ 사태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수출 중소기업들이 환율 하락을 예상하고 투자했다가 큰 환손실을 입은 사건으로, 수출 중소기업이 줄줄이 도산해 현재까지도 ‘키코 사태’로 회자된다.

2022년 다시 돌아온 환율 공포
과거와 어떤 점이 다를까
과거 환율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던 우리 경제 면면을 고려하면, 최근 원·달러 환율이 치솟으면서 시장의 공포 심리가 커지는 분위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최근의 외환 시장 상황은 과거 두 차례의 큰 위기와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게 정부와 한국은행의 입장이다.

실제로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9월 ‘최근 경제 상황 및 정책 방향’ 강연에서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언급했다. 앞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8월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 직후 “환율 상승이 외환 시장의 유동성 문제나 신용도 문제, 외환보유액 부족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1997년이나 2008년 사태가 반복할 것으로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과거 문제가 됐던 원화 약세의 경우 세계 주요국과 동떨어진 우리나라의 특징적 흐름이었지만, 최근의 통화 가치 하락은 영국, 유로존, 캐나다 등 주요국에서도 일제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 잭슨홀 미팅과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 이후 미국의 긴축 강도가 강화될 것으로 우려되면서, 달러화 강세가 더 심화된 측면이 크다는 설명이다. 이 밖에도 에너지 가격 급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대외적 여건이 환율 변동의 주된 원인으로 꼽혔다. 외환보유액 규모도 과거 위기 당시와 비교했을 때 크게 늘어, 지난해 말 기준 4632억 달러로 집계됐다. 올 들어 외환보유액이 감소 추세를 보이며 8월 기준 4364억 달러까지 줄긴 했지만, 외화 곳간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다.



반면 거시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근의 환율 흐름이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을 심각하게 여기는 목소리가 나온다. 안재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원·달러 환율 상황이 우리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며 “단기적으로라도 패닉이 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난 2013년 긴축발작(테이퍼 텐트럼) 사례와 상당히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당시 미국에서 긴축을 시작하며 브라질, 터키, 인도네시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국의 환율 가치가 떨어지고 금융위기에 매우 가까운 수준까지 갔다”고 회고했다. 이어 “이들 국가의 펀더멘털이 비교적 약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정부 또한 비교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경제의 기초체력이 과거에 비해 견조해졌다고는 하지만, 국가부채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데다 경상수지 흑자 폭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안전한 상황은 아니라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경상수지는 10억9000만 달러 흑자로, 전년 동기 대비 흑자 폭이 66억2000만 달러 감소했다. 또 8월 무역수지는 94억8700만 달러 적자로 집계돼, 5개월 연속 적자를 유지했다. 지난해 8월 15억84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한 것과 대비된다.



안 교수는 “10년 전에는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풀고 외환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지금은 그에 따른 후폭풍을 고려해 대응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외환보유액를 풀었을 때 시장의 흐름을 일시적으로는 막을 수 있겠지만, 결국 시장의 믿음이 원·달러 환율 상승 쪽으로 쏠린다면 속수무책이 된다. 외환보유액만 낭비하고 실질적인 효과는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한미 금리 격차를 좁히고 원·달러 환율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빅스텝을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빅스텝을 밟을 경우 우리 경제에 부작용으로 되돌아올 수 있어 한국은행으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기준금리가 올라갈수록 가계대출과 기업대출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고, 경기가 위축돼 오히려 내수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한국은행이 미국의 기준금리 양상을 지켜보며 점진적으로 인상하겠다는 신호를 던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의 해법으로 쓰였던 한미 통화스와프도 환율을 잡을 열쇠로 거론된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한 당시에도 금융 시장 충격을 우려해 체결한 바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최근 발표한 ‘미국의 달러 환수와 신흥국 외환보유고 연구’ 논문에서 “외환위기 재발 방지를 위해 윤석열 정부의 한미·한일 통화스와프 체결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환율 1350원 상승이 외환위기의 신호다. 정부가 서둘러 대비하지 않으면, 내년에는 1500원까지 상승할 것”이라면서 “외환위기는 반복해서 일어나며, 한국이 국가부도를 다시 맞으면 기업 70%가 파산하는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국가부도를 막는 것이다. 정부는 2008년처럼 한미와 한일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2개의 방어막을 준비하라”고 촉구했다.

한편으로는 과거 외환위기 사례를 의식해 과도한 불안 심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시장을 둘러싼 도를 지나친 걱정이 오히려 문제를 확대하고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환율 전문가인 홍춘욱 리치고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물론 물가와 금리 충격이 걱정되지만, 현재 한국에 외화 자산이 많은 상황”이라며 “투자자들이 우리나라 채권에 올 들어 8월까지 12조 원 규모로 신규 투자했다. 한국 채권에 투자하는 게 이익인 상황이라 계속해서 외국인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그는 “단기와 장기로 시각을 구분해야 하는데, 장기적으로는 환율 상승으로 이익을 보는 쪽도 있다”며 “환율이 단기적으로는 충격을 줄 수 있겠으나 그 정도로 (외환위기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다만 “환율 상승이 시장에 공포를 일으키는 부분이 있어서, 그게 심리적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글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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