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의 귀환
인간의 장수에 대한 오랜 꿈은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명은 비약적으로 연장되었고, 삶과 생명에 대한 사유와 감각도 바뀌고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연장이 아닌, 모든 생명에 대한 존엄성으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
장수의 꿈, 첨단 기술과 만나다
2021년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영화 <승리호>에는 152세의 나이지만 외모가 40~50대로 보이는 최고령 인간 ‘제임스 설리반’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는 우주개발 기업 회장으로 환경오염 때문에 폐허가 된 지구 대신 위성궤도에 우주 피난처를 만들고, 화성을 새로운 지구로 탈바꿈시켜 인류를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꾸민다. 극 중 그의 회춘 비결은 몇몇 장기를 기계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정보 통신 기술과 바이오 기술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전 세계가 고령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오랜 꿈은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맞춤 재활 슈트로 근력을 보조하고, 손상된 신체뿐 아니라 노화한 뇌를 치료하며 능력도 높일 수 있는 바이오 기술이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두뇌 임플란트 시술이 머지않았다?
고령화 시대에 가장 많이 조명받는 분야는 기억과 관련 있는 뇌 분야다. 자신의 기억을 보조기억장치에 저장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잊어버린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작업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미국의 뇌신경과학 스타트업 ‘뉴럴링크Neuralink’는 두뇌 임플란트 시술을 개발 중인데, 이는 기억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뇌에 칩을 이식하는 치료법이다. 뉴럴링크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2016년 설립한 기업으로, 그는 “컴퓨터와 인간의 뇌를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으면 앞으로 인간은 AI와의 경쟁에서 뒤처진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누가 머리에 칩을 이식할까? 아마도 알츠하이머 같은 퇴행성 뇌 질환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뉴럴링크를 통해 모든 기억을 저장해놓고 이를 통해 다시 두뇌에서 재생할 수 있다면 기억을 잃어버리는 질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우울증이나 불면증처럼 두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불안 증세를 모니터링해서 문제를 개선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령 영원한 기억을 갖고 싶거나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두뇌 임플란트에 얼마든지 적극적일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두뇌 임플란트가 치아 임플란트나 라식 수술처럼 일반적 시술과 별 차이가 없는 의료 시술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높다.
망각은 과연 문제인가?
갈수록 우리가 간직해야 할, 아니면 간직하고 싶은 정보의 양은 증가한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와 정보, 각종 SNS에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미지와 영상, 그리고 업무 중에 쏟아지는 이메일과 챙겨야 할 이슈, 어느 것 하나 소홀히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기억력은 그 모든 것을 저장하기엔 어딘가 허술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제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을 못 할 수도 있다. 차를 세워둔 곳을 잊어버리는 일은 다반사고,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있다. 뉴럴링크가 선보이는 두뇌 임플란트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최근 발표된 연구가 생각해볼 여지를 안겨준다. 인간은 고령화의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망각을 적극 보완하고자 두뇌 임플란트와 같은 치료 혹은 시술을 고려하고 있지만, 사실 이 망각이라는 행위는 뇌가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망각이란 나이 먹어 생기는 손실이 아니라, 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의도적인 ‘편집 기제’라는 이야기다.
2017년 스크립스 연구소의 로널드 데이비스Ronald Davis 연구팀은 초파리에게 특정 기억을 학습시킨 뒤 그 기억이 세포 수준에서 어떻게 지워지는지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망각을 유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뇌의 망각 기제는 뇌의 기본 상태를 새롭게 기억하는 정보를 끊임없이 지우는 것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균형 잡힌 삶
우리 뇌는 왜 능동적으로 기억을 지우는 것일까? 망각은 뇌가 작동하는 효율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기억해내려고 행동할 때 모든 신경 회로를 작동하는 뇌의 작용 때문에 일어난다. 만약 기존의 기억을 활성화하려면 뇌가 소모하는 에너지는 무한정 늘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보충하는 모든 에너지를 뇌에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뉴럴링크가 선보이는 기억의 저장 기술은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이란 기억과 망각이라는 적절한 균형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니까. 이탈리아 법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망각하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인가?
휴먼 증강은 장비나 신체 인식, 약물 등의 행위로 인간의 신체적 인지, 감각, 물리적 능력을 높이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간단하게는 안경 역시 시력을 개선하기 위한 휴먼 증강의 예시다. 의족이나 보청기 또한 마찬가지다. 늘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역시 인간의 정보 습득 능력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휴먼 증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휴먼 증강처럼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생명공학, 유전공학, 로봇 기술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가리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고,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제거하며, 초인적 힘과 능력을 이식하는 기술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자연적 인간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진화적 인본주의’라고도 말하지만, 그 진화란 자연적 진화가 아니라 인위적 진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근본적 휴머니즘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휴머니즘 역시 인간을 향상시킨다는 대의명분은 같다. 하지만 그 수단은 기술이 아니라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인간다움’이란 정신적·육체적 능력을 학습으로 향상시키는 인간이며, 자율성을 가진 윤리적이고 건강한 인간을 의미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지닌 문제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다. 우리는 그동안 생명의 유한함과 육체적 제약 그리고 인간적 한계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밝히고 인간의 가치를 실현해왔다. 그 역사의 과정과 결과가 바로 인간의 정체성이 되었다. 앞으로 휴먼 증강으로 진정한 100세 시대가 도래하고 인간적 제약이 사라지게 된다면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인간의 조건’이 될 것이다.
글. 오민수(IT 칼럼니스트)
출처. 미래에셋증권 매거진(바로가기_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