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복순 대 킬복순, ‘엄마의 길’은

사진=넷플릭스


[한경 머니 기고 =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자기 새끼 좋은 대학 보내고 싶은 건 당연한 거다. 그래서 그녀는 딸을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학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두 번은 입학시킬 수 없는 그 학교에 기어이 딸을 입학시켰다. 또 그녀는 사람을 죽인다, 직업적으로. 타고난 듯 잘할 수 있고 시간당 시급도 무척 센, 혼자 일하면서 애를 키우는 엄마에게는 최적인 일.

“공정하지가 못하잖아. 누군가 저런 식으로 대학에 붙으면, 또 누군가는 떨어질 거 아냐. 그게 내가 되면? 엄마는 지금이랑 똑같이 얘기할 거야? 내가 엄마면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하기보다는 정당하게 경쟁하는 법을 가르칠 거야.”

날 닮아서 예쁘기는 하지만 싸가지는 좀 없는, 그러나 누가 들어도 기특한 말을 하는 딸내미는 “내 새끼 좋은 대학을 보내려면 무슨 일이든 하는 게 부모”라는 그녀의 말을 반박하며 공명정대라는 당위를 설파한다.

듣고 보니 참 배울 만한 말이라 그녀는 공정하게 승부하기로 결심한다, 죽여야 하는 타깃과, 정정당당하게. 하지만 상대는 도무지 만만치가 않고,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에게 허락을 구하고 장비를 바꾼다. 단 한 발의 총성으로 임무를 완수한다. “미안. 마트 문 닫을 시간이라.” 역시 그녀에게는 그녀의 ‘룰(rule)’이 먼저다. 언제, 어디서든, 어떠한 경우라도, 내가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길복순>. 어떤 담론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든 또는 감독과 작가가 누구이든 간에, 이 영화는 분명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에게는 언제라도 ‘피 묻은 칼’을 보낼 수 있는 여자, 길복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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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 킬러의 진퇴양난
입시 코디네이터에게 30억 원 넘게 지출하는 과장된 설정이 사실은 이웃의 현실이 아닐까 의심스럽고(스카이캐슬), 학내에서의 지독한 경쟁이 연쇄적인 살인 사건의 이유가 돼도 전혀 개연성 문제를 느끼지 못하며(펜트하우스), 과열된 학업 경쟁의 스트레스가 초등학생의 인성 파괴를 부추긴다는 사실을 당연시(그린 마더스 클럽)하는 한편, 하다못해 음식 솜씨라도 좋았으면 아이의 성적 향상을 위해 학원 선생님이 자주 다니는 단골 반찬가게라도 열었을까(일타스캔들) 탄식을 금치 못하며 시청에 몰두한다. 얼핏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허구의 드라마에 과도하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허구가 우리 현실에 존재하는 일말의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입시공화국이다. 할아버지가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할머니가 하굣길 마중 드라이브를 가고 엄마와 아빠가 맞벌이를 하면서 과외비를 대는 동안, 아이는 ‘삼당사락’을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떨어진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라. 삼대가 총동원되지 않으면 이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는 게 이 바닥의 ‘룰’이다.

삼대가 할 일을 오롯이 혼자 도맡아 하면서 엄마는 차라리 원치 않는 입사의례를 치루는 아이 대신 최전선에 서고 싶어진다. 평생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텨 온 그녀에게 전쟁터는 외려 맘 편한 곳이었으니까. 그곳에서 그녀는 절대 질 리가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전쟁터는 그녀가 꿋꿋하게 ‘살아나온’, 그 바닥이 아니다.

엄마는 폭력과 같이 성장을 했다. 아버지의 질서는 성스러운 기도와 함께 임하셨지만 사랑보다는 가혹한 징벌을 앞세웠다. 그래서 열일곱에 첫 살인을 저질렀을 때부터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에게 살인은 곧 해방이었으니까.

그래서 엄마는 딸을 “하나부터 열까지 반대로” 키우고 싶어 한다. 폭력보다는 대화를 앞세우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 가치를 통으로 집어삼켜도 끊을 수 없던 기호식품이라 “술은 몰라도 담배는 몸에 좋을 거 하나도 없어. 피우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르며 “언제부터 피웠어? 엄마랑 한 대 필래?”라고 대화를 시도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쿨한 척 좀 하지 마”라는 냉랭한 대꾸뿐이다.

‘확 죽여 버릴까 보다’라는 속내를 밖으로 내뱉으며 달려가 보지만 사춘기인 딸은 “미안, 다음엔 안 그럴게”로 시작도 못한 잔소리를 철벽 블로킹한다. “왜? 뭐 할 말 있어?” 확 죽여 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인데, 살뜰한 모녀 간 대화란 아무래도 뜨거운 감자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 영화의 카피를 곱씹게 된다. “죽이는 일? 그거야 쉽다. 진짜 어려운 건 애 키우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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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복순, ‘피 묻은 칼’의 전설
그녀는 열일곱 살에 처음 살인을 했고, 곧바로 직업적인 킬러가 됐다. 업계는 어차피 정해진 일을 쪼개서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대한민국은 새마을호를 타고 달려도 5시간이 안 걸리는 작은 동네이며, 세계화를 통해 넓어졌다고 해도 시장은 국내 아니면 국외 둘 중 하나다. 80억 인구가 사는 이 지구촌에서는 어떤 직업이라도 경쟁을 피할 수가 없는 법이다. 킬러도 예외는 아니다. 킬러들끼리도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영역 다툼도 심하게 한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때로는 규칙들이 종종 생겨나고 정비된다. 예를 들어, 미성년자는 죽이지 않는다든지, 회사가 허가한 작품만 한다든지, 회사가 허가한 작품은 반드시 트라이한다든지.

‘피 묻은 칼’은 그 견제와 다툼의 표지였다. 경쟁이 심한 곳에서는 능력의 절대평가가 불필요하다. 절대치의 능력보다 중요한 건 커트라인을 넘는 것이고 성적은 상대적인 등급으로 표시된다. 결국 내 실력을 올리는 노력보다 남을 끌어내리는 수완이 더 확실한 보상을 가져오기도 한다. 내 가치를 위해 수십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1등인 사람 하나를 죽이는 편이 효율적이다. 1등을 죽이면 1등이 된다. 어디선가 굴러와서 들은 적도 본 적도 없고, 무슨 체계적인 훈련조차 받은 적이 없으며, 아직 나이조차 어렸던 미성년자 길복순은 그렇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왔다. 경쟁이 한참 치열할 무렵에는 아마도 ‘피 묻은 칼’을 가장 많이 받아 본 킬러였을지 모른다.

모든 전설에는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피 묻은 칼’은 아마도 ‘길복순’ 전설의 증거일 것이다. 피 묻은 칼은 칼을 보낸 사람과 칼을 받은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목숨을 건 결투를 예고한다. 가장 많은 ‘피 묻은 칼’을 받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뜻이며, ‘살 떨리게 무서운’ 길복순의 전성시대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싹수부터 달랐던 그녀
길복순이 죽인 첫 번째 타깃은 ‘아버지’였다. 사실 아버지는 그녀의 타깃이 아니라 다른 킬러의 작업 대상이었다. 킬러는 자살을 가장해 길복순 아버지의 살인을 시도하던 중 그녀와 마주쳤다. 그는 규칙에 따라 목격자인 그녀를 죽여야 했지만 아직 너무 어린 소녀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망설인다.

어린 동생이 있어서 애는 죽이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규칙을 정하고 지키는 사람이라. 길복순은 그 규칙이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규칙을 수정한다. “미성년자 어때요? 나 아직 민증 안 나왔는데.” 목을 맨 아버지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의자를 밀어 버리고 돌아서서 킬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팩트 폭력을 행사한다. “이제 아저씨가 목격자다.” 그녀는 그렇게 애는 죽이지 않는다는 규칙과 목격자는 죽여야 한다는 규칙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를 구원하고 규칙을 정비한다.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생명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배운다고 한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물아일체의 상태였던 ‘애’가 상징계라는 아버지의 세계로 진입해 독립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사회화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했던 상상계의 자아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대타자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된다. 아버지는 금기와 쾌락의 규칙을 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길복순의 아버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면서 그녀를 ‘용서’하고 ‘구원’하고자 했지만, 그녀는 그 금기의 원천을 제거함으로써 해방과 자유를 얻고 한 사람의 킬러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킬러라는 직업은 분명 아버지의 질서가 인준하는 밥벌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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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가진 모가장의 생존 전략
그녀는 직업을 가진 싱글맘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와 가족의 탄생은 직립을 하면서 미성숙한 다음 세대를 생산하게 된 여성 개체가 선택한 생존 전략의 결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간이 애를 낳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독립된 개체로 성장시키는 일은 어렵다. 여성이 가정을 지키고 남성은 밖에서 밥벌이를 하는 구조가 안정적이라는 사고는 그래서 시작됐을 것이다. 남녀가 내외하면서 가부장을 중심으로 대를 이어 존속하는 구조도 그렇게 정착됐을 터다. 그런 세계에서 길복순은 혼자서 아이를 낳고 길러 왔다.

문명 사회의 물적 토대가 변화해도 인간의 정신은 때때로 지체를 겪기 마련이다. 직업을 가진 여성은 이미 이 세계에 수없이 존재하지만, 아직도 여성에 대한 전통 사회의 윤리는 제법 공고하게 잔존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가정 내에 위치하며 그 위치가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자라서는 남편을 따르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들을 따른다는 이른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아직도 옳다고 주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주의자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부모를 잘 만나고 남편을 잘 만나고 잘난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규칙은 이 존속을 위해 존재한다. 지나치게 심한 경쟁은 이러한 존속의 위협 요소이고 킬러들의 MK 규칙들은 그래서 공인됐다. 죽이든 살리든, ‘내 새끼는 내가 책임진다’는 것이 원시적인 가부장의 규칙이라면 각 회사 대표의 책임하에 회사가 인준한 일만을 합법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가부장 사회의 약속이다.

규칙은 때때로 비정하다. 어떤 가부장들은 가문의 존속을 위해 가족 구성원의 생사 여탈을 결정한다. 전통 사회에서 비속 살해는 죄가 아니었다. 울면서 불초자를 베는 것은 가부장의 불가피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 아래 용인된 폭력에서 스스로를 구원한 싱글맘은 이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패’라는 불명예를 안을지언정 이 몰인정한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 모르면 몰랐지, 안 이상은 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두 번째 규칙을 깬다. 그 지시를 내린 사내이사를 제거함으로써 세 번째 규칙도 깬다. 그렇게 MK 대표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자라지 않는 ‘애’로 존재하는 동생을 제거함으로써 첫 번째 규칙도 깬다. 그래도 상관없다. 길복순은 자기 새끼와 자신이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엄마 가장이기 때문이다.

모가장은 가문을 위해 출현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내 새끼를 위해 출현한 존재다. 모가장은 가부장 이전에 존재했고 가문이라는 집체의 존속이 아니라 나와 내 새끼라는 개체의 생존을 중시한다. MK는 자신과 자신이 보호하려는 대상을 위해 규칙을 만들지만 길복순은 그 규칙의 보호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그 규칙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침탈하고 아끼는 대상에게 위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규칙을 파괴한다.

살아남은 딸의 길
“옛말에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고 했다. 의복이 해어지면 꿰맬 수 있지만 수족이 잘리면 어떻게 계속 살아가겠느냐?” 소설 <삼국지>의 이 대사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가부장 사회의 윤리를 대변한다. 형제는 가부장 사회에서 가문의 경영과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인적 자원이다.

반면 처자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다. 그래서 가부장 사회의 윤리는 형제와 처자가 함께 물에 빠졌을 때 형제를 먼저 구하라고 지시한다. 애착이라든지 정서적인 좌절은 이 선택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부장의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독립을 얻은 딸은 그 선택에 따르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생존과 자기 애착 대상의 생존을 우선한다. 생존을 우선하는 모가장의 규칙은 더 이상 대를 이은 규칙의 전승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금치는 몸에 좋은 것이지만 사실은 ‘나’ 역시 시금치보다는 스팸이 더 좋다. 엄마는 엄마의 길을, 딸은 딸의 길을 갈 뿐이다.



글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l 사진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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