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세계 경제는 '반전의 반전'



계묘년(癸卯年), 2023년 세계 경제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한 해였다. 매분기마다 긍(肯·긍정)과 부(否·부정), 부(浮·부상)와 침(沈·침체)이 반복되면서 배리 아이켄그린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예언했던 ‘초불확실성 시대가 어떤 것인가’의 진면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연초 출발은 ‘부(否)’와 ‘침(沈)’이었다. 미·중 경제패권 마찰,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사태, 중남미 핑크 타이드 물결 등 2022년이 남겨준 과제가 워낙 무거웠기 때문이다. 올해 세계 경기를 보는 눈도 ‘대침체론(great recession)’이 거론될 만큼 비관적이었다.

지난 3월에는 실리콘밸리은행(SVB) 뱅크런에서 비롯된 미국의 은행 위기까지 겹치면서 세계 경제를 더 어둡게 했다. 모든 위기가 유동성 위기, 시스템 위기, 실물경기 위기 순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미 바이든 정부는 시스템 위기로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런 노력이 무산될 경우 제2의 금융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극한 상황까지 몰렸었다.

바이든 정부의 초기 대응은 리먼브라더스 사태 때 오바마 정부와는 달랐다. 위기 극복의 주체인 조 바이든 대통령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리먼 사태 당시에 각각 부통령과 Fed의 통화정책담당 부의장으로서 경험이 풍부했다. 위기 극복의 근거가 되는 ‘단일금융법(도드-프랭크법)’도 갖춰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 과제인 시스템 위기로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동성부터 풀었다. 구제금융으로 도덕적 해이를 낳았던 리먼 사태의 교훈을 살려 자기 책임의 원칙도 철저히 지켰다. 예금자는 확실히 보호해 추가 인출을 방지하는 대신 책임져야 할 금융사와 투자자의 자산은 조기에 파산시키거나 처분해 유동성 확보에 노력했다.

하지만 리먼 사태에 따른 낙인 효과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뉴 앱노멀 리스크로 신용경색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신용경색의 대표 지수인 시장심도(market depth) 지수는 SVB 사태 이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 국채 변동성 지표인 무브(move) 지수도 코로나19 사태 직후보다 높았다.

문제는 바이든 정부는 신용경색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중국은 국채를 내다 팔아 미국의 돈줄을 더 조였다. 중국의 미국 국채 매각 속도는 의외로 빨라 많을 때는 1조3000억 달러가 넘었던 중국의 미국 국채 보유를 SVB 사태가 한참 진행할 당시 8500억 달러 수준까지 줄였다.

중국의 국채 매각은 바이든 정부에 매각 규모 이상으로 부담이 됐다. 공화당의 반대로 연방부채한도가 조정되지 않음에 따라 디폴트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뒤늦게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는 과정에서 중국이 미국 국채를 매각해 시장금리가 더 올라가면 물가와 은행 위기를 잡기보다 경기마저 침체되기 때문이다.

Fed의 통화정책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커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통화정책의 우선순위가 인플레이션 방지보다 신용경색 해소와 금융 시스템 안정에 둬야 한다는 권고가 잇따랐다. 통화정책 주요 수단도 금리 변경보다 유동성 조절로 바꿔서 지금 추진하고 있는 양적긴축(QT)을 중단하고 오히려 양적완화(QE)를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꺼져만 가던 세계 경제에 ‘긍(肯)’과 ‘부(浮)’의 희망의 싹을 돋게 한 것이 지난 5월에 열렸던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과 중국·중앙아시아 간 정상회담이었다. 두 회담의 주도국인 미국과 중국 간 관계가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에서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축소)’으로 바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디커플링과 디리스킹의 실체는 게임이론을 통해 보면 명확해진다. 각국 간 관계를 조명할 때 자주 활용되는 이 이론은 참가국 간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판가름 나는 ‘노이먼-내시식 게임’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섀플리-로스식 게임’으로 나뉜다. 디커플링은 이기적 게임인 전자에, 디리스킹은 공생적 게임인 후자에 해당한다.

2012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취임하기 직전까지 미·중 관계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된다. 1989년 존 윌리엄슨 미국 정치경제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개념은 중국을 포함한 비서구 국가를 글로벌화와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시켜 궁극적으로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략을 말한다.



미·중, 관계 변화 모색…미리보는 2024년은

미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중국의 대외 경제정책 기조인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대립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인 독일을 포함한 유럽 부흥에 기여했던 ‘마샬 플랜’이라 부를 정도로 중국이 성장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데 도움이 됐다.

중국의 WTO 가입은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에 이르기까지 대중국 편향적으로 만들었다. 마치 중국이 없으면 대외 경제정책이나 기업 경영 전략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중국 경제는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국민총소득(GNI)이 WTO 가입 직전 미국의 17% 수준에서 시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에는 55%로 3배 이상 높아졌다.

팍스 시니카의 야망을 갖고 있었던 시 주석은 취임하자마자 대외 경제정책 기조를 ‘주동작위(主動作爲: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로 급선회했다. 행동계획으로 일대일로, 위안화 국제화, 제조업 2025, 디지털 위안화 기축통화 구상 등 중국의 세력 확장 전략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순차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두 컨센서스 간 충돌이 정점에 이른 것은 트럼프 정부 시절 대중국 견제 전략인 ‘나비로 패러다임’을 추진할 때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수 시절부터 초강경 중국론자로 알려진 피터 나바로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함무라비 법전식으로 중국을 철저하게 배제해 나가는 디커플링 전략을 추진했다.

‘대중 견제’라는 관점에서 나바로 패러다임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바이든 정부 출범 직전 중국의 GNI는 미국의 75%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 등은 바이든 대통령의 연임을 가정해 집권 기간인 2027년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시 주석의 팍스 시니카 야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자신의 집권 기간 중 경제패권을 중국에 넘겨준다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대 굴욕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2년 동안 대중 견제 수위를 높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중 관계 개선에 다리를 놓았던 헨리 키신저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제3차 세계대전이 우려될 정도로 위기에 처하자 디커플링 전략의 한계를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먼저 손을 내민 국가는 중국이다. 중앙아시아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랭경온(政冷經溫: 정치 군사적으로 냉랭한 관계 속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 기류로 바뀌면서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을 잇달아 초청했다. 미국도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 동안 가려졌던 수정된 워싱턴 컨센서스인 ‘설리번 패러다임’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미·중 간 관계가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 시대로 넘어가 대립에서 공존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 샌프란시스코 회의 중에 열렸던 양국 간 정상회담에서 디리스킹 합의가 나오지 않았다. 2024년에도 양국 간 경제패권 다툼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관계 변화 기류가 모색될 무렵 2021년 4월 이후 전 세계인에게 고통을 줬던 인플레도 각국 중앙은행의 통제권에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 6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과 근원 CPI 상승률은 각각 3%, 4.8%로 크게 둔화됐다. 같은 달 한국의 CPI 상승률은 2.7%로 3% 밑으로 떨어졌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올해 하반기 이후에는 물가가 안정되는 것이 과연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효과인가를 놓고 논쟁이 지속됐다. 2024년을 앞두고 ‘no’라는 쪽으로 굳어지고 있다. Fed가 처음 금리를 올린 이후 4개월이 지난 때부터 물가가 안정되기 시작한 점을 감안하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Fed가 추정하는 통화정책 시차는 1년 내외다.

물가 하락 속도도 너무 빠르다는 평가다. 미국의 CPI 상승률은 불과 1년 만에 9.1%에서 3%로 3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다. 지난 20년 동안 저금리 시대가 지속돼 통화정책 전달 경로상 금리 변화와 총수요 간 관계가 비탄력적인 유동성 함정에 처한 여건에서는 금리 인상이 물가를 빠르게 떨어뜨릴 수 없었다.

다른 요인이 결부돼 있다는 의미다. 2년 전 물가 문제가 불거질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기가 좋은 때는 아니었다. 전례가 없었던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공급망 차질 등이 발생하면서 각종 공급 비용이 급증한 것이 물가를 부추겼던 주요인이다. 금리 인상은 경기 과열로 물가가 오를 때 추진하는 총수요 관리 대책이다.

Fed를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처음 올릴 때 너무 빠른 속도로 올려서는 안 된다는 권고가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각국 중앙은행은 물가를 키웠다는 비판을 의식해서 인지 금리를 단기간에 너무 빨리 올려 물가가 잡히면 과연 금리 인상이 적절했는가에 대한 평가가 예고돼 있었다.

중앙은행의 금리 변경이 적절했는가를 사후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테일러 준칙(Taylor’s rule)’이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기준금리는 테일러 준칙에 의해 도출된 적정 수준보다 높아져 Fed의 금리 인상이 얼마나 급하게 이뤄졌던가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번에 금리 인상 속도는 1970년대 후반 2차 오일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아 폴 볼커 당시 Fed 의장이 금리를 올릴 때에 이어 가장 빠르다.

볼커식 대응은 반드시 장단기 금리 간 역전현상을 불러온다. 통화정책에 민감한 단기금리가 빠르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2년물과 10년물 금리 간 역전현상이 1년 이상 길어지면서 그 폭도 확대되는 추세다. 올해 하반기 들어서는 100bp(1bp=0.01%포인트) 이상으로 40년 만에 최대 폭으로 벌어지면서 경기 침체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상기후와 전쟁, 경제 발목 잡을까

세계 경기에 희망의 싹이 돋을 그린 슛 단계에서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졌던 것이 이상기후다. 홍수, 가뭄, 산불, 태풍, 쓰나미 등이 ‘대(大·great)’가 붙어야 할 정도다. 슈퍼 엘리뇨의 위력이 발생 2년 차에 더 커지는 점을 감안하면 2024년에는 접두어를 한 단계 격상시켜 ‘초(超·hyper)’자를 붙여도 부족할지 모른다는 경고가 유난히 눈에 띈다.

러·우 전쟁이 마무리되기 전에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터짐에 따라 세계 경제를 다시 ‘부(否)’와 ‘침(沈)’으로 돌려놓았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충돌은 5차 중동전쟁으로 확산되지 않아 다행이지만 2024년에는 한국이 속한 동북아 지역에서 지경학적 위험이 높아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와 우리로서는 더 긴장된다.

올 들어 세계 경제가 ‘긍(肯)’과 ‘부(否)’, ‘부(浮)’와 ‘침(沈)’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앞날을 예측하기 더 어렵게 하는 ‘헤드 페이크(head fake)’ 논쟁이 일고 있다. 머리를 흔들어 기만한 다음 슛을 쏘는 장면에서 유래된 이 용어는 경제적으로는 가장 최근에 발표된 지표(헤드)가 추세에서 벗어나 방향을 트는 현상을 말한다.

Fed는 중요한 고비 때마다 헤드 페이크를 잘못 판단해 ‘무용론’에 빠질 만큼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첫 사례는 에클스 실수(Eccles’s failure)다. 1929년 후버 정부 출범 이후 불어닥친 경기 침체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갑자기 물가가 오르자 당시 매리너 에클스 의장이 서둘러 금리를 올렸던 것이 대공황을 낳았다.

2차 오일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치면서 폴 볼커 의장은 장고 끝에 금리를 17%까지 올리자 물가가 잡히기 시작하는 헤드 페이크가 발생했다. 하지만 Fed는 물가가 잡혔다고 보고 금리를 성급하게 9%대로 내렸고 물가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른바 ‘볼커의 실수(Volker’s failure)’다. 재정정책에서도 헤드 페이크를 잘못 판단해 실수를 저지른 적이 많다.

최근 거세지는 헤드 페이크 논쟁처럼 ‘긍(肯)’과 ‘부(否)’, ‘부(浮)’와 ‘침(沈)’ 간 방향을 확실히 잡지 못하고 그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계묘년이 저물어간다. 갑자년(甲辰年), 2024년 세계 경제는 ‘긍(肯)’과 ‘부(否)’, ‘부(浮)’와 ‘침(沈)’을 모두 휘감아 하늘로 올라가는 청룡처럼 모든 세계 경제인들이 활짝 웃는 시대가 전개됐으면 하는 희망을 걸어본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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