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금융 시장은 금리 흐름에 따라 울고 웃었다. 10월 말까지 지속된 가파른 금리 상승세로 채권은 맥을 못 추며 약세를 보였고, 주식 역시 밸류에이션에 타격을 받으며 전체 자산 배분 효과는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금리는 지구의 중력과 같아서 금리 상승이 모든 자산을 짓누르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다행히도 11월 이후에는 금리가 안정을 되찾아감에 따라 시장이 반등세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와 같은 유동성 환경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여건으로 보인다. 물가와 고용, 소비 등 주요 지표들의 약화 조짐에도 경기 둔화의 속도는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비롯한 미 Fed 위원들 역시 아직은 인하보다 동결 기조를 고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디스인플레이션 기조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의 3%대 물가 수준은 Fed 목표치(2%)와는 괴리가 있다. 금리 인하를 위한 필수 조건인 물가의 뚜렷한 안정이 실제 지표를 통해 확인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2024년 말까지 4회 이상(100bp: 1bp=0.01%포인트)의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이 미리 반영된 현시점에 Fed의 정책 전환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현재로선 우세하다.
다만, 2023년 시장에서 확인된 변화는 ‘금리 상승=성장주 약세’라는 기존 공식이 깨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리가 상승하는 국면에는 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현재 가치로 할인해 주가에 반영하는 성장주에 비해 가치주가 상대적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2023년의 경우 대부분의 구간에서 금리 상승 압력이 높게 유지되고 중앙은행들이 양적긴축(QT)을 통해 유동성을 축소했음에도 성장주가 더 견조한 흐름을 지속했다. 이러한 성장주의 강세는 ‘매그니피센트(magnificent) 7’이라고 불린 시가총액 상위의 빅테크가 견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형 기술주는 어떻게 금리라는 중력을 거스를 수 있었을까.
대형 기술주, 고금리 환경서 독보적 지위 구축
과거 제로금리로 차입이 가능했던 시기에는 다양한 중소형 성장주에도 큰 기회가 부여됐다. 그러나 높아진 금리에 의한 고비용의 자금조달 환경에서는 검증된 기업에만 투자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단순히 꿈과 희망이 담긴 스토리만으로 투자에 나서기에는 비용 부담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가시적인 수익성과 재무적 안정성에 대한 시장의 요구가 더욱 심화된 것이다. 이에 높은 자기자본이익률(ROE) 및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소수의 대형 기술주들은 금리 상승 환경에도 실적을 통해 펀더멘털을 증명하며 주도력을 유지했다.
고금리라는 중력을 견뎌내며 상승 모멘텀을 강화한 대형 기술주들의 현 상황은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을 떠올리게 한다. 만화적 상상이지만 이 공간에서의 1년은 외부의 시간으로 하루에 해당하고 중력은 지구의 10배에 달한다. 주인공인 손오공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 이 방에 들어가 수련을 한다. 그리고 극한의 중력을 버티며 수련을 마친 인물들은 더욱 강해져 돌아온다. 대형 기술주들도 고금리 환경을 성공적으로 헤쳐 가면서 이들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독보적 지위를 공고히 다지는 모습이다.
성장 기대 견고한 ‘미국 빅테크’와 ‘한국 반도체’ 주목
2024년에는 주식 중에서 대형 기술주에 대한 시장의 선호가 지속될 전망이다. 펀더멘털 측면에서 견조한 이익 성장과 함께 ‘인공지능(AI)’이라는 모멘텀 요인까지 겸비하고 있는 미국 빅테크 중심의 투자 대응은 유효할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 가운데 정보기술(IT) 업종은 2023년 4분기부터 이익 성장세를 확대해 내년에는 두 자릿수의 고성장세를 이어 갈 것으로 예상한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2024년 이익 가시성이 매우 높은 한국 반도체에서도 투자의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코스피 지수의 내년 주당순이익(EPS) 성장률이 50% 수준으로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 여전히 과거 대비 낮은 수준의 외국인 투자 비중, 약달러 가능성, 대만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밸류에이션 등을 고려하면 2024년 상반기를 중심으로 한국 증시가 추가 상승할 여지가 높다는 판단이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산업은 단연 반도체가 될 것이다. AI에 대한 높은 관심뿐만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의 업황 전환이 상승 랠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메모리 고정거래가격이 반등하는 등 긍정적인 초기 신호도 포착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2024년 거시경제(매크로)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불확실성은 여전히 높다. 경기 전망은 연착륙 기대가 우세하나 누적된 긴축 여파에 따른 일부 경착륙 우려도 유지되는 가운데, 미국 대선과 같은 정치적인 이슈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변수들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기업 고유의 성장성과 재무 건전성 등 펀더멘털에 집중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 이미 대형 기술주들이 큰 폭의 주가 상승을 시현해 가격에 대한 부담이 제기되고 있지만, ‘비싸도 결국 제 값을 한다’는 펀더멘털 관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강세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미국과 한국 증시의 대형 기술주 위주로 옥석을 가려내는 전략은 2024년에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글 홍동희 SC제일은행 투자전략상품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