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지지 않는 시계’...한 줄 기획서가 바꾼 역사

이베 키쿠오 지샥 개발자

독보적 내구성과 일본 특유의 정밀 제조 기술, 늘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한 다채로운 디자인으로 시계 애호가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끄는 지샥(G-Shock)의 개발자 이베 키쿠오를 만났다.

1984년, 미국에서 기상천외한 광고 하나가 전파를 탔다. 아이스하키 선수가 퍽(공) 대신 검은색 전자시계로 슛을 때리는 광고였다. 강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시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광고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과대 광고가 아니냐’는 시청자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미국의 한 TV 쇼에서는 광고와 똑같은 조건으로 실험을 단행했다. 결과는? 카메라에 비친 시계는 정말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광고의 주인공인 지샥 ‘DW-5000C’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다. 연간 1만 개였던 판매량이 5년 새 70만 개까지 늘었을 정도다. 업무 환경이 거친 경찰과 소방관 등의 직종에서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더니, 뒤이어 운동선수와 스트리트 패션을 즐기는 젊은 세대로까지 인기가 번져 나갔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지샥을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시계’로 각인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샥의 역사는 1981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의외로 업무에 쫓긴 한 신입 연구원의 한 줄짜리 기획서가 시발점이 됐다. 당시 카시오의 연구원들은 매달 신제품 기획서를 1부씩 내야 했는데, 시계에 큰 관심은 없지만 어쩌다 보니 카시오에 입사한 이베 키쿠오가 쓴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시계를 만들겠다’는 기획서(이미지나 데이터 란은 전부 백지로 제출했다고 한다)가 윗선을 통과한 것이다.
이후 이베는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 시계’를 만들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시작했다. 200개가 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구개발센터 3층 화장실 창문으로 수없이 시제품을 떨어뜨렸다. 당시 이베가 구상한 시계는 10m 높이에서 떨어져도 파손되지 않고 10기압(100m)의 방수 기능을 갖춘, 베터리 수명 10년의 시계였다고 한다. 하지만 튼튼한 시계 개발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개발 초기에는 ‘시계 외부에 고무 몰딩을 덮어서 충격을 흡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진행했지만 10m 높이에서 낙하하는 시계를 보호하려면 거의 야구공만 한 고무 몰딩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와 포기한 일화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고무공을 보면서 ‘무브먼트를 고무 부싱으로 케이스에서 떨어뜨려 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1983년 4월, 5단계 충격 흡수 구조와 모듈 부유 구조를 갖춘 지샥의 첫 번째 시계 ‘DW-5000C’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지샥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지금까지의 누적 판매량이 1억4000만 개에 이를 정도다. 시계 애호가들 중 지샥 시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패기 넘치던 젊은 연구원 이베는, 자신이 만든 시계가 하나의 아이콘이 되리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마침 ‘MRG-B5000R’ 출시를 기념해 한국을 찾은 이베 키쿠오를 만나 직접 묻기로 했다.

- 개발 당시 지금과 같은 큰 성공을 예상했는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지샥의 첫 고객은 도로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였다. 그러고 보니 건설업 등 거칠고 힘든 일을 하는 근로자들은 시계를 거의 차고 있지 않더라고. ‘지샥의 튼튼함을 알려 업무 환경이 거친 사람도 시간을 볼 수 있게 해야겠다’ 정도로만 생각했지, 지금 같은 큰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튼튼한 시계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아버지께 졸업선물로 시계를 선물 받았다. 늘 애지중지하며 착용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바람에 시계를 떨어뜨렸는데,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기획서를 내게 됐다.”

- 단 한 줄짜리 기획서였다. 심지어 구체적 계획은 공란으로 제출했다. 왜 체택됐다고 생각하나.
“카시오는 후발주자였다. 시계가 아닌 전자계산기로 출발했다. 그래서인지 카시오에는 세상에 없는 물건을 만들겠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당시 시계는 내구성이 형편없어 불편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내 계획서가 임원들의 눈에 띈 것 같다.”

- 지샥 시계의 장단점을 어떻게 분석하나.
“지샥은 시계 내외장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완전한 내충격 설계를 적용한 최초의 시계다. 그만큼 튼튼하다는 점이 최대 장점이다. 아무리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다른 시계에 비해 좀 크고 두껍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 지샥에게 한국 시장이 갖는 의미는.
“지샥은 최근 아시아 시장에서 눈에 띄는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리드하는 곳이 바로 한국 시장이다. 그만큼 중요하다. 특히 소득 수준이 높은 한국에서는 지샥의 프리미엄 라인인 ‘MR-G’ 제품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발매와 동시에 ‘완판’을 기록하는 제품도 여럿 있을 정도다.”

- 지샥은 패션 아이콘이기도 하다. 특히 수많은 샐럽이나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컬래버레이션이 있다면.
“셀럽과 브랜드로부터 협업 제안을 꽤 자주 받는다.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건, 그(그 브랜드)가 지샥의 ‘팬’이냐는 것이다. 그래야만 서로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컬래버레이션은 ‘베이프’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 니고와 함께한 에디션이다. 지샥의 35주년을 기념해 딱 35점만 제작했는데, 지샥과 니고의 매력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니고와는 개인적인 친분도 있어 많은 부분에 직접 참여했다.”

- 일각에서는 시계 산업이 쇠퇴할 거라 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나아가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스마트워치로 다양한 정보 확인이 가능하다. “스마트워치가 출시된 후 사람들이 더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물론 스마트폰으로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지만 시계만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스마트워치 보급에 따른 매출 타격은 없는 것으로 분석한다.”

- 또 한 번 전 세계를 놀라게 할 시계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나.
“개인적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시계를 만들고 싶다. 또 머지않아 누구나 우주에 갈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으로 내다본다. 섭씨 -200도에서 400도에 이르는 극한의 우주 환경을 견디는 시계도 만들고 싶다. 현재 이런 시계를 준비하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이런 시계를 만들 수 있는 소재는 없다. 다만, 신소재가 개발된다면 가장 먼저 지샥이 시계로 구현하고 싶다.”





글 이승률 기자 ujh881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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