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녀들은 담을 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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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머니 기고=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여기, 월담을 하는 여인들이 있다. 월담, 그러니까 담을 넘는 것이다. 드라마 <혼례대첩> 속 좌상 댁 둘째 며느리 정순덕, <밤에 피는 꽃> 속 좌상 댁 맏며느리 조여화에 대한 이야기다.

담이라는 것은 집이나 창고와 같은 일정한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흙이나 돌, 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경계를 가리킨다. 그러니 담이라는 것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여인이 이 담장 안 지붕 밑에 머물러야 집안이 편안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요즘 사극에서는 여인들이 자꾸 담을 넘는다. 더욱이 이들은 결코 대문 밖을 넘어서도 안 되고 바깥사람과 함부로 말을 섞는 일조차 조심스러운 과부, 즉 지아비를 여윈 사람들이다.

한데도 이들은 아무래도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어 못 견디는지 날마다 밤마다 담을 넘는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사람이 웬만해서는 알아볼 수 없는 복색으로 거리를 누비거나 지붕 위를 누빈다. 한 사람은 눈에 밟히는 인연을 이어주지 않으면 등에 가시가 돋는 <혼례대첩> 속 좌상 댁 둘째 며느리 정순덕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딱한 사람을 돕느라 날마다 밤을 꼬박 지새우는 <밤에 피는 꽃> 속 좌상 댁 맏며느리 조여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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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가 조선의 담에 갇힌 여인들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유학의 갈래를 정치 이념으로 삼아 세워진 나라다. 이 나라에 유가의 사상이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를 통치 이념으로 공공연히 내세우고 그 원리에 의한 국가를 건설한 것은 조선이 처음이다.

유가사상은 중국에서 경학(經學)이라고 불린다. 베틀의 날줄과도 같이 사회의 기준이 되는 학문, 국가 통치의 원리가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백가의 사상은 ‘제가(諸家)’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경학과 비교하자면 제가의 사상은 여러 사람들이 말한 일종의 ‘설’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이 조선이 국가 통치의 원리로 삼았던 성리학은 남송의 주희에 의해 발전한 일파다. 남송은 국가가 영토의 절반을 외적에게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난했으나, 급속한 발전으로 넉넉한 살림에 제왕과 총신들의 사치와 방종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다. 유가의 원리원칙을 고집했던 주희는 부패한 조정에서 버티지 못하고 쫓겨났고, 심산유곡에서 사학을 열어 자신의 사상을 전수했다. 조선은 이 주자의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원칙에 따른 이상국가(理想國家)를 건설하고자 했다.

원래 성리학이라는 이름은 인간의 본성(性)과 우주만물의 원리(理)를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주만물의 원리는 변함없이 정해진 것이어서 어그러지게 되면 이변이 발생한다. 인간도 우주만물에 속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원리의 핵심은 음양(陰陽), 우주만물에는 햇볕(陽)을 받은 것처럼 밝고 따뜻하고 건조한 성질을 띠는 것이 있고, 또한 햇볕을 받지 못해 그늘(陰)에 든 것처럼 어둡고 차갑고 축축한 성질을 띠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양자의 조화에 의해 이 세계는 창조되고 유지되고 변화한다.

밝고 따뜻하고 건조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성질을 띠는 것은 밖에 있고, 어둡고 차갑고 축축하며 안으로 숨는 성질을 띠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 옳다. 여인이 집 안에 있어야 모든 것이 편안하다는 관념은 그렇게 정당성을 얻었다. 그러나 <혼례대첩>의 정순덕과 <밤에 피는 꽃>의 조여화는 도무지 이 편안함에 거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을 가두는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있는 힘껏 몸부림친다. 그녀들이 월담을 하기 때문에 집안이 편안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이 월담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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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좌상 댁 과부 며느리
정순덕과 조여화는 조선의 실세라는 좌상 댁 며느리, 그것도 청상과부들이다. 유학의, 유학에 의한, 유학을 위한 국가였던 조선은 유학자들에 의한 정치 체계를 구축했고, 제왕의 독단을 막기 위해 국가의 대소사를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과 협의하도록 했다.

삼정승은 의정부의 수장이자 백관의 우두머리로서 육조의 판서와 한성부의 수장인 한성판윤, 의정부의 실무자인 좌참찬과 우참찬에 대한 인사권까지 쥐고 있었다. 삼정승 중에서도 영의정은 ‘한 사람의 아래, 모든 사람의 위(一人之下, 萬人之上)’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이지만, 정치적인 실권을 가진 벼슬이었다기보다는 학술적 명망과 인품을 중시해 결정되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반면, 좌정승은 조선 초기부터 문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를 감독하는 판이조사를 겸하는 실권자였다. 조선 전체의 인사권을 한손에 쥐고 있었으니 백관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벼슬자리를 얻고 싶은 사람들, 영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그 집 대문을 드나들었을 것이고, 그 집 며느리들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핵심부 인사들을 익히 알고 풍문의 근원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정순덕은 좌의정 집안에 남은 유일한 며느리였고, 조여화는 좌의정의 하나뿐인 아들의 부인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려야 모를 리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이라 한다. 총명하고 행동력이 뛰어나며 사리판단 분명한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자신에게 넘치도록 있는 것을 아는데 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천궁행은 유가의 제일 덕목이 아니던가.

<혼례대첩>의 정순덕은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그야말로 사랑에 미친 자다. 병약한 좌상 댁 둘째 아들을 연모해 당돌하게도 맞선이 아닌 연애를 감행했으며, 하나뿐인 딸을 과부로 늙게 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혼인을 성사시켰고, 1년 남짓 행복하지만 짧디짧은 결혼 생활 끝에 결국 청상과부가 됐다. 이제 자신은 과부가 돼 다시는 가슴 설렐 일이 없을 것이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고 믿는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인연을 엮어주며 ‘사랑의 설렘’을 이어 가기 위해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진한 화장(이라기보다는 거의 분장)을 하고 방물장수 차림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별당 담장을 넘는다.

<밤에 피는 꽃>의 조여화는 내금위의 금군이었던 오라비를 따라 무술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남달랐다. 하나뿐인 오라비는 “사내가 아니라 그 재주를 드러낼 길이 없으니 아까울 따름”이라며 “그래도 언젠가는 그 능력이 쓰일 곳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주곤 했다. 꽃신 대신 창포검을 선물로 주고 사라진 오라비를 기다리던 조여화는 결국 복면을 쓰고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돕는 의적이 돼 간다. 그녀를 아끼고 따르고 연모하며 대신 걱정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조여화는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남의 일만 걱정’하는 어이없는 사람이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저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죄인이지요. 얼굴도 모르는 지아비가 죽었다는 이유로 평생 소복만 입고 소식하며 집 밖으로도 못 나가는, 그저 지아비를 그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죄인입니다. 제가 이 죄를 씻는 방법은 결국 지아비를 따라 죽는 방법밖엔 없지요.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해 그저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 될까 봐, 살아 있는 것만으로 죄인인 내가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게도 살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복면을 쓰고 담을 넘어 딱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은 시집 문턱을 밟기도 전에 얼굴도 모르는 지아비를 잃고 망문과부가 된 그녀가 아직 살아 있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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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죽이는 마님들
미망인(未亡人), 과부를 이르는 또 다른 이름은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남편이 죽었는데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죄인이 바로 과부인 것이다. 아침에 문을 열면 흰 천이 놓여 있거나 은장도가 놓여 있거나 밥도 반찬도 들지 않은 빈 그릇들이 얹힌 소반이 놓여 있다. 온 나라 여인들의 귀감이 되기 위해, 가문의 명예를 위해 죽음을 강요받는 사람, 미망인. ‘여인의 팔자는 두루마기 팔자’라는 속담이 있었다. 사람이 가장 밖에 걸치는 의복처럼 귀한 사람을 만나면 더 비싼 차림이 되고 천한 사람을 만나면 더 값싼 차림이 되는 것이 여인의 운명임을 빗댄 속담이다.

그래서 전통사회에서는 귀한 배우자를 만나 시집을 가는 것이 여인에게 최상의 행복이라는 관념이 만연했다. 정경부인이나 정부인과 같은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도 그 자신의 재능이나 인품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남편의 출세와 명망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남편이 승진을 하면 얻었던 지위와 영예도 그가 실각을 하면 함께 사라졌다. 정순덕이나 조여화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지아비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여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정말 이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어도 쓸모가 없었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딸로 불리고, 자라서는 남편의 아내로 불리고, 늙어서는 아들의 어머니로 불리니, 이름은 본디 유명무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례대첩>과 <밤에 피는 꽃>의 여인들은 다르다. 며느리들에게는 정순덕, 조여화라는 이름이 있고, 시어머니들은 박소현, 오난경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조선은 응당 여인의 나라지요. 가문은 몇 백 년을 가는 나무와 같아서 번성하기 위해서는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뿌리를 이루는 것이 집안의 여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큰 위기가 와도 그 집안의 여인들만 똑바로 서 있으면 그 집안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 법이지요. 이것이 제가 조선을 여인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혼례대첩>의 좌상 부인 박소현은 만석꾼의 딸로 태어났다. 평범한 성균관 유생이었던 남편을 좌상의 자리에 올리고, 여동생을 입궁시켜 숙빈으로 세우고, 말썽꾸러기 남동생을 끊임없이 뒷바라지하면서 병조판서로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밤의 피는 꽃>의 호판 부인 오난경은 왕대비의 질녀로서 살아 있는 ‘내훈’이라 일컬어지며 내외명부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절 과부였던 어머니가 남몰래 낳은 이부동생, 처가 덕에 출세했으나 고마운 줄 모르고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망나니 남편, 이러저러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선왕 시해에 가담했던 과거 등 여러 가지 비밀을 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각 드라마에서 박소현과 오난경은 가문을 지키기 위해, 이제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진 ‘나’를 위해서 지아비를 죽이고 미망인이 된다.

때로는 오지라퍼가 필요하다
박소현과 오난경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그녀들은 ‘가문’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과도하게 남의 삶까지 좌우하는 오지랖을 부렸다. 그리고 그 결과 남편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아비를 죽이는 일은 현대적인 윤리에서도 용서받기 힘든 범죄이지만,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는 더더욱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지아비를 죽인다는 것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박소현은 ‘보이지 않는 뿌리’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자부심은 ‘보이지 않는’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에 방점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가문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근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뿌리에서 자라서 뻗어나간 가지가 그 가지 끝에 맺힌 열매를, 그것도 다음 세대를 키울 수 있는 귀한 열매를 베어 버렸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분노는 아버지가 아들을 벌할 수 있다는 조선의 윤리를 실행한 남편에게 향했다.

뿌리만 지키면 다시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박소현은 가차 없이 제 몸의 일부를 도려낸다. 그 명분은 가문이라는 몇 백 년 묵은 나무를 지킨다는 데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대신할 미래의 좌절에 대한 사적인 복수에 불과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화근은 그녀 자신의 도를 넘은 욕심이었다고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뿌린 씨앗은 아버지 손에 죽은 아들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저버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 나갈 며느리, 정경부인이 되느니 만석꾼 마나님이 되겠다는 꿈을 품은 딸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오난경은 수절 과부였던 어머니가 낳은 이부동생이라는 치부를 숨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망나니 남편을 골랐다. 망나니 남편의 치부를 감추고자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권력의 핵심인 좌상과 손을 잡고 선왕 시해에 동참했다. 선왕을 시해했다는 중대 범죄를 숨기느라 허울에 불과한 정부인 자리를 지키며 살아 있는 ‘내훈’이라는 자신의 가면을 유지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오난경의 남편 살해는 바로 이와 같은 가면의 파괴를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어진 질서와의 타협이 필요하다.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요구와 욕망을 100%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다. 사회 질서와의 타협을 통해 탄생하는 사회적 자아를 우리는 페르소나(가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청소년기에 형성된 자아를 중심으로 이러한 페르소나가 점차 공고해진다. 그 과정에서 페르소나가 허락하지 않는 감정이나 사고, 행위는 개인의 정신 내부에 억압돼 침잠한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에서는 그림자라고 부른다. 그림자는 무의식의 밑바닥에 억눌려 있다가 페르소나에 균열이 생길 때 갑작스럽게 뛰쳐나오기도 한다. 가면이 파괴된 오난경의 행보가 위태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미 공인된 사회적 자아가 배제한 ‘나’의 다른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본캐’와 ‘부캐’로도 불리는 멀티 페르소나가 그것이다. 좌상 댁에 청상과부 며느리였던 정순덕과 조여화는 월담을 하면 ‘중매의 신’이라 불리는 방물장수가 되고 휘영청 달 밝은 밤 한양 도성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설의 미담님’이 된다. 사실 이들이 이와 같이 월담을 하고 변신을 하는 것은 못 말리는 ‘오지라퍼’들이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월담을 하며 중매의 신으로 살아가는 정순덕에게 그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과부인 나는 이제 평생 설렐 일 없잖아요. 설레서도 안 되고.”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다른 사람 걱정만 하는 조여화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 그저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 될까 봐, 살아 있는 것만으로 죄인인 내가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것”이라고. 결국 이들의 월담은 모두와 함께 ‘살고자’ 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오지랖이 아니라 오지랖의 합리성이다.

멀티 페르소나 시대의 가능성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모든 개인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유일무이한 권리를 소유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더욱이 우리는 원하면 어느 때든 ‘단 하나의 신분’이 아닌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얼마든 드러내면서 과시할 수도 있는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적 자아와 다른 ‘나’를 억압하고 배제할 필요 없이 의식적으로 그 가능성을 시험해볼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 전체가 의식적인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시대를 ‘말세’라 부르며 걱정하지만, ‘말세’는 존재하는 가능성을 모두 펼쳐본 뒤에 내려도 늦지 않은 판단일 것이다. 수천 년 전 이집트 벽화에서도 ‘말세’에 대한 걱정은 발견되지만, 아직 우리는 어쨌든 이렇게 살아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하루하루 죽음을 강요받으면서도 ‘삶’을 결단하고 실천해 온 사람들이 있어서 조금씩 이와 같은 시대로 나아 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찬탄하고 감사한다.



글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 사진 KBS·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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