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계절의 여왕, 푸른 여신의 시즌이다. 녹음이 짙어지고 땅의 수분도 충만해져 생명의 기운이 넘친다. 신철의 그림은 사계절 중 유난히 설렘을 주는 5월에 참 제격이다.
[ARTIST] 김윤섭의 바로 이 작가 - 신철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개 둘 아니면 누군가 기다리는 한 명이다. 절제된 붓질과 색감은 짧은 시 한 편을 가볍게 읽어내듯, 주인공들의 내밀한 감성적 언어를 내비친다. 서로의 볼을 맞대고 둘만의 정감 어린 속삭임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절로 미소 짓게 된다. 사랑해요, 행복해요, 기다렸어요, 어서 오세요, 내꺼야…. 봄바람에 실려 온 연서의 세레나데가 따로 없다. 간혹 무표정에 흘깃 곁눈질하는 시선마저 밉지 않다.
“그림을 보는 이가 어린 시절 순수했던 때로 잠시 되돌아가 위로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길가에서 만난 예쁜 소녀나 연인, 서로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 혹은 중년의 남녀도 행복을 느끼는 온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행복한 순간을 옮깁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지닌 순수한 본성을 순수한 붓질에 담으려고 애씁니다.”
신철은 늘 “진정성 있는 그림을 그리면서 신뢰받는 화가로 살고 싶다”고 노래한다. 한눈팔지 않고 그림에 정직한 작가로서 바라는 꿈이다. 작품 속 단발머리 소녀는 이름 모를 소녀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누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세상의 상처받은 모든 사람을 위로해줄 이상 속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로 보이는가 혹은 떠오르는지가 더 중요하다. 제각각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와닿은 자신만의 주인공을 함께 그려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언뜻 어른동화 속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단발머리 소녀의 모티브는 신철 작가 고향인 전남 다도해의 청산도에서 시작됐다. 단발머리 소녀는 그의 외사촌 누이들이라고 고백한다. 유년 시절 청산도에서의 삶은 비교적 풍요롭고 따뜻했다.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산과 바다, 낙조가 일품인 청산도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다섯 살 무렵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그의 삶도 크게 요동쳤다.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어머니는 가정을 꾸려 나가기 위해 일터에 내몰렸다. 어린 신철도 어쩔 수 없이 친척 집을 전전해야 했다. 그런데 그곳의 이종사촌 누이들마저 녹록지 않은 삶이었다.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찍이 직업전선으로 떠밀린 이종사촌 누이들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비롯해 희생적인 삶을 강요받는 ‘숙명적 여성의 삶’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엔 남성이 주인공인 시대였다. 여성은 어디까지나 조연에 그쳤다. 그러나 빛나도록 눈부신 청산도 풍경을 배경으로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단발머리 소녀들, 적어도 그에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그녀들은 긴 세월을 넘어 지금도 화면 속에 남아 정겨운 미소를 건네고 있다. 더 이상 어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그녀들의 얼굴에서 행복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멋진 남자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듬뿍 받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됐다. 과년한 나이에도 단발머리를 고집하며 순수했던 추억을 소환해냈다.
어쩌면 신 작가의 그림은 고단한 삶으로부터의 도피처일 수도 있겠다. 삶의 여백을 품고 예술의 양지를 그려낸 그의 그림은 아름다운 삶이 완성돼 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화면 전체가 단순화된 색조로 꽉 채워졌음에도 전혀 답답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로지 여성 혹은 남녀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공간은 과감하게 허공으로 비운 덕분이다. 서양화로 구현해낸 멋스러운 여백의 미를 연출해낸 결과다. 꽃비처럼 흩날리는 여린 꽃잎들이 주인공의 설렌 마음을 대신하면서 더욱 따뜻한 기운을 북돋는다.
예술의 순기능 중 하나는 세상과 소통하는 교감의 창구를 대신한다는 점이다. 신 작가의 교감 어법은 ‘무욕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내려는 작가적 순수의지’가 아닐까. 일체 장식적 효과를 배제하고 검박한 조형적 어법만으로 슬픔과 그리움, 아련함과 애잔함을 동시에 담아낸다. 절제된 색상의 배치와 인물의 표정이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제 빛을 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평소 가벼운 산책 또는 여행, 평범한 일상에서 떠오르는 문구를 시어로 메모했다가 그림 소재로 삼는 것도 신철 그림의 특별함이다.
“내 그림을 보고 집에 가서 혼자 키득키득 웃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보람이 느껴져요. 유치한 어린애 그림인 줄 알았는데, 그 키치(kitsch) 어린 표현 속에 담긴 ‘어른을 위한 동화적 메시지’를 알아봐주기 때문이겠죠. 간혹 그림 속 주인공 모습이 자신이라고 서로 우기는 장면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오래전 한 병원 로비의 갤러리에서 전시 중 어느 환자분이 ‘내 남편이 (그림 속) 이 여자 때문에 바람났다’며, 다른 사람들 못 보게 매일 그림 앞을 가리던 에피소드는 언제나 미소 짓게 합니다.”
신 작가의 작품들은 그림보다 이야기가 먼저 보인다. 워낙 간단명료한 화법(畫法)을 사용한 덕분이다. 군더더기 없이 마음속의 이야기를 직설 화법(話法)으로 건넨다. 그러니 보는 이도 짧은 시간에 작가의 의중을 알아챈 후에 그림의 여러 조형적 요소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아크릴 물감 특유의 맑고 선명한 색조로 경쾌한 기운을 북돋아주는 느낌을 전한다. 굳이 구상이니 비구상이니, 회화적 장르가 무엇인지에 상관없이 보이는 그대로의 이야기 구조로 교감할 수 있다는 속성은 매우 큰 장점인 셈이다.
아마도 교감의 일등 공신은 누구나 간직한 ‘마음의 상자’인 기억 덕분일 것이다. 기억은 암기된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냇물처럼, 인생의 강가에 스며든 물결의 여운을 닮은 존재다. 불현듯 어느 순간에 떠오른 유년 시절 기억에 미소를 짓게 되고, 소중했던 이의 한마디에 새로운 용기를 얻기도 하며, 아프게 했던 기억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워 나가기도 한다. 퇴적된 수많은 삶의 애환은 그 다양한 기억 물결이 만들어낸 자극들의 집합체다. 신철 그림의 장면 장면은 우리의 인생극을 완성해 나가는 일기장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신철 그림의 전시 가격은 10호(53×45.5cm) 500만 원, 80호(145.5×112.1cm) 3500만 원, 100호(162.2×130.3cm) 4000만 원 선이다.
신철 작가는 1953년생으로 원광대 미술교육과, 홍익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이후 50여 회의 개인전을 통해 <기억풀이> 연작을 선보이고 있으며, 수백 회의 기획단체전에 참여했다.
글 김윤섭 예술나눔 재단법인 아이프칠드런이사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