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츠금융의 최근 행보에 투자자들이 환호한다. 지난해 ‘쪼개기 상장’이 익숙한 국내에서는 이례적으로 주력 계열사들을 상장폐지하고 지주사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한데 이어 순이익 50%를 주주에게 환원하는 과감한 변화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벅셔 해서웨이’를 꿈꾸는 조정호 회장의 리더십에 관심이 집중된다.
[대한민국 금융그룹 대해부] 메리츠금융누군가 천재는 ‘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꾸는 사람’이라고 했다. 피카소의 난해한 그림이 ‘미학’으로 관철되고, 천동설을 지동설로 입증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대표적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던 메리츠금융그룹의 파격적인 주주 환원 정책이 실현되면서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의 남다른 리더십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이른바 ‘한국의 벅셔해서웨이’를 꿈꾸는 메리츠금융은 국내 증시의 최대 화두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극복’에서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적극적인 자사주 매입·소각 등 통 큰 주주 환원 정책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지난해 4월 25일에는 조 회장이 기업승계 대신 ‘원 메리츠(One Meritz)’를 내걸고 기업 밸류업에 초점을 맞춘 그룹 지배구조의 새 틀을 짰다.
조 회장의 통 큰 결단…‘원 메리츠’로 새 출발
메리츠금융지주 아래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이 완전 자회사로 편입되고 지주만 상장사로 남는 파격적인 지배구조 개편이었다. 이는 핵심 계열사 물적 분할 등 ‘쪼개기 상장’으로 논란을 키워 온 다른 대기업들과 대비되는 행보로 한국 자본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메리츠금융그룹의 관계자는 “과거 그룹 내 3개 상장사가 있는 체제에서는 내부통제, 법규 준수 등의 이슈로 핵심 투자 기회를 놓치거나 중요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등의 어려움과 함께 계열사 임직원 간 원활한 의사소통에도 제약이 있었다”며 “‘원 메리츠’ 이후 효율적인 자본 배분을 바탕으로 사업 대부분의 권한을 계열사에 맡기고 중요한 이슈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유기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번 지배구조 개편은 조 회장의 ‘경영권 승계 포기’라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간 국내 시장에서 기업 지주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지주사를 활용한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와 승계 사례가 번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대주주들이 대부분이 지주사 지분율은 높이고, 주가는 낮게 유지하려고 노력해 온 것이 이를 방증한다.
조 회장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원 메리츠’ 통합 과정에서 자신의 지분율이 76%에서 50.21%(특수관계인 포함 시 50.49%)로 줄어드는 걸 감수하면서 “대주주의 1주와 일반 투자자의 1주는 동등한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지배구조 개편과 함께 내놓은 주주친화적인 정책도 주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2023년 회계연도부터 중장기적으로(3년 이상) 연결기준 당기순이익의 50%를 배당과 자사주 매입 및 소각 등을 통해 주주에게 환원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자사주 매입과 소각은 발행 주식 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을 증가시키는 선진화된 주주 가치 제고 방안이다. 애플, 알파벳 등 선진국 상장사들은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메리츠금융그룹은 지금까지 자사주 취득 신탁 계약을 통해 매입한 자사주는 신탁 종료 후 소각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다.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총 6400억 원어치의 자사주를 소각했고, 2023년 배당으로 총 4483억 원(주당 2360원)을 지급했다. 이러한 자사주 소각과 배당을 합친 총 주주환원율이 51%에 달한다. 가치투자와 주주행동주의로 알려진 미국 자산운용사 돌턴 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 1월 메리츠금융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주주친화적 행보를 높이 평가하는 공개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순이익 50% 주주 환원…밸류업 모범생으로
돌턴 측은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을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기로 한 경영진의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이는 사업 효율성을 높이고 이해충돌을 줄이며, 투자자들의 투자 매력을 증가시킬 것”이라며 “연결순이익의 50%를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통해 주주에게 환원하겠다는 메리츠의 발표는 경영진이 효과적인 자산 배분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최근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에 팔을 걷고 나서면서 메리츠금융의 한발 앞선 행보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지난 6월 17일 기준 메리츠금융지주의 주가는 7만4600원으로 1년 전 4만3350원 대비 72% 넘게 치솟았다. 목표주가도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 가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4개 증권사가 제시한 메리츠금융 목표주가 평균치는 올 초 6만9000원에서 최근 10만3750원(5월 16일 기준)으로 크게 뛰었다.
실적 역시 ‘맑음’이다. 메리츠금융지주는 2023년 당기순이익 2조1333억 원을 기록하면서 사상 처음 2조 원대 이익을 올렸다. 지난해 연결기준 총자산은 102조2627억 원으로, 최초로 100조 원을 돌파했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은 업계 최고 수준인 28.2%를 달성했다.
메리츠금융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 침체 등 불확실한 대내외 경영 환경 속에서도 건실한 펀더멘털과 이익 체력을 유지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핵심 자회사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 모두 안정적인 이익 창출 능력과 효율적인 비용 관리를 통해 각각 당기순이익 업계 2위를 기록하며 메리츠금융지주가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 토대가 됐다. 메리츠증권은 영업이익 기준으로는 2년 연속 업계 1위를 달성했다.
올해 1분기에도 메리츠금융지주는 연결기준 5913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2조5638억 원과 7708억 원을 기록했고, 자산 총계는 103조1047억 원, ROE는 업계 최고 수준인 24.8%로 각각 집계됐다.
‘조용한 전략가’의 대범한 인재 기용
중소형사에 불과했던 메리츠증권은 매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2022년 말 기준 영업이익(1조925억 원)과 당기순이익(8281억 원) 1위를 달성했고, 손해보험 업계 ‘만년 5위’였던 메리츠화재도 매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2019년부터 당기순이익 업계 3위로 올라섰다.
업계에서는 조 회장의 ‘인재경영’과 ‘철저한 성과주의’를 성공 비결로 꼽는다. 그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우수한 전문경영인에게 전권을 일임하고 있다.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조용히 기업을 이끄는 그에게 ‘조용한 전략가’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닌다.
조 회장의 인재경영의 특징은 전문경영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업에서 긴급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수천억 원 규모의 투자도 사후 보고로 진행된 적이 적지 않다고 한다. 또한 철저한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그룹 모든 계열사에 확실한 보상 체계를 갖추고 있다. 메리츠금융 관계자에 따르면 승진 연한이 따로 없어 계열사별로 40대 젊은 임원이 여럿이며, 회장·부회장보다 연봉이 많은 임원과 팀장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 회장은 “메리츠는 사람과 문화가 전부인 회사”라고 강조한다. 성과가 있는 곳에 파격적으로 보상하라는 그의 원칙은 메리츠가 지금의 발전을 이루는 가장 큰 토대가 됐다. 그는 이제 메리츠금융 내부를 넘어 주주들을 향한 철저한 보상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주주 환원이 더는 특별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시장의 일상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메리츠금융의 독보적인 행보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주주 환원으로 시장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지만 메리츠금융 역시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주가와는 달리, 내부통제 미흡 등 각종 악재가 발목을 잡고 있다. 메리츠증권의 경우 지난해 이화전기 거래 정지 과정에서 불거진 미공개 정보 이용 매도 의혹, IB(투자은행) 직원 불건전 영업 혐의에 이어 올해에는 전직 임원 부동산 미공개 정보 이용 매매차익 의혹, 함량 미달 보고서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내부통제 부실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잇따른 내부통제 부실·부동산 PF 등 과제
또한 지난해 파생상품 평가와 거래이익 감소 등의 영향으로 메리츠증권의 실적이 뒷걸음치기도 했다. 지난해 메리츠증권의 연결기준(잠정) 매출액은 47조4482억 원으로 전년 대비 16.8%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8813억 원으로 전년 대비 19.3% 하락했으며, 당기순이익도 59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28.8% 떨어졌다. 이는 자회사인 메리츠캐피탈의 당기순이익 감소 영향으로 업계에선 부동산 침체로 인해 실적 회복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메리츠캐피탈의 지난 3월 말 기준 1개월 이상 연체율과 요주의이하자산비율은 각 9.7%, 14%로 지난 2022년 말 이후 빠르게 악화되는 추세다. 나이스신용평가는 “2022년 이후 업권 전반에 걸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중심으로 연체율이 상승하는 추세”라며 “부동산 시장 경기 둔화에 따른 건전성 저하 위험이 확대되고 있으며, 회사는 공매 진행 등을 통해 부실여신 회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회수 대비 발생 부실여신 규모가 커 연체 자산이 증가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메리츠증권은 자산 건전성이 저하된 메리츠캐피탈 지원에 나섰다. 지난 6월 1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메리츠증권은 메리츠캐피탈이 발행하는 신주 400만 주를 취득했다. 이는 2000억 원 규모로 자기자본의 3.28% 규모다. 현재 메리츠증권은 메리츠캐피탈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어 지분율 변동은 없다.
메리츠증권은 이에 대해 “자본 확충을 통한 자본 적정성 제고 목적”이라고 밝혔다. 메리츠증권은 메리츠캐피탈 증자 참여와 동시에 3334억 원 규모 PF 관련 자산을 매입한다. 메리츠캐피탈 자산 건전성과 자본 적정성은 개선되지만 메리츠증권이 그 부담을 모두 떠안는 셈이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이번 유상증자와 자산 매각이 메리츠캐피탈 신용도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면서도 “재무 안정성 개선은 긍정적이나 최근의 자산 건전성 저하 추세가 여전히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메리츠금융이 지난해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재무 유연성이 확대된 점은 긍정적인 요인이다. 통합 전에도 각 계열사별 협업이 이뤄졌지만 자금조달 등 금융 거래는 각 계열사별 독립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통합 이후 지주를 중심으로 각 계열사들이 보다 긴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개편 과정에서 강조한 자본 배분 효율성이 높아진 셈이다. 과연, 하나된 메리츠호가 이 난제를 돌파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을지 그 결과가 주목된다.
김수정 기자
사진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