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의 개척자, 클로드 모네

그의 그림, 연작은 왜 뭉클한가.

[전유신의 벨 에포크]

클로드 모네(1840~1926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지난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에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년)이 포함된 것을 계기로, 한국의 관객들에게 모네는 <수련> 연작의 작가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 연작은 모네가 프랑스 파리 북부 지베르니(Giverny) 저택에서 연못과 수련을 주제로 그린 250점의 회화를 총칭하는데, 모네는 50대 후반부터 작고하기 직전까지 30여 년에 걸쳐 이 작품들을 제작했다.

모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인 1918년 프랑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수련> 연작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때 기증된 8점의 작품은 가로 폭이 6m에서 최대 17m에 달하는 초대형 <수련> 연작들이었고, 그가 작고한 다음 해인 1927년부터 현재까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시기 모네는 유럽과 미국에서 작품 판매가 급증하면서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말년의 모네는 이처럼 사회적 영향력까지 지닌 성공한 작가였지만, 인상주의 미술이 시작된 초기의 상황은 무척 달랐다. 20대 초반의 모네는 고전 회화의 베테랑인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 들어가 후일 인상주의 화가 동료가 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등을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1874년에는 이들과 함께 첫 번째 인상주의 미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총 65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 전시에서 유독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던 작품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였다.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을 두고 “본질 없이 흐릿한 인상만 남긴다”고 평했는데, 한마디로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그의 혹평에서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모네의 작품을 포함해 성의 없이 그린 것처럼 보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부정적인 평가도 이어졌다. “이걸 그림이라고 그렸냐. 화가 나오라”며 소리치는 관객들이 너무 많아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고, 신문에서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그림이 걸려 있어 태교에 좋지 않으니, 임산부는 관람을 금지해야 한다”는 원색적인 만평이 게재될 정도였다.

인상주의의 시초로 여겨지는 &lt;인상, 해돋이&gt;, 1872년,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인상주의 미술이 등장했던 19세기 말의 관객들은 역사나 종교적 내용을 주제로 다루면서 원근법에 기초한 밑그림과 명암법을 이용한 채색을 통해 인물과 풍경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그린 작품을 잘 그린 그림으로 인식했다. 이에 비해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주변의 풍경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주제로 하다 보니, 역사화나 종교화와 비교해 내용이 없는 그림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밑그림도 없이 캔버스 위에 바로 물감을 찍어 그리는 제작법으로 인해, 인상주의 미술은 입체감 없는 평면적인 화면과 거친 붓 터치가 그대로 드러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 당대의 비평가와 관람객들이 인상주의 미술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 인상주의 미술전은 작품 판매와 비평 어느 쪽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다음 해인 1875년에 열린 파리의 한 옥션에서는 모네의 작품이 예상치 못한 높은 가격에 판매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 옥션에서 무명 작가나 다름없던 모네의 그림을 당시로서 거금이었던 255프랑에 구매한 컬렉터는 다름 아닌 클로드 모네의 형, 레옹 모네(Leon Monet)였다. 그림을 산 뒤 다시 돌려주는 식으로 동생에게 용돈을 준 것이다. 레옹은 그 뒤로도 동생뿐 아니라 똑같이 가난하고 대책 없는 그 친구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의 작품도 수시로 구입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던 레옹은 화학을 공부한 뒤 잘나가는 스위스 화학 회사의 프랑스 지부에 취직했다. 그리고 본사의 신임을 받아 공장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모네 형제에게는 놀랍도록 색채에 민감한 눈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레옹은 물감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화학자이기도 했다. 레옹이 개발한 인공 물감은 천연 물감보다 색이 선명했고, 19세기 말에는 인상주의자의 80%가 이 물감을 사용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lt;레옹 모네의 초상&gt;, 1874년, 개인 소장


형을 따라 루앙(Rouen)에서 공장 조수로 일하던 젊은 화가 클로드는 염료 공정과 조색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 시기 클로드는 빛과 색을 연구하면서 노르망디 해안가를 주제로 한 수많은 풍경화를 그리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경험이 훗날 그가 위대한 색채의 화가로 떠오르게 된 밑바탕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사용하던 화학물질의 독성 때문에 클로드의 아들과 레옹의 딸이 연이어 사망하자 모네 형제는 이 일을 계기로 절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형인 레옹의 경제적 지원은 모네가 인상주의 그룹의 핵심적인 작가가 될 수 있는 밑바탕이 됐고,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선명한 색감이 레옹의 인공 안료를 사용한 결과임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해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에서는 레옹 모네가 그의 동생인 클로드 모네와 인상주의 미술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는 전시인 <레옹 모네>전이 개최됐다. 이 전시는 ‘위대한 미술가와 미술 운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기도 했다. 레옹 모네와 같은 컬렉터의 경제적 후원과 화학 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인공 안료의 발명이 예술가의 창조적 역량과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 모네의 작품과 인상주의 미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lt;수련, 석양&gt;, 1920~1926년,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lt;수련이 있는 연못&gt;, 1917~1920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런 저런 삶의 풍파를 겪은 50대의 모네는 지베르니에 집을 마련하고 정원과 연못을 직접 가꾸면서 이곳을 배경으로 <수련> 연작을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그는 지베르니에서 자신이 경험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색채를 통해 전하고자 했다. <수련> 연작은 그저 물에 둥둥 떠 있는 똑같은 수련을 반복해서 그린 희미한 그림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색채에서 형언할 수 없는 깊이와 감동이 느껴진다. 추상적인 회화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뭉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현대 미술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20세기 현대회화는 캔버스가 지닌 2차원의 평면성이 회화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점과 선에 비해 부차적인 요소로 여겨졌던 색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색채와 평면성이 부각된 모네의 <수련> 연작이 현대회화, 특히 추상미술의 출발점으로까지 평가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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