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판 중대재해법’ 시행 초읽기… 로펌 자문 경쟁 치열

내년 초 금융권 책무구조도가 본격 시행 된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인센티브를 내걸고 제시한 조기 제출 시한은 10월말이다. 책무구조도는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 불릴 만큼 업계 파급력이 크다.

[파이낸스]

지난 6월 금감원장과 은행장 간담회에 참석하기 전 조병규 우리은행장이 100억원대 횡령 사고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책무구조도(responsibilities map)는 펀드 불완전판매나 대규모 횡령 등 금융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한 제도다. 금융사 임원들의 책임 범위를 사전에 직책별로 누락·중복·편중 없이 분명하게 나눠 두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금융사고 발생 시 경영진에 대한 처벌 기준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난해 1월 27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처벌법)은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건설업은 공사 금액 50억 원 이상) 사업장에서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사고 예방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책무구조도는 영국 금융감독청(FCA)이 시행하고 있는 고위 경영진 및 인증제도(SM&CR)를 벤치마킹했다. ‘구조도’라는 단어에는 내부통제 ‘책무’를 직책별로 배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책무를 배분받는 대상은 최고경영자(CEO), 최고리스크관리책임자(CRO), 소비자보호총괄책임자(CCO) 등 이른바 ‘C-레벨’ 임원들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7월 공개한 ‘책무구조도 등 개정 지배구조법령 해설서’에서 “내부통제 등의 효과적인 작동을 위해선 해당 책무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감독하는 임원에게 (책무를) 배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잇따른 초대형 금융사고…관리 책임은?

최근 몇 년 새 라임·옵티머스 사태(2020년), 경남은행 3000억 원대 횡령사고(2023년), 홍콩H 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 사태(2025년) 등 초대형 금융사고가 연달아 터지자 금융사들의 내부통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보다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은 2019년 우리은행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였다.

금융감독원은 DLF 불완전판매의 책임이 손태승 당시 우리금융지주 회장에게 있다고 보고 일부 업무 정지 3개월과 문책 경고 처분을 내렸다. 금융사 임원이 문책 경고 이상의 중징계를 받으면 금융사 신규 취업이 3~5년간 제한된다. 그러나 손 전 회장은 이에 불복해 징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승소하며 회장직을 유지했다. 이를 계기로 대형 금융사고가 터졌을 때 CEO 등 경영진의 내부통제 관리 소홀 책임을 강하게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한층 거세졌다.

손 전 회장은 연임을 포기하고 지난해 3월 물러났지만, 최근 부적정 대출 의혹이 불거지며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금감원이 관련 제보 등에 따라 진행한 현장검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2020년 4월 3일부터올해 1월 16일까지 손 전 회장의 친인척과 친인척이 실제 자금 사용자로 의심되는 차주에게 616억 원 상당의 대출 42건을 내줬다. 이 중 350억 원이 대출심사와 사후관리 과정에서 통상의 기준·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금감원이 확인한 내용이다. 이외 269억 원은 지난 7월 19일 기준 부실이 발생했거나 연체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해당 의혹과 관련, “더는 신뢰하기 힘든 수준”이라며 날선 발언을 내놓고 엄정한 대응을 주문했다. 금감원으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8월 말 우리은행 사무실과 사건 관련자 주거지 등을 전격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업계에선 대형 은행들이 책무구조도를 서둘러 제출하는 등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 6월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국내 은행장 간담회에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금융사들의 책무구조도 조기 제출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위반 시 CEO 해임 요구 가능

금융사들은 임원 직책별 책무의 내용을 기술한 ‘책무기술서’와 이를 도식화한 문서인 ‘책무체계도’를 나눠 제출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이 두 가지 문서 작성의 책임을 개별 금융사의 대표이사에 일임했다. 금융사별로 조직과 업무 특성, 업무 범위 등이 상이한 점을 고려해 자율성을 부여하겠다는 취지에서다. 제재 수위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하 지배구조법)이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 대표이사 등이 지배구조법 제30조의4에 규정돼 있는 내부통제 등 총괄 관리 의무를 위반한 경우 해임 요구, 6개월 이내의 직무 정지 또는 직무를 대행하는 관리인의 선임, 문책 경고, 주의적 경고, 주의 등 제재를 가할 수 있게 했다. 책무를 배분받은 임원 역시 지배구조법 제30조의2에 따라 내부통제 등 관리 의무를 부여받고, 이를 위반할 시 제재 대상이 된다.

지배구조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기준은 여덟 가지다. 사고의 원인으로 연결되는 위법행위의 경위·정도와 관련해선 ① 관리 의무의 미이행 ② 임원 등의 지시·묵인·조장·방치 등 ③ 광범위 또는 조직적·집중적 위법행위 ④ 장기간 또는 반복적 위법행위 ⑤ 위법행위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 등을 고려한다. 실제 사례에 대입해보면 ①과 ②에 DLF 불완전판매, ③에 사모펀드 사태와 선물계좌 불법 대여 ④에 장기간 횡령 및 반복적 작업 대출, 그리고 ⑤에 모든 사고가 재발한 경우가 포함된다.

소비자 피해 규모와 연결되는 위법행위의 결과와 관련해선 ⑥ 대규모 고객 피해 발생 ⑦ 건전 경영의 중대한 저해 ⑧ 금융 시장 신뢰·질서 훼손 등을 따진다. 고객 피해가 ‘대규모’인지 여부는 ‘금융기관 검사 및 제재에 관한 규정 시행세칙’ <별표3>의 금융 업종별·위반 유형별 제재양정기준상 ‘기관경고’ 이상에 해당하는 경우로 판단한다. 이 여덟 가지 기준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해당되면 금융당국의 책임 규명 절차가 개시된다. 위법행위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당국의 검사 과정에서 임원 등의 관리 의무 미이행이 확인되면 같은 조치가 이뤄질 수 있다.

금융위원회가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과 함께 의원 입법으로 발의한 지배구조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올해 7월 3일부터 시행됐다. 금융지주사와 은행은 시행일로부터 6개월까지, 자산이 5조 원 이상인 금융투자업자와 보험사 등은 1년 이내로 책무구조도를 작성해 금감원에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당국은 제도의 조기 정착을 위해 시범 운영 기간을 뒀다.

10월 31일까지 책무구조도를 제출한 금융사들은 내년 1월 2일까지 시범 운영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기간에는 내부통제 관리 의무가 철저히 지켜지지 않았더라도 지배구조법에 따른 책임을 묻지 않는다. 시범 운영 기간 중 소속 임직원의 법 위반 내역 등을 자체 적발해 시정한 경우에도 제재를 감경하거나 면제해준다. 제도의 연착륙을 위한 일종의 인센티브인 셈이다. 금감원은 이 기간 제출된 책무구조도에 대해선 별도의 점검·자문 등 컨설팅도 제공하겠다고 예고했다.

주요 로펌 자문 경쟁 치열

4대(국민·신한·하나·우리) 시중은행을 비롯한 대형 금융사들은 연초부터 책무구조도 작성에 열을 올렸다. 새로 도입되는 제도인 만큼 업계 이해도는 낮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로펌 자문이 필수적으로 요구됐다. 제도 도입이 예고된 초기에는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등 컨설팅펌으로 자문 수요가 몰렸지만, 금융업권 전반에 대한 이해와 법률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지면서 로펌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문 비용 절감을 위해 컨설팅펌과 로펌이 짝을 지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이 가장 흔한 케이스가 됐다.

가장 앞서 나간 것으로 알려진 신한금융지주와 신한은행은 각각 법무법인 화우, 율촌과 손을 잡았다. 율촌은 최근 사고가 잦았던 우리금융지주·은행, 하나은행의 자문도 함께 맡고 있다. 국민은행을 제외한 주요 시중은행이 모두 율촌에 자문을 위탁한 것이다. 2011년 금융위 금융정책국 금융정책과 사무관으로 지배구조법 제·개정 작업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김시목 변호사(사법연수원 33기)의 ‘맨파워’가 통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2022년 8월 금융위와 금융감독원이 발족한 ‘금융권 내부통제 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에도 몸담은 이력이 있다. 율촌은 4대 은행 외에도 NH금융지주·농협은행, DGB금융지주, 메리츠금융지주 등과 줄줄이 자문 계약을 맺었다.

2020년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을 고문으로 영입한 이후 금융 업계에서 율촌의 몸값이 뛰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22년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을 특별고문으로 들인 화우 역시 ‘금융 강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우는 신한금융지주 외에 카카오뱅크에도 관련 컨설팅을 제공했다. 업계 1위인 김앤장법률사무소는 4대 은행 중 유일하게 국민은행 자문을 따냈다. 김앤장은 업계 표준 격인 은행연합회·금융투자협회 가이드라인 작업반 용역 공모에서 화우와 함께 우선협상사업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역대 최대 규모인 3000억 원대 횡령사고가 있었던 BNK금융지주와 BNK금융그룹 내 자회사들은 광장에 자문을 의뢰했다. 태평양은 하나금융지주와 케이뱅크, 토스뱅크 등을 고객사로 확보했고, 세종은 기업은행과 계약을 맺었다. 세종의 경우 컨설팅펌과의 별도 컨소시엄 없이 독자적으로 자문을 수행한 업계 첫 사례다.

금융지주사·은행보다 제출 시한 여유가 있는 금융투자업자·보험사도 일찌감치 로펌 접촉에 나섰다. 김앤장은 삼성증권과 삼성생명, 광장은 서울보증보험, 율촌은 신한금융투자, 메리츠증권·화재, 현대차증권, 미래에셋생명, 삼성화재, 현대해상, 세종은 KB증권, 미래에셋증권, 마스턴자산운용, 화우는 KB손해보험 등과 손을 맞잡았다. 업권뿐 아니라 자산 규모에 따라서도 책무구조도 제출 시기를 차등 규정한 만큼 관련 자문 수요는 당분간 계속해서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자산이 5조 원 미만인 금융투자업자·보험사, 여신 전문(자산 5조 원 이상), 저축은행(자산 7000억 원 이상)은 시행일 이후 2년, 나머지 금융사는 시행일부터 3년 이내로 당국에 책무구조도를 제출해야 한다.



주요 은행들 조기 제출할까

우리은행의 손 전 회장 친인척에 대한 부적정 대출 의혹이 불거지자 주요 은행들이 책무구조도 시범 운영에 동참할 거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 손 전 회장의 처남 김 모 씨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과 사문서 위조 등 혐의로 구속되는 등 검찰 수사에 속도가 붙고 있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이 사태와 관련, “금융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저하되는 사안이어서 매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며 압박성 발언을 내놨다. 조병규 우리은행장은 “조사 혹은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맞는 조치와 절차를 겸허하게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은행은 책무구조도 작성은 완료한 상태에서 법률적 검토 등 추가 보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와 더불어 곧 있을 국정감사, 주요 은행 차기 CEO 선임 절차 등 여러 일정을 고려해 제출 시점을 신중하게 탐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서 가장 선제적인 대응에 나섰던 신한금융지주·신한은행은 이르면 9월 중에라도 제출할 수 있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하나·농협은행 등도 잠정적으로는 조기 제출을 목표로 잡고 있다. 대부분 은행이 내달 초중순 책무구조도 내용을 최종 확정하는 이사회 일정을 잡아두고 있어 구체적인 제출 시점은 10월 중순 이후가 돼야 윤곽이 그려질 전망이다.

책무구조도는 노동계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불러온 것 못지않은 파급 효과를 낼 것으로 관측된다. 단순히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이사의 책임을 강화하고, 업무별 최종 책임자를 세세히 특정해 하부에 책임을 떠넘기지 못하도록 명문화했다는 점에서다. 다만 이 같은 제도적 보완이 실질적인 내부통제 개선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있다.

법제가 구체화될수록 금융감독의 규명 부담이 더욱 커지고, 개별 기준의 준수 여부에 대한 해석상 모호성이 근본적으로 해소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오태록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금융사고를 완벽히 예방하려면 사고 발생 확률과 손실 규모에 근거한 기대 손실은 0에 수렴하는 반면 위험 관리 비용은 상당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는 개별 금융사가 예방적 차원에서 내부통제 이행의 순기능을 체감하도록 유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장서우 한국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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