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19년…수익률 개선의 키는

퇴직연금 제도 도입,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퇴직연금은 400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연금이 되었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그 핵심은 수익률이라는 지적이다. 어떤 배경이 있는 걸까.

[커버스토리] 대개혁 시작된 퇴직연금

400조 원 ‘머니 무브’가 시작됐다. 퇴직연금 가입자가 다른 금융사의 계좌로 갈아탈 수 있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가 10월 31일 시행되면서다. 퇴직연금 사업자를 바꾸기 위해 기존에는 운용 상품을 해지해야 했다면, 이제는 투자 상품 그대로 회사만 옮기는 게 가능해졌다.

금융사들은 대규모 마케팅 공세로 ‘뺏고 뺏기는’ 경쟁을 시작했다. 고객 유치를 놓고 은행은 ‘지키기’, 증권사는 ‘뺏기’에 총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금융사로서는 매년 10% 이상 성장하는 유일한 시장, 퇴직연금이 핵심 미래 수익원이다.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연금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이제는 안정성을 넘어 수익률이 강조되는 ‘투자하는 연금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증권사 영업점에서 관계자가 퇴직연금 실물 이전 관련 홍보물을 부착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퇴직금에서 퇴직연금으로, 제도 도입 취지는

퇴직연금은 국민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해 지난 2005년 도입된 제도다. 20여 년의 역사가 쌓인 만큼, 그 사이 외형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3분기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400조878억 원에 달한다. 2030년엔 1000조 원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2050년을 전후로는 국민연금을 초과해 우리나라 최대 기금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묻어둔 돈’으로 여겨져 온 퇴직연금이 최근 주목받는 데는 늘어나는 개인투자자들이 있다. 특히 상장지수펀드(ETF) 시장 성장도 연금 자산의 ETF 투자를 늘리는 데 한 몫을 차지했다. 한편,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연금 개혁 이슈와 맞물려 사적연금의 선진화 논의가 커지고 있다. 실물이전으로 진입 장벽 하나가 걷히면서, 퇴직연금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적 성장 이면에는 오랜 기간 풀지 못한 과제가 있다. 바로 저조한 수익률이다. 지난 10년간 연평균 가입자 수익률이 2%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미국, 캐나다의 7%와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퇴직연금은 개인연금과 달리 가입 여부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고용주에게 법정 의무를 부여해, 매년 연봉의 한 달치(8.3%)를 자동 적립해야 하는 구조다. 원하든 원치 않든 연봉의 일부가 따박따박 쌓이고 있는 만큼, 퇴직연금의 노후 소득 보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짚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퇴직연금 도입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근로자의 수급권 보호를 강화하는 데 있다. 우리나라는 퇴직연금 제도 도입 이전부터 오랫동안 퇴직금 제도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퇴직금 제도만으로는 중소·영세 기업이 갑작스럽게 도산할 경우 근로자가 퇴직금을 전혀 받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회적 협의를 거쳐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외적립’을 의무화한 것이 퇴직금 제도와의 가장 큰 차이다.

퇴직연금은 크게 확정급여(DB)형, 확정기여(DC)형, 개인형퇴직연금(IRP)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퇴직연금 도입 당시에는 DB가 주를 이루었다. 외형상 퇴직금 제도와 유사하게 설계해 기업이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사외적립 의무 비율은 점차 늘어나 이제는 100% 사외적립이 요구된다. 그러나 여전히 퇴직금을 기업의 운영 자금으로 써 왔던 일부 영세 기업 입장에서는 사외적립이 재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퇴직금과 퇴직연금으로 ‘이원화’돼 있는 제도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나오지만 강제하지 못하는 이유다.




퇴직연금 제도를 둘러싼 세 가지 문제

실제 퇴직연금 가입률은 근로자 수 기준으로는 50%를 육박하지만, 사업장 수 기준으로 보는 도입률은 아직 26.8%(2022년 말 기준)에 머무른다. 대기업의 가입이 대다수인 결과다. 아직 우리나라 전체 기업의 70% 이상이 퇴직금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중소·영세 기업 근로자의 수급권 보호가 제도 도입의 목적이라면, 실제 수급권 보호는 받는 곳은 중대 사업장으로 중소·영세 사업장의 근로자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이 퇴직연금 시장의 중요한 과제로 지적된다.

퇴직연금을 둘러싼 비판적 표현으로 “퇴직연금은 퇴직도 아니고 연금도 아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퇴직이 아니라는 것은 ‘중도 누수’를, 연금이 아니라는 말은 ‘일시금 지급’을 뜻한다. 퇴직연금의 중도 누수는 제도의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꼽힌다. 중도 누수는 다시 중도인출과 중도해지로 나뉜다. 중도인출은 근로자 개인의 사유로 인해 적립금을 인출해 사용하는 것이다. 중도인출보다 큰 문제로 지적되는 건 중도해지다. 말 그대로 제도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퇴직연금 자산의 약 4%가 매년 중도 누수되고 있다. 강성호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도 누수가 없다면 현재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50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계된다”며 “퇴직연금은 노후를 위한 자산이기 때문에 이직하더라도 중간에 해지하지 않고 장기 투자로 수익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퇴직연금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호주는 퇴직연금 계좌의 ‘연속성’을 엄격히 보장하고 있다. 근로자가 퇴직 시점까지 계좌를 해지할 수 없도록 제도를 설계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개인 계좌가 아닌 기업 계좌 기반으로 운영되며, 그 안에 개인이 지분을 갖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게 바로 IRP 계좌다. 퇴직 시 IRP 계좌로 DC 적립금을 이전하고, 최종적으로 모든 계좌의 적립금을 통합해 연금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근로자가 이직할 때마다 IRP 계좌가 해지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퇴직연금 일시금 지급 문제는 소득 대체율과 직결된다. 퇴직연금 제도는 수급권 보호라는 협의 아래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다층 연금 체계’에서 퇴직연금만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다층 연금 체계는 1층 국민연금, 2층 퇴직연금, 3층 개인연금으로 구성되며, 이를 통해 전체 합산 소득 대체율이 퇴직 전 소득의 최소 60%에 도달하도록 설계된 구조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이 40%의 소득 대체율을 제공한다면, 퇴직연금은 20%, 추가적인 개인연금은 10~20%를 더 해 보완한다. 일시금으로 지급될 경우, 매년 받는 연금(annuity)이라는 뜻이 희석되고 소득 대체율의 의미도 사라진다. 종신연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10년, 20년 연금으로 받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금화 이슈이자, 세 번째 과제다.

이 세 가지 이슈가 해결될 때, 비로소 제도 본연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연금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나 정책 방안으로 문제를 풀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법적 강제다. 그러나 국민연금과 달리 퇴직연금은 사적연금의 성격을 띠고 있어 개인의 재산권 침해 이슈가 불거질 수 있다. 그다음은 세제 개편을 추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도인출을 할 경우, 기존에 면제받았던 세금을 다시 부과하는 방안 등이 논의될 수 있다. 현재는, 중도인출이나 일시금 수령이 연금과 비교해 큰 불이익이 없다. 그러나 퇴직연금과 관련해서는 세제 혜택이 상당하며, 소득 역진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세제 패널티는 개인에게 큰 부담을 줄 수 있어 쉽게 도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도 일원화, 중도 누수, 연금화 등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수익률 제고에 있다. 즉, 퇴직연금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현재의 저조한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데 있다는 결론이다.

수익률이 다른 저축 수단보다 높다면 법적 강제나 세제 혜택 없이도 자발적으로 퇴직연금이 양적·질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 실사례가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제도다. 호주의 퇴직연금은 연간 7~8%대 안정적인 수익률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근로자들이 별도의 상품에 가입하기보다 개인연금도 퇴직연금 계좌에 추가 납입하는 형태를 선호한다.

지난 10월 31일부터 시행된 실물이전 제도도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위한 조치에 해당한다. 금융사의 경쟁을 유도해서 수익률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정부 정책도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 등 최근 몇 년간 퇴직연금 관련 정책들은 대부분 수익률 제고를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면, 현재 수익률이 저조한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한 마디로, 원리금 보장형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적립금을 운용하지 않고,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퇴직연금 적립금 400조 원 중 약 80%가 예금으로 대표되는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다.

원리금 보장형이 대다수인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퇴직연금의 짧은 역사에서 투자로 성공한 경험이 부족한 까닭이다. DC형은 운용 지시를 개인 가입자에게 맡기고 있는데, 직장 가입자들은 바쁜 업무로 인해 적극적인 투자 관리가 어렵고, ‘하이 리스크’를 감당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사업자가 전화로 운영 지시를 요청하면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계속해서 원리금 보장형을 유지하게 된다.

실효성 없는 디폴트옵션…원리금 보장형이 약 90%

호주나 미국에서 7~8% 수익률을 기록하는 배경에는 금융시장 외에도 제도적 차이가 있다. 핵심 키워드는 디폴트옵션, 타깃데이트펀드(TDF), 기금화로 요약된다. 호주 근로자들도 직접 연금 자산을 운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온 게 디폴트옵션이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이 원리금 보장형에 편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개인이 특정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았을 경우 적정 수준의 위험으로 수익률 관리를 한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7월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해 제도 시행 1년이 지났다.

그런데 디폴트옵션의 현주소는 매우 다르다. 호주의 경우 DC형 가입자의 약 70%가 디폴트옵션을 통해 운영하며, 디폴트옵션만으로 매년 적정 수익률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여러 제약으로 인해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 결과, 디폴트옵션 가입자의 90%가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했다. “운용 상품을 선택하지 못하는 근로자를 위해 도입된 제도가 디폴트옵션인데, 디폴트옵션의 내용을 다시 선택하라고 하는 기형적인 모양새”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의 키워드는 간접투자이며, 진정한 의미의 간접투자는 디폴트옵션”이라고 강조했다.

퇴직연금의 ‘지배구조’도 꾸준히 제기되는 이슈다. 퇴직연금의 지배구조는 크게 ‘계약형’과 ‘기금형’으로 나뉜다.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제도는 계약형 지배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계약형 지배구조는 기업이 외부 금융기관과 위탁 계약을 체결해 적립금 운용 등 업무를 처리한다. 반면, 기금형 지배구조는 사용자로부터 독립된 기관을 설립해 퇴직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구조다. 수탁법인 내에는 기금 운영위원회가 있으며, 운영위원회를 통해 전문적인 자산 운용과 관리가 이뤄진다. 여러 기업이 공동으로 수탁법인을 설립·운영할 수도 있다.

호주는 대표적으로 기금형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게 특징이다. 남 연구위원은 “기금형 내에서는 디폴트옵션 등 다양한 정책 수단들을 좀 더 쉽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기금화와 관련해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퇴직연금의 기금화를 통한 국민연금 직접 운용이다. 퇴직연금을 기금화해 국민연금공단에 사업자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으로 찬반 논쟁이 뜨겁다. 국민연금은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5.7%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운용에 참여할 경우, 투자 실패 시 연금 체계에서 1층과 2층이 동시에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 금융사 퇴직연금 담당자는 “기금화보다는 디폴트옵션 제도를 잘 활용하는 쪽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현실적”이라며 “현 상황에서 기금화는 오히려 가입자를 혼동에 빠트리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입 1년을 넘긴 디폴트옵션 제도를 잘 정착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라는 주장이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높은 비중은 사업자의 책임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특히 보험사의 입장에서 원리금 보장형 상품이 안정적인 수익을 제공하는 ‘캐시카우’에 해당한다. 다만 최근 퇴직연금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금융사들도 수익률 개선을 주요 과제로 추진하는 점은 고무적으로 평가된다.

TDF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의 퇴직연금 제도인 401K의 경우 디폴트옵션의 약 80%가 TDF 상품이다. TDF는 투자자 연령과 퇴직 시기를 고려해, 젊은 때는 고위험·고수익 상품에 비중을 두고 퇴직 시기가 다가올수록 점차 저위험 상품으로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TDF는 사업자의 역량이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실물이전을 계기로, TDF 수익률이 곧 금융사의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미국의 경우 사용자가 운용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한 점도 주목해볼 대목이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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