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Anicka Yi)는 일반적이지 않은 도구를 사용한다. 박테리아, 냄새, 튀긴 꽃, 낯선 기계들. 그리고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냄새도 함께한다. 그러나 이에는, 이유가 있다
[아트]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던 오래전 일이 특정 냄새를 맡으면서 영화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그 반대든, 우리는 자주 냄새를 통해 과거와 마주한다.
아니카 이의 전시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이 열리는 리움 입구로 들어서면 퀴퀴한 냄새가 관람객을 맞는다. 마치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전시가 펼쳐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냄새는 당연하게도 의도된 것이다. 아니카 이는 오래전부터 “권력에는 냄새가 없다”는 말을 반복해왔다. 권력과 냄새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이 단어들은 그녀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저는 1970년대 미국 남부에서 이민자 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나이에 눈에 보이는 인종 차별뿐 아니라 문화와 환경적 차별도 경험했죠. 예컨대 김치처럼 향이 강한 음식을 먹는 건 ‘서구인의 감각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공공연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인 공간을 중시하는 미국 문화에서, 이 냄새는 ‘깨끗한 공기와 사적 영역을 침해하는 독성 물질’로 여겨졌죠. 저는 뉴욕에 살면서 매년 여름, 특히 8월이면 차이나타운의 음식 냄새와 쓰레기 문제에 대한 불평을 들었습니다. 반면 맨해튼 중심가의 공사 현장과 유독한 페인트 냄새는 문제가 되지 않았죠.”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그는 냄새가 특정 집단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방식을 직접 경험했다. 작가가 감각과 냄새에 주목하게 된 이유다. 냄새는 단순한 생리적 감각이 아닌, 사회적·정치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후각의 정치학을 파헤치다
이번 전시에서 아니카 이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냄새를 통한 후각의 정치학, 미생물 및 인공지능(AI)과의 공생이다.
아니카 이가 가장 첨예하게 파고드는 건 후각의 정치학이다. 후각이 어떻게 사회적·문화적·정치적 권력 구조에 의해 조건화되는지 탐구하는 것이다. 냄새나는 백화점이나 기업 대표의 집무실이 없는 것처럼, 후각은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녀가 줄곧 강조하는 “권력에는 냄새가 없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좋은 냄새도 있지 않느냐’고? 물론이다. 하지만 향기와 냄새는 다르다. 향기가 화학적으로 정제된 판타지라면, 냄새는 실제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향수 산업이 어느샌가 진부하고 뻔한 향기만 생산하고 있는 것과 반대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 계급이 뿜는 냄새는 점점 다양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샌가 이런 다양한 후각 경험을 제한당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당신이라면 육체 노동자의 땀 냄새를 맡아본 기억이 꽤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계급의 사람이 아니라면 서로의 냄새를 맡을 기회도, 이유도 없다. 영화 <기생충>의 유명한 라스트 신은 냄새가 계급인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니카 이가 주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닌 것들과의 공생
아무리 깨끗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 해도, 그 속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박테리아와 균류가 있다. 심지어 우리 위장과 혈액 속에도 대장균을 비롯한 많은 미생물이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조 개의 미생물과 공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는 박테리아를 배양하는 작품(<또 다른 너>)도 있고, 꽃을 튀긴 다음 박테리아로 인해 부패해가는 모습을 전시하는 작품(<절단>)도 있다. 이는 관람객과 작품의 상호작용이다. 이 전시를 관람하는 당신은 옷에 붙은 미생물 일부를 작품에 전달하고, 동시에 전시장 안에서 호흡하며 작품이 지닌 미생물 일부를 몸에 묻혀간다. 전시장을 방문하는 것 자체로 생물학적 공생의 영역에 접어드는 것이다.
공생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기계와 AI로 이어진다. 전시장에 매달린 해파리 같은 형상의 기계 작품(<전류를 발생시키는 석영>)은 광섬유로 만든 표면을 따라 빛이 깜빡거리며 내부의 기계장치가 드러난다. 이 작품은 5억 년 전 처음 등장한 단세포 플랑크톤의 형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아득히 먼 과거에 나타난 플랑크톤을 100여 년 전 처음 등장한 기계공학적 언어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생명과 기술의 경계를 흐리며 진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영상 작품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는 말하자면 영생에 대한 것이다. 작가가 축적해둔 데이터를 AI에게 훈련시키고, AI가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작가가 사망해도, 혹은 인류 문명이 사라진다 해도 클라우드와 전력만 있으면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이 창조되는 셈이다(이는 최근 AI 미디어 아티스트로 각광받는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작품과도 일견 겹친다).
그러니 아니카 이의 작품은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무기체,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끊임없이 흐린다. 그녀의 세계에서 미생물과 기계, AI는 인간과 대립하는 타자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호흡하고, 진화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동반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이번 전시 제목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이라고 모호하게 남겨둔 것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또 다른 진화를 위해서는
해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니카 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항상 어떻게든 ‘벗어나는’ 작품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서거나, 돌연변이를 일으키거나, 붕괴를 일으키는 그런 작품 말이죠.”
아니카 이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작가가 아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아티스트로 데뷔했다. 이런 독특한 이력이 오히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실험을 가능케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감각의 위계에 도전하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공생 단계로 넘어갈 것을 제안한다. 이는 미술 영역을 넘어 인류학적 통찰로 확장되며, 인간이라는 종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녀가 생각하는 미래가 그렇게 긍정적인 것 같진 않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게 뭐냐”는 질문에 아니카 이는 이렇게 답한다.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지, 무엇이 필요할지 궁금해요. 아마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수도 있겠죠. 저 개인적으로는 디스토피아적 결말에 더 가까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 이기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