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만찬] 김경선 여성가족부 차관, "매사 열정있는 사람 돼야" "현모양처가 아닌 내 이름 석자로 살고 싶었다"

-세종시 아파트 분양권 포기 “아쉽다기보다 잘한 결정이라 생각”

-어린 시절부터 확고했던 자의식 “현모양처가 아닌 내 이름 석자로 살고 싶었다”

-대학생 때는 기자가 되고 싶어 언론고시를 준비하기도

-공직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청렴’, 필요한 역량은 ‘조직 내외 관통하는 커뮤니케이션 스킬’

-청년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매사 집요하게 임해야”



[PROFILE]
김경선 여성가족부 차관
1969년생
2020.09 ~ 여성가족부 차관
2019.09 고용노동부 기획조정실 실장
2018.10 고용노동부 노동정책실 근로기준정책관
2017.02 고용노동부 고용정책실 청년여성고용정책관
2016.01 고용노동부 고용정책실 노동시장정책관
2014.03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상임위원
2012.01 고용노동부 대변인
2011.12 대통령실 국정기획비서관실 선임행정관
2010.08 고용노동부 노사정책실 노사협력정책과장
2008.03 고용노동부 노사협력국 노동조합과장
2006.08 고용노동부 여성고용팀장
2004.08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 파견
1991 제35회 행정고시 합격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로스쿨 석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학과 석사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학사
영주여자고등학교 졸업

[한경잡앤조이=김병일 편집장 / 장예림 인턴기자] 김경선(52) 여성가족부 차관은 고용노동부에서 28년간 노동정책 전문가로 공직생활을 이어오다 올 9월 여가부 차관으로 영전했다. 여성고용과 노사관계 등의 노동정책 수립 최일선에 있었던 김 차관은 ‘가족돌봄휴가’와 ‘배우자 출산휴가’ 등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 차관은 1969년 경북 영주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영주여고를 거쳐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 정책학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로스쿨을 거쳐 서울대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행정고시(35회) 합격 후 줄곧 고용노동부에서 근무했던 김 차관이지만 그에게 여성가족부는 그리 낯선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 2004년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으로 파견 근무를 했던 김 차관은 당시 고용평등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 등 여성 고용과 관련한 정책 수립에 앞장선 이력이 있다. 또 남녀 간의 고용차별을 없애기 위한 법안 마련에도 일조했으며, 2017년에는 고용노동부 청년여성고용정책관을 지내기도 했다.

28년간 노동정책 전문가로 공직생활을 보낸 그는 이제 ‘젠더이퀄리티’(성평등)를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다. 11월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경선 여성가족부 차관을 만나 그의 공직생활과 걸어온 길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학창 시절이 궁금하다. 어린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또래에 비해 자의식이 강한 여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윤리 수업 시간 글짓기를 했던 게 떠오른다. ‘나’라는 주제의 작문 과제가 주어졌다. 그 당시만 해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다'라는 인식도 꽤 있었다. 반면에 나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내 이름 석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작문에도 이 내용을 반영해 썼다. 성별에 맞춰 저의 가능성을 국한하지 않고 ‘나’로서 성장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양친은 경북 영주에서 농사짓던 평범하고 성실하신 분들이셨다. 부친께서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셨고 다소 엄한 부분이 있었지만, 형제들에게 차별은 않으셨다. 저는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전체적으로 명분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분위기였다. 자손이 있는 한 제사를 계속 모시도록 하는 불천위(不位) 제사를 지낼 정도로 집안이 유교적이고 명예도 중시했다."

어릴적 장래희망은 무엇이었나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진로교육이 활성화 돼 있지 않았던 시기라, 특별하게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보지는 못 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한평생 제가 판검사나 공무원이 되길 원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만해도 공직자가 되어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은 없었기에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서울대 영문학과에 진학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줄곧 언론인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아나운서 시험도 치렀다고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내 방송국 아나운서로 지원해 면접을 봤는데 떨어졌다(웃음).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나운서는 떨어졌지만 기자직으로 붙었다는 걸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았다. 이후 언론고시 스터디도 꾸준히 하고, 신문도 많이 읽으면서 언론고시 공부를 했었는데 그냥 신문 읽는 건 재미 있어도 매번 발제를 해가는 게 부담이 되더라. 아마 당시 학내 방송국원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면 지금쯤 언론인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언론인을 꿈꾸다가 공무원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된 계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1991년 2월 김경선 차관(왼쪽 두번째)과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기들.(사진 제공=김경선 차관)


대학시절 기억에 남는 써클활동이 있다면
“영문과 학회활동을 참 열심히 했다. 학부 선배들의 지도 아래 영미문학을 공부하고 발표하는 활동을 했었는데, 그 때부터 여가부에 올 운명이었는지 페미니즘 문학에 대해서 많이 다뤘다. ‘제인에어’나 ‘테스’ 등의 작품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들이 재미있었고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행정고시에 빨리 합격했다고 알고 있다
“수험생활을 1년 반 정도 했으니, 빨리 합격한 편에 속한다. 비결이라고 특별한 건 없는 것 같다. 노력도 했고, 운도 많이 따라준 덕분이 아닐까. 시험과 관련해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시험 직전에 바꾼 선택과목 ‘사회정책학’에서 최고득점이 나왔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이 고시 공부를 하던 당시 남자친구이자 지금 남편의 책에서 본 개념이 그 해 당락을 가르는 서술문제로 나왔던 것이다. 운이 좋았다.”

△1992년 행정고시35회 중앙공무원 연수원에서 김경선 차관(가운데)과 그의 동기들.(사진 제공=김경선 차관)
최근 세종시 아파트 분양권을 포기해서 화제가 됐다
“세종시 이전기관 소속 공무원에 대해서는 세종시로 주거를 이전하라는 취지로 특별분양형태로 분양권을 추첨에 의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단순 추첨제라 당첨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 저는 운좋게 당첨이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인기지역이었다. 하지만 최근 세종시 이전 기관 직원 특별분양제도에 대한 특혜논란이 일부 제기되었고, 제가 여가부로 오게 되면서 세종시 거주 필요성도 없어져서 최종적으로 포기하게 됐다.”

아쉬운 점은 없는지
“물론 분양권을 포기할 경우 계약금까지 물어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공직을 통해 일정 보수 이상의 혜택을 보는 것은 오랜 마음의 짐이 될 것 같아 과감히 포기했다.”

포기 결정에 시아버지 조언의 영향이 컸다고
“그렇다. 시아버님은 방수제 제조 시공업체를 설립해 운영해 오시다가 지방의회 개회 시부터 서울시 시의원을 하시고 나중에 시의회 의장과 국회의원을 하셨다. 15년의 의정활동 기간동안 개인 사업의 막대한 경제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나 서울시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계약은 일절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서울시 사업등록을 자발적으로 취소하셨다. 시아버님이 이번 분양권을 두고 이 말씀을 하시며 공직자로서 가장 큰 덕목은 ‘청렴’이라고 강조하셨다. 저도 포기하고 나니 아쉽다기보다 잘했다고 생각한다.”

고위공직자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많은 역량들이 요구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현직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역량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아닐까 싶다. 법안을 만들고, 예산을 집행하는 데에 있어 이해관계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득하는 과정은 필수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나 사업의 필요성을 잘 설명하고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중간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고위직 공무원 시험을 볼 때 역량 테스트로 면접관이 공격적인 질문을 하기도 한다.”


△1992년 행정대학원 야간반 MT에서 김경선 차관(가운데)과 그의 동기들.(사진 제공=김경선 차관)


여성가족부는 어떤 부서인가
“적지 않은 분들이 여성가족부는 여성만을 위한 부서라고 오해하시는데, 여성가족부는 결코 여성만을 위한 부서가 아니다. 사회의 최종 목표인 양성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부서라고 볼 수 있다. 여성가족부의 영문명도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부는 특히나 타 부처와 협력할 일이 굉장히 많다. 우리만의 힘으로는 양성평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 경제, 고용 등 모든 부문에서 노력을 해가야 한다. 앞으로도 다양한 정부기관들과 함께 서로 협업하고 연계하며 양성평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갈 것이다.”

공직생활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면
“제가 공직생활의 대부분을 고용노동부에서 보냈는데 사무관 때 공정거래위원회에서 1년 정도 근무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공정거래위원회에는 여자사무관이 전무했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여자사무관도 주말 일직으로 당직을 했는데 공정거래위원회를 갔더니 당직을 면제를 해주더라. 제가 이상해서 저도 당직으로 하겠다고 했더니 그 당시 운영지원과에서 굳이 안 해도 되는데 왜 하려 하냐고 오히려 당황해하더라. 여자라고 일부러 배려해 준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저는 여자라고 일부러 봐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기회를 주는 것이 오히려 형평에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여성을 배려한다고 하면서 더 중요한 기회에서 소외하는 것은 결코 여성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아실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존경하는 분이나 멘토가 있나
“제가 사무관 때 모셨던 두 분의 국장이 있는데, 그 두 분을 참 존경했다. 두 분의 결은 사뭇 달랐는데 한 분은 원칙적이고 강직한 분이셨고, 다른 한 분은 후배들에게 정도 많고 업무에 대한 열정이 강하신 분이었다. 멘토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이 있다기보다 수년간 공직생활을 하며 만난 한 분 한 분 모두가 저에게 멘토이다. 좋은 리더십은 하나로 규정돼 있다기보다 자기 고유의 결을 찾아서 그 결을 잘 발전시키는 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무도 제각각의 고유한 결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청년들에게 조언을 하자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한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열정이 없으면 가장 편한 직업이 공무원이다. 공무원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 이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를 스스로 깊게 고민해 보고 마음 속에 새기길 바란다. 또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다면 끝까지 파고들길 바란다. 스스로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매사에 집요하게 임하길 바란다.”

kbi@hankyung.com
[사진=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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