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청춘만찬] 조희진 1호 女검사장 “학교서 얌전치않아서인지 미,미,우… 화나서 전 과목 100점 받아버렸죠”
입력 2018-06-29 03:02:00
수정 2021-05-04 17:00:39
CEO의 청춘만찬
△ 국내 1호 여성 검사장 조희진 전 검사장을 6월27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매거진 회의실에서 만났다.
사진=서범세 기자
[PROFILE]
조희진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7부 부장검사
제29회 사법시험 합격
고려대학교 법학 학사,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블루밍턴캠퍼스 대학원 법학과 석사
[캠퍼스 잡앤조이=이도희 기자] ‘국내 첫 여성검사장’은 조희진(56)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을 늘 따라다니면서도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식어다. 삼대독자 오빠에 딸 넷 집 막내로 태어난 조 전 검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남성우월주의’의 한 복판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리천장'을 하나 하나 깨부수는 작업을 이어온 그는 지난해 7월, 여검사로서는 최초로 검찰총장 물망에까지 올랐다. 올 1월에는 ‘미투’의 시작점이 된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건 진상조사단장을 맡으며 피의자를 불구속기소했다.
6월 27일, 주말을 빼면 퇴임 나흘째라는 조희진 전 검사장을 만났다. 정장 차림에 책가방을 멘 채 등장했다. 가방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만화책 <신의 물방울>. 주인공들이 최고의 와인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약 30년 법조 외길인생을 걸어온 그와 만화책이 언뜻 연결이 되지 않았다. 조 검사장은 “책 안의 세밀한 감정표현들이 오랫동안 터프한 삶을 살아온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며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감성적인 것이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덧붙여서, “책 어딘가에 나오는 와인평 ‘휴가지에서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마시는 샴페인의 맛’을 언젠가는 꼭 느껴보고 싶다”는 게 그의 작은 소망이다.
- 검사로서의 꿈을 키운 건 정확히 언제인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장래희망을 써야했는데 뭐가 좋을지 몰라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네가 호랑이 띠니 판사가 돼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그냥 ‘법관’이라고 쓴 게 어떻게 보면 시작이었다.”
- 검사는 사명감이 가장 중요할 텐데, 원래부터 사회에 관심이 많았나.
“어린 시절, 서울 성북동에 살면서 정릉의 고려중학교를 다녔다. 산을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넘어가면 20분이 걸리는데 평지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1시간 이상이 필요했다. 당시 구두를 신고 다녀야했기에 대부분 학생이 버스를 탔는데 나는 빙 돌아가고 싶지 않아 산길을 택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나처럼 산을 타는 친구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버스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오가는 거라 했다. 그때 처음 빈부격차의 무서움을 알게 됐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교실에서 찍은 사진.
- 어릴적 어떤 환경에서 자랐나.
“우리 집이 맨 위 오빠에 밑에 딸만 넷이다. 오빠는 삼대독자라 거의 모든 지원이 오빠에게 집중됐다. 당시는 학교에서도 남녀차별이 심했다. 공부를 곧잘 해 부회장을 했는데, 회장은 무조건 남학생의 몫이고 여학생은 부회장 후보에만 나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여고였는데 학교가 청결을 매우 중요시해서 모든 학생이 매일같이 머리 스카프와 에이프런(apron)을 걸치고 청소를 해야 했다. 또 신발주머니를 꼭 가지고 다니면서 실내에서는 반드시 실내화로 갈아 신는 등 규율이 엄격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고정된 성역할분담을 강조하던 때였기에 나도 모르게 남녀차별적인 상황을 겪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딸들의 꿈을 지지해주셨다. 아들이 귀한 집에 시집 와 여성의 권리가 누구보다 박한 것을 체감하면서 늘 '여자도 강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 고교시절 방과 후 자습시간. 맨앞줄 왼쪽이 조희진 전 검사장.
- 원래 리더십이 있고 적극적인 성격인가.
“마냥 얌전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던 기억이 많이 나는 걸 보면. 예전 한국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여성에게 원하는 참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욕심도 많고 자기주장도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그런 여학생은 학교에서 크게 예쁨(?)받지 못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당시는 평가가 주관적이었는데 분명 열심히 공부했는데 수가 하나도 없고 우나 미가 많았다. 너무 화가 나서 3학년 때는 아예 전 과목을 다 100점을 받아버렸다. 그 뒤로 선생님들도 조금씩 내 실력을 인정해줬고 자신감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는 전교 합창대회 지휘도 맡았다.”
△ 고교 합창대회에서 지휘하는 모습.
- 대학시절은 어땠나.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만 했고 거의 아웃사이더가 됐다. 다행히 1학년 때 4.5점 만점에 4.0점을 받으면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고시준비는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가 3학년 2학기, 1차 시험 발표가 났는데 평범했던 동창들이 합격한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본격적으로 독서실을 다니며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했다. 이듬해, 1차 시험에 붙었다가 2차 시험에 떨어졌다. 그래서 2차 시험만 열심히 팠다가 다음해엔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답안 제출 전 한 문제가 갑자기 긴가민가 해 답을 바꿨는데 그것 때문에 한 개 차이로 불합격한 것이다. 정말 괴로웠다. 그 뒤로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로 보이고 누가 옆에서 공부하면 견딜 수 없게 피곤했다.”
△ 대학 1학년 때 학과 동기들과 고려대 잔디밭에서.
- 어떻게 극복했나.
“돌파구를 찾던 차에 오빠 내외가 외국 단기연수 갈 일이 생기면서 자청해서 조카를 돌보기로 했다. 공부는 일절 내려놓고 아기만 보고 집안일만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치유가 됐다. 시험 6개월을 남기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한 덕에 그해 1, 2차에 동시 합격했다.”
- 시보(연수원생)로서의 첫 출근 소감은 어땠나.
“첫 출근지가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방검찰청)이었다. 출근길에 막 정문을 들어서는데 갑자기 호송차가 눈앞에 떡 서더니 그 안에서 줄줄이 포승줄에 묶인 피의자들이 나왔다. ‘아 이제 드디어 실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뛰었다.”
- 검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법연수생 2년차 때 4개월 검찰 실습, 2개월 변호사실습, 6개월은 법원실습을 거친다. 법원에서는 형사, 민사 사건을 경험하긴 하는데 현직 판사들이 많이 개입하지는 않는다. 출근하면 판결문을 읽어보는 정도? 그런데 검찰실무에선 시보가 직접 수사하고 기소도 할 수 있다. 지도검사가 봐주고 결재도 받는다. 그렇게 직접 현장에 부딪히니 검사가 가장 흥미로와 보였다. 실제로 검찰에는 다양한 사건이 쏟아진다. 또 검찰은 법무정책이 많이 이뤄지고 조직이 크기 때문에 역량만 되면 경험할 수 있는 분야도 많다. 지루할 새가 없는 다이내믹한 직장이다. 다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웃음).”
- 1호 여검사 선배로서, 후배 검사들에게도 조언을 해 달라.
“이제 평검사는 여성이 더 많다. 특수부도 여검사가 많고 시보 들어오는 것을 봐도 여검사가 많다. 성별은 더 이상 장벽이 되지 않는다. 다만 체력은 길러야 한다. 사건 하나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흔적을 꼼꼼하게 챙겨가며 보고 또 보고 하는 힘든 과정이 필요한데 집요하게 파고들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 만약 검사가 안 됐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종군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종군기자 출신 소설가인 존 스타인벡의 인생에 큰 감명을 받았다. 특히 고립된 전쟁터에서는 기자의 역할이 극대화되지 않나. 하지만 친분 있는 사회부기자들을 보니 저녁 퇴근시간도 일정치 않고 힘들어 보이더라. 검사하기를 잘한 것 같다.(웃음)”
- 향후 계획은.
“퇴직 후 주말을 빼면 이제 나흘째다. 주변에서 ‘뭐할 거냐’ ‘여행은 어디로 가냐’고 궁금해 하시고 심지어 ‘어느 나라가 좋다더라’고 추천까지 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물론 지금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점은 정말 좋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고 싶지 않다. 법조인의 가장 큰 무기는 실무능력이다. 변호사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거나 내 전문성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예정이다.”
tuxi0123@hankyung.com
△ 국내 1호 여성 검사장 조희진 전 검사장을 6월27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매거진 회의실에서 만났다.
사진=서범세 기자
[PROFILE]
조희진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장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7부 부장검사
제29회 사법시험 합격
고려대학교 법학 학사,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블루밍턴캠퍼스 대학원 법학과 석사
[캠퍼스 잡앤조이=이도희 기자] ‘국내 첫 여성검사장’은 조희진(56)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을 늘 따라다니면서도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식어다. 삼대독자 오빠에 딸 넷 집 막내로 태어난 조 전 검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남성우월주의’의 한 복판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리천장'을 하나 하나 깨부수는 작업을 이어온 그는 지난해 7월, 여검사로서는 최초로 검찰총장 물망에까지 올랐다. 올 1월에는 ‘미투’의 시작점이 된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건 진상조사단장을 맡으며 피의자를 불구속기소했다.
6월 27일, 주말을 빼면 퇴임 나흘째라는 조희진 전 검사장을 만났다. 정장 차림에 책가방을 멘 채 등장했다. 가방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만화책 <신의 물방울>. 주인공들이 최고의 와인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약 30년 법조 외길인생을 걸어온 그와 만화책이 언뜻 연결이 되지 않았다. 조 검사장은 “책 안의 세밀한 감정표현들이 오랫동안 터프한 삶을 살아온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며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은 감성적인 것이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덧붙여서, “책 어딘가에 나오는 와인평 ‘휴가지에서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마시는 샴페인의 맛’을 언젠가는 꼭 느껴보고 싶다”는 게 그의 작은 소망이다.
- 검사로서의 꿈을 키운 건 정확히 언제인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장래희망을 써야했는데 뭐가 좋을지 몰라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는 ‘네가 호랑이 띠니 판사가 돼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그냥 ‘법관’이라고 쓴 게 어떻게 보면 시작이었다.”
- 검사는 사명감이 가장 중요할 텐데, 원래부터 사회에 관심이 많았나.
“어린 시절, 서울 성북동에 살면서 정릉의 고려중학교를 다녔다. 산을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넘어가면 20분이 걸리는데 평지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1시간 이상이 필요했다. 당시 구두를 신고 다녀야했기에 대부분 학생이 버스를 탔는데 나는 빙 돌아가고 싶지 않아 산길을 택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나처럼 산을 타는 친구들을 만났는데 대부분 버스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오가는 거라 했다. 그때 처음 빈부격차의 무서움을 알게 됐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교실에서 찍은 사진.
- 어릴적 어떤 환경에서 자랐나.
“우리 집이 맨 위 오빠에 밑에 딸만 넷이다. 오빠는 삼대독자라 거의 모든 지원이 오빠에게 집중됐다. 당시는 학교에서도 남녀차별이 심했다. 공부를 곧잘 해 부회장을 했는데, 회장은 무조건 남학생의 몫이고 여학생은 부회장 후보에만 나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여고였는데 학교가 청결을 매우 중요시해서 모든 학생이 매일같이 머리 스카프와 에이프런(apron)을 걸치고 청소를 해야 했다. 또 신발주머니를 꼭 가지고 다니면서 실내에서는 반드시 실내화로 갈아 신는 등 규율이 엄격했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고정된 성역할분담을 강조하던 때였기에 나도 모르게 남녀차별적인 상황을 겪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딸들의 꿈을 지지해주셨다. 아들이 귀한 집에 시집 와 여성의 권리가 누구보다 박한 것을 체감하면서 늘 '여자도 강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 고교시절 방과 후 자습시간. 맨앞줄 왼쪽이 조희진 전 검사장.
- 원래 리더십이 있고 적극적인 성격인가.
“마냥 얌전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 전축을 틀어놓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던 기억이 많이 나는 걸 보면. 예전 한국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여성에게 원하는 참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욕심도 많고 자기주장도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그런 여학생은 학교에서 크게 예쁨(?)받지 못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당시는 평가가 주관적이었는데 분명 열심히 공부했는데 수가 하나도 없고 우나 미가 많았다. 너무 화가 나서 3학년 때는 아예 전 과목을 다 100점을 받아버렸다. 그 뒤로 선생님들도 조금씩 내 실력을 인정해줬고 자신감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는 전교 합창대회 지휘도 맡았다.”
△ 고교 합창대회에서 지휘하는 모습.
- 대학시절은 어땠나.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만 했고 거의 아웃사이더가 됐다. 다행히 1학년 때 4.5점 만점에 4.0점을 받으면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고시준비는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가 3학년 2학기, 1차 시험 발표가 났는데 평범했던 동창들이 합격한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본격적으로 독서실을 다니며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했다. 이듬해, 1차 시험에 붙었다가 2차 시험에 떨어졌다. 그래서 2차 시험만 열심히 팠다가 다음해엔 1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답안 제출 전 한 문제가 갑자기 긴가민가 해 답을 바꿨는데 그것 때문에 한 개 차이로 불합격한 것이다. 정말 괴로웠다. 그 뒤로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로 보이고 누가 옆에서 공부하면 견딜 수 없게 피곤했다.”
△ 대학 1학년 때 학과 동기들과 고려대 잔디밭에서.
- 어떻게 극복했나.
“돌파구를 찾던 차에 오빠 내외가 외국 단기연수 갈 일이 생기면서 자청해서 조카를 돌보기로 했다. 공부는 일절 내려놓고 아기만 보고 집안일만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치유가 됐다. 시험 6개월을 남기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한 덕에 그해 1, 2차에 동시 합격했다.”
- 시보(연수원생)로서의 첫 출근 소감은 어땠나.
“첫 출근지가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방검찰청)이었다. 출근길에 막 정문을 들어서는데 갑자기 호송차가 눈앞에 떡 서더니 그 안에서 줄줄이 포승줄에 묶인 피의자들이 나왔다. ‘아 이제 드디어 실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뛰었다.”
- 검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법연수생 2년차 때 4개월 검찰 실습, 2개월 변호사실습, 6개월은 법원실습을 거친다. 법원에서는 형사, 민사 사건을 경험하긴 하는데 현직 판사들이 많이 개입하지는 않는다. 출근하면 판결문을 읽어보는 정도? 그런데 검찰실무에선 시보가 직접 수사하고 기소도 할 수 있다. 지도검사가 봐주고 결재도 받는다. 그렇게 직접 현장에 부딪히니 검사가 가장 흥미로와 보였다. 실제로 검찰에는 다양한 사건이 쏟아진다. 또 검찰은 법무정책이 많이 이뤄지고 조직이 크기 때문에 역량만 되면 경험할 수 있는 분야도 많다. 지루할 새가 없는 다이내믹한 직장이다. 다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웃음).”
- 1호 여검사 선배로서, 후배 검사들에게도 조언을 해 달라.
“이제 평검사는 여성이 더 많다. 특수부도 여검사가 많고 시보 들어오는 것을 봐도 여검사가 많다. 성별은 더 이상 장벽이 되지 않는다. 다만 체력은 길러야 한다. 사건 하나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흔적을 꼼꼼하게 챙겨가며 보고 또 보고 하는 힘든 과정이 필요한데 집요하게 파고들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 만약 검사가 안 됐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종군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종군기자 출신 소설가인 존 스타인벡의 인생에 큰 감명을 받았다. 특히 고립된 전쟁터에서는 기자의 역할이 극대화되지 않나. 하지만 친분 있는 사회부기자들을 보니 저녁 퇴근시간도 일정치 않고 힘들어 보이더라. 검사하기를 잘한 것 같다.(웃음)”
- 향후 계획은.
“퇴직 후 주말을 빼면 이제 나흘째다. 주변에서 ‘뭐할 거냐’ ‘여행은 어디로 가냐’고 궁금해 하시고 심지어 ‘어느 나라가 좋다더라’고 추천까지 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물론 지금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점은 정말 좋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고 싶지 않다. 법조인의 가장 큰 무기는 실무능력이다. 변호사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거나 내 전문성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예정이다.”
tuxi0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