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은 재료를 탓하지 않는다...‘200원짜리 모나미 펜’ 그림 장인

좋은 물감이 없어서 그림을 못그린다? 이승섭 일러스트레이터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다. 재료가 없으면 먼지 쌓인 벽에도, 석탄재 위에도 그림을 그리면 되는 거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장인의 모습이 아니던가.
△ 이승섭 일러스트레이터 (사진=서범세 기자)
이승섭(25, 상명대 시각디자인 3) 씨가 그림 장인으로 거듭날 수 있던 팔할은 칭찬의 힘이었다. 유치원에서 크레파스로 그려온 개구리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고 칭찬하는 엄마의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틈만 나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 씨의 장래희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언제나 ‘화가’였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제 그림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당시 저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미술반이었는데, 미대는 수능 과목 중 수학을 반영하지 않는 학교가 많아 수학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거든요. 그 시간에 매일 수학책에 낙서를 했죠. 그 낙서가 제 그림 실력에 많은 도움이 됐답니다.(웃음)”
△ 막노동을 하며 그린 그림
그림을 사랑한 미대생, 전국 공사판 누비는 막노동꾼 되다 수학 시간에 갈고 닦은 그림 솜씨로 상명대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한 그는 마음껏 그림을 그리며 즐거운 학교생활을 즐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등록금’이라는 벽이 놓여있었다.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 씨는 연세가 지긋하신 부모님께 대학 등록금 때문에 손을 벌리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이제 성인이 됐으니 등록금 정도는 직접 마련해보자’는 대견한 결심을 했다. 방법은 장학금을 타거나,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모으는 것. 장학금을 받는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으나 공부에는 도통 자신이 없었다. 안 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는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를 둘러봤다. 그런 이 씨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목돈 마련’이 가능하다는 ‘막노동’이었다.
△ 막노동 하던 자신의 모습을 그림 일기로 표현
“대학 입학 전에 잠깐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손님을 대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더라고요. 방학에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것도 힘들고요. 몸이 좀 피곤하더라도 일자리도 많고 일당도 센 막노동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공사판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이 씨는 방학 내내 땀을 흘리며 등록금을 모았다. 1학년 1학기 여름방학을 시작으로 매번 방학이 돌아오면 목장갑을 끼고 공사판으로 향했다. 요령을 피우지 않고 묵묵히 일을 잘하다보니 막노동팀의 팀장 눈에 들어 ‘에이스’로 발탁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굳이 일을 찾지 않아도 방학이면 자연히 팀장의 호출을 받고 막노동 현장으로 출동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씨는 보령, 평택, 이천, 춘천, 송탄, 화성 등 전국을 순회하며 노동의 기쁨을 만끽했다.
△ 막노동 현장에서 벽에 있는 먼지를 이용해 그린 그림
△ 사포 위에 그린 그림

군 생활 편하게 만들어준 기특한 모나미 펜 주머니는 날로 두둑해졌지만 마음 속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방학이면 컴퓨터 학원도 다니고, 영어 학원도 다니고, 여행도 가는데 혼자만 공사판으로 향하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기도 하고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그를 위로한 것은 그림이었다.
“피곤하고 힘든데도 일이 끝나면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어요. 막노동을 할 때는 일하는 사람들과 숙소 생활을 했거든요. 다들 피곤하니 10시면 잠자리에 드는데, 이불 속에서 몰래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곤 했죠. 공사판에서 잠시 쉬는 시간이 생기면 벽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 그림을 그리고, 바닥에 쌓인 잿더미 위에도 슥슥 낙서를 했죠. 처음에는 아저씨들이 무시하는 말투로 ‘괜한 짓 하지말라’고 했지만 그림을 보면 반응이 달라지더라고요. 나중에는 다른 일꾼들에게도 ‘얘는 그림 그리는 애’라고 소개할 정도였죠.”
막노동을 하며 벽에 묻은 먼지로, 바닥에 쌓인 재로 그림을 그린 그는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 입대 후에는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사람들이 무시하던 200원짜리 ‘모나미 펜’으로 그려낸 그림이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 모나미 펜으로 그린 그림
군 입대 후 그림에 목말라 있던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흔하디 흔한 모나미 펜 한자루였다. 이전에는 연필이나 4000~5000원 상당의 일본제 볼펜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군대에서는 원하던 재료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모나미펜은 ‘볼펜 똥’이라 불리는 잉크 뭉침 현상이 있어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재료다. 이 씨 역시 한 번도 모나미펜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지만 당장 그릴 재료는 그것뿐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볼펜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하루는 선임이 ‘시각디자인 전공이면 그림을 잘 그릴테니 나도 한 번 그려봐라’라는 거예요. 풍자적으로 선임을 그려냈는데 다들 ‘너무 닮았다’, ‘너무 잘그린다’며 감탄했죠. 그때부터 전역 때까지 모든 선임들의 얼굴을 다 그렸어요. 선임 한 명이 그림을 SNS에 올린 뒤에는 부사관, 장교들도 찾아와 그림을 부탁했죠. 군대에 국회의원 등의 높은 분들이 방문하면 캐리커쳐를 그리는 업무(?)까지 맡게 됐어요. 훈련 중에도 그림 그리러 파견을 가고요. 힘들다던 군 생활이 모나미 펜 하나로 편해졌답니다.”
△ 모나미 펜으로 그린 그림
장인은 재료를 탓하지 않는 법 그때부터 그의 애정템 1순위는 모나미 펜이 되었다. 직접 사용해 그림을 그려보니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의외의 장점도 많았다. 연필과 사용감이 거의 비슷한데 번짐이 없고, 얇은 펜과 달리 명암 조절이 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볼펜 똥을 수시로 닦아줘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가성비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쯤은 감수할 수 있는 불편이었다.
△ 이승섭 일러스트레이터 (사진=서범세 기자)
모나미펜으로 그린 그림은 SNS에서 엄청난 반응을 얻기도 했다. 200원짜리 싸구려 펜으로 그린 것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퀄리티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극사실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 씨는 동물이나 영화 주인공의 모습을 주로 따라 그렸는데 그 정교함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림 하나를 그리는데 며칠이 걸릴 때도 있어요. 하지만 오래 걸리는 작품을 할 때가 더 즐겁더라고요. 그림을 마무리할 생각이 하루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거든요. 특히 동물 그림을 그릴 때는 털이나 가죽 등을 표현하기가 까다로운데 뭔가 특별한 도전을 하는 것 같아 더 설레죠.”
△ 이승섭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 일기
최근 이 씨는 모나미펜 그림에 이어 ‘그림일기’를 지속적으로 SNS에 업로드하고 있다. 자신의 하루를 한 컷의 일러스트로 남기는 작업이다. 이 씨를 꼭 빼닮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러스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호평을 받고 있다.
“그림일기를 그릴 때 사용하는 마카는 친누나가 대학생 때 사용하던 거예요. 무려 10년 전에 구매한 것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는 문제가 없답니다.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꼭 좋은 재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장인은 재료를 탓하지 않는 법이죠!”
글 박해나 기자 phn0905@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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