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놈·슬픈 놈·이상한 놈: 나의 수능 썰.ssul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 날이 다가온다. 이제는 대학생이 돼 푸는 수능 에피소드는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몇 년이 지나도 생생한 기쁜, 슬픈, 그리고 조금 이상한 수능 날.
이미지출처=한경DB

① 기쁜 놈- “엄마, 나 모의고사 하나 치고 나온 기분이야.”
수시준비 없이 준비한 수능은 3년을 쏟아부은 전부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작은 일에도 긴장을 잘했기 때문에 수능 당일에는 분명 손까지 덜덜 떨 정도로 긴장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갈 때도, 시험지를 받을 때도, 심지어 시험을 칠 때도 수능이란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엄마 얼굴을 봤을 때 처음 한 말 역시 "엄마, 나 그냥 모의고사 하나 치고 나온 기분이야."였다. 사람이 너무 큰일에는 긴장조차 못 한다는 말이 맞았다.
사실 드라마 같은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친구 A를 도와줬던 일이다. 친한 친구 중 나랑 A만 다른 시험장으로 배정이 됐다. 더구나 같은 교실이어서, 서로 손을 잡고 건투를 빌었다.
그런데 언어영역이 끝나자 A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울고 있었다. 시간 계산을 잘 못 해 지문 2개를 읽지도 못하고 날렸다는 것이다.
vector hand drawn cartoon characters -

다들 다음 과목을 준비하고 있어 교실은 조용했고, 이대로 A를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데려가 세수도 시키고 물도 먹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쉬는 시간이 끝났다.
다음날, 친구는 내게 먹을 것을 내밀며 고마움을 전했다. A는 언어를 망쳤지만, 그래도 간호학과에 가 지금은 진짜 간호사가 됐다. 아직도 수능 날 이야기만 나오면 고마워하는 A 덕에 수능 날의 기억은 약간의 뿌듯함도 섞여 있다.
② 슬픈 놈- 수시,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수능 일주일 전, 모든 수시가 떨어졌다. 평소 수능 공부를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처음 맛보는 격한 실패감과 함께 수능이 코앞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Sad young woman in the night city.

수능 당일에 어떻게 시험을 봤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수리 시간이 끝나고 먹었던 도시락은 떠오른다. 속이 안 좋아질까 걱정하며 엄마가 내내 고민해서 싸준 반찬들이었다.
또 한 가지 서러웠던 기억은 마지막 시험시간 때. 분위기 좋은 곳에 배정받기 위해 제2외국어를 신청한 애들이 많았다. 아랍어 같은 것을 신청해놓고 서둘러 교실을 떠나기 일쑤. 시험 시작 30분도 안 돼서 절반이 없었고, 해도 슬슬 지고 있었다. 다들 끝난 기분을 만끽할 텐데 나와 몇몇만이 남아 필사적으로 문제를 풀고 있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수능이 끝나고 엄마가 사준 맥주를 마시며 ‘취중채점’을 했다. 항상 잘 봤던 언어영역도 최악이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능 날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 생각했던 나는 수시 추가합격생이 됐고, 이제는 ‘시조새’로 불리는 고학번이 됐다. 뻔한 얘기일 수 있지만,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큰 실패감은 멘탈을 단단하게 해준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소중한 기억이 됐다.
③ 이상한 놈- 뜻밖의 목욕탕 데이
Vector art: towel icon isolated on neutral background.

수능 전, 수시가 붙은 나는 조금 남다른 수능 날을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험장 대신 대중목욕탕에 간 것이다. 그래도 인생에 한 번 있는 수능이라는데 갈지 말지 고민이 됐지만, 남들이 다 할 때 안하는 쾌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 시간 목욕탕은 한산했고 나이 많은 분들만 있었다. 친구들은 이 시간에 열심히 시험을 친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수업을 몰래 빠진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갔으면 수시 붙은 거 아는 친구는 괜히 나 때문에 심란했을 거야.’ 탕에 앉아 멍 때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나름의 자축도 했다. 수시 준비를 하면서 고생한 스스로에 대한 격려였다.
친구들의 수능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고사장에 가보기라도 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뉴스에 나오는 수능 날의 모습은 내게 낯설다. 앞으로도 나에게 수능 날은 목욕탕이 연상될 듯하다.
김민경 인턴기자 apeac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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