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4월 이야기


누군가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였을 때
9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영화 <4월 이야기>가 무척이나 특별하다. 일본에서는 1998년 상영됐지만, 한국에서는 이와이 ?지 감독의 전작 <러브레터>(1995)가 1999년 11월 정식개봉한 뒤인 2000년 4월(당연하게도!) 개봉됐다.

<러브레터>의 여운이 너무나 대단해서이지 당시 이 영화에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러닝타임도 67분으로 단편영화에 가까웠고, 대단한 스토리전개도 없었다.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유학 온 대학 신입생의 4월(일본의 신학기는 4월에 시작된다) 일상을 잔잔하게 그렸을 뿐이다. 일반적인 러브스토리라면 남녀 주인공이 만나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이 ‘기·승·전·결’ 중 ‘승’은 될 텐데, 이 영화는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만나는 시점, ‘기’ 정도에서 끝나버리는 게 아닌가.

올해 그냥 4월이 돼서 다시 한 번 영화를 봤다. 오! 놀라워라. 이 영화는 일반적인 스토리가 주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의 감정의 크기, 그 자체로 ‘기·승·전·결’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극세사 내면 탐구 영화가 있다니!

주인공에게 ‘무사시노(武?野)’는 사랑과 동의어다. 고등학교 때 짝사랑한 선배가 도쿄도(東京道) 무사시노시(市)에 있는 무사시노대(大)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사시노>라는 소설을 읽고, 무사시노대에 진학하고, 무사시노도(圖) 서점을 들리고, 무사시노자(座)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선배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무사시노도 서점을 네 번째 들렀을 때 선배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음에 다시 들러”라고 했을 때 그녀의 감정은 절정에 다다른다. 망가졌지만 선배가 줬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우산으로 빗물을 튕겨내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었다. 그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설레는 순간이.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모든 사물에 그(그녀)가 깃들어 있음을 느끼는 때가. 누군가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였을 때 말이다.
<4월 이야기> 주인공들이 만약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그 우주는 쪼그라들어 블랙홀이 됐을 지도 모른다. 아예 처음부터 두 사람이 맺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선배에게 주인공은 팬레터를 보내는 많은 여자후배 중의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처음 느낀 그 우주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것이 감독이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이 맺어졌든 아니든 상관없는 오로지 나만의 우주로 남았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우주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우주를 경험하는 것은 젊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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