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Q열전]명랑청년 '허길슨'을 아시나요?


'허길슨' 권혁일 씨 모습. 사진 = 권혁일 제공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들의 넋두리 중 하나는 ‘군대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전히 목이 마르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시기, 국가를 위해 헌납한 파란만장 군대체험기를 나누고 싶고, 인정받고 싶을 터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속 꿈의 군대이야기가 아닌 진짜 군대이야기 말이다.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본 한 남자가 있다. 바로 ‘허길슨’ 권혁일 씨다. 이제는 구독자 중 절반이 여성이라는 그만의 특별한 콘텐츠 메이킹 스토리를 따라가 봤다.
“시작은 아주 작은 차이를 발견하는 것”머리부터 발끝까지 레트로 힙합 느낌이 줄줄 흐르는 혁일(26) 씨는 동그란 안경 속 눈웃음이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흡사 패션에디터의 포스까지 묻어나는 그가 패션과는 다소 거리가 먼 군대이야기를 30회 넘게 연재했다는 것이 의외일 정도. 심지어 인터뷰 동안 그는 군대보단 연애 이야기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낭만파였다. 이런 혁일 씨가 군대를 주제로 콘텐츠를 시작한 건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고집하면서부터다.
“제대 후 지난해 2월 네이버 트렌드 리포터 5기에 무턱대고 도전했어요. 솔직히 제가 남들보다 월등하게 뭘 잘하거나 특별한 취미를 가진 것도 없었거든요. 그저 힙합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에 관심이 있던 정도죠. 그래서 큰 기대 없이 지원했는데 정말 운 좋게 합격한 거예요. 기뻤어요. ‘허길슨’이란 필명은 제 이름 혁일을 느슨하게 풀어낸 예명이죠. 하지만 리포터 활동을 시작하고 첫 5개월 동안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이유는 간단했어요. 저만의 확고한 주제가 없었던 거죠. 그저 남들과 비슷한 주제로 두루뭉술하게 기계적으로 포스팅을 하다 보니 콘텐츠의 경쟁력이 없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 역시 당시엔 큰 재미를 못 느낀 것 같아요. 아쉬운 시간들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혁일 씨는 회의시간에 블로그나 포스트 공간에 남자들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실제로 블로그 이용자들 상당수가 여성들이라고 한다. 때문에 콘텐츠 대부분이 여성들이 관심이 갖는 뷰티, 대중문화, 데이트 장소 등에 쏠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여성중심이 아닌 남성들의 구미를 당기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조금은 특별했던 자신의 군대경험을 글과 그림에 녹여내기로 결심했다. 단, 오버와 허세는 금물! 제목도 담백하게 달았다. ‘어차피 군대얘기’ 군필자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흔하디흔한,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군대시절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반응은 첫 회부터 뜨거웠다. 군필자들의 격한 공감이 쏟아졌다.
혁일 씨의 네이버 포스트 '어차피 군대얘기' = 권혁일 제공

“군복무를 육군5사단 수색중대에서 GP(휴전선 감시초소)경계근무를 섰어요. 휴전선에서도 북측 초소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남다른 경험들도 더러 했어요. 그런데 어디에 소속되건 군대는 힘든 건 매한가지죠. 그래서 뭔가 거창한 군대이야기보다 군인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상이나 감정들을 떠올렸어요. 실제로 제가 연재하자마자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게 첫 회였어요. ‘훈련병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란?’ 제목의 포스트였죠. 보기를 제시했어요. 1번. 전역한 복학생 선배, 2번 곧 전역하는 말년 병장, 3번 빌게이츠. 하지만 답은 따로 있죠. 바로 이등병이에요. 사회에서는 그저 생고생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이등병조차 훈련병일 땐 선망의 대상이거든요.(웃음) 첫 회 연재 이후 반응이 바로 왔어요. 군필자들의 공감 댓글이 쏟아졌어요. 대부분 ‘ㅋㅋㅋ’였죠. 저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냈다는 것도 만족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제 콘텐츠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게 가장 짜릿했어요.”
여성들도 보게 된 군대이야기첫 회부터 ‘홈런’을 날린 혁일 씨는 지난해 7월부터 8개월 간 총 31편의 ‘어차피 군대얘기’를 연재했다. 그 사이 그의 포스트를 구독하는 팔로어만 1만5000명을 넘어섰고, 매회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흥미로운 점은 연재 초·중반까지만 해도 남성독자들의 일방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의 포스트에 여성들의 방문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 연재 말미에는 여성독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특히,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고무신 족’들의 반응이 터진 것이다.
“고무신족 분들이 제 콘텐츠를 통해 간접적으로 위로도 받고, 남자친구에게 추천도 해주신다고 했을 때 뿌듯했어요. 사실 제 콘텐츠가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닌데 자신들 얘기처럼 공감하시고, 즐거워해주시는 것에 감사했죠. 물론, 아주 간혹 악플도 몇 건 있었어요. ‘군대를 희화화하지 마라’ ‘너가 군대에 대해 뭘 아느냐’ 등의 악플이었죠. 그래도 크게 개의치는 않아요. 모두가 제 생각과 똑같을 순 없잖아요. 되레 악플도 관심의 일부라 생각해요.”
사진 = 권혁일 제공

혁일 씨의 ‘어차피 군대얘기’는 지난달 31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끝냈다. 독자들의 아쉬움이 댓글 곳곳에 새겨있었다. 하지만 그의 포스트는 아직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꿀 떨어지는 연애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현재 자신이 가장 즐겁고, 빠져있는 것이 연애라고 말하는 그는 그 소소한 감성을 수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공감하고 싶다. 이런 그가 꿈꾸는 미래는 무엇일까.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행정학과를 전공하고 있어요. 이제 4학년이라 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취업걱정도 하고,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하나 고민이 많죠. 요새 그런 걱정들로 잠 못 이루는 날도 있어요. 다만, 예전부터 정장차림을 꼭 해야 하는 일터에선 일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패션도 저만의 개성인데 정장에 갇히고 싶진 않거든요. 앞으로 제가 만들 콘텐츠도 마찬가지에요. 솔직히 지금은 딱히 뭘, 어떻게 해야겠다고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어떤 방식이 됐든 저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을 수도 있지만 제 목표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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