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Q열전] '캘리툰을 아시나요' 캘리툰 작가 박솔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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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박솔빛 제공

“셰익스피어 이후 모든 서사문학은 모방의 연속이다.” 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비단 문학뿐일까. 디지털 기술도 더 이상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기 힘들 정도로 모방제품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문학이든 기술이든 사람들이 열광하는 콘텐츠의 근간에는 ‘시대정신’이 배어있다. 껍데기는 모방일지라도 그 속살이 시대와 소통하는 감성으로 채워진다면 새로운 작품으로 평가될 만하다. 캘리툰이란 개념을 만들어낸 박솔빛(25)씨는 현 시대 청춘들의 감성을 읽는 눈이 유독 반짝이는 예비 아티스트다.
외모는 풋풋한 여대생 그 자체였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얼굴 위로 내려뜨린 검은 긴 생머리가 청순한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연 솔빛 씨는 때론 거친 랩(rap)을 즐겨 부르고, 생활력이 강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그 밑바탕에는 특이한 가족사가 있었다.
“외가 쪽이 예술분야에 몸담고 계세요. 할아버지는 동양학자이자 화가시고, 어머니도 동양미술을 하셨죠. 때문에 남들보다 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미술을 전공할까 생각했지만 틀에 맞춘 미대입시는 제게 맞지 않았어요. 제가 미술을 직업으로 삼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미술은 취미로 하되, 저만의 콘텐츠를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써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경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어요. 학과 수업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다보니 글쓰기 실력은 물론 세상을 보는 관점도 커졌어요.”

솔빛 씨의 캘리툰 작품. 사진 = 박솔빛 제공

예술계 금수저? 스스로 500만 원 벌어 자취방 마련
국문학도지만 솔빛 씨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은 ‘그림’을 빼놓고 말하기 힘들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교내외 그림그리기 대회를 싹쓸이했고, 팔로어 1만7000명이 넘는 그의 네이버 포스터와 수많은 대외활동, 공모전 속에서 늘 그림이 등장했다. 학창시절 혹자는 그의 수상 배후에 가족력이 작용하지 않았냐는 질투어린 시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솔빛 씨 자신은 ‘금수저가 결코 아니다’고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가 동양미술을 하시지만 사고방식은 서구식 ‘개인주의’에 가까우세요. 학교문제로 서울에 집을 구해야 했을 때 어머니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어요. 돌아오는 답은 ‘네가 살 곳이니 네가 정하라’였어요. 결국 혼자 발품을 팔아 고시원에 들어갔다가 500만 원을 모아 자취방으로 옮겼죠. 늘 그렇게 살아왔어요. 예전에 어머니와 둘이서 유럽여행을 갔을 때도 더치페이를 했을 정도라니까요.(웃음)그래도 불만은 없어요. 오히려 제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원동력에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제 인생은 제가 책임져야죠.”
솔빛 씨의 캘리툰으로 제작된 달력. 사진 = 박솔빛 제공

10대 시절 내성적이었던 솔빛 씨는 대학에 들어가면 새로운 세상이 기다릴 것 같았지만 입학 후 한 달 만에 그 환상은 깨졌다. 대학도 현실일 뿐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다녔다. 힙합동아리도 가입하고, 여행도 수없이 다녔다. 포털 사이트 대학생 에디터, 잡지 모델 등등 굵직한 대외활동 경험도 열손가락을 훌쩍 넘긴다.
뿐만 아니라 기업으로부터 외주를 받아 로고나 제품을 디자인하기도 수십여 차례.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내성적이던 그의 성격도 점차 외향적으로 바뀌었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공감능력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여기에 3년 전 캘리그라피 수업을 접하며 솔빛 씨에겐 또 다른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원래 캘리그래피에 관심이 많아 원데이 클래스를 수강했죠. 당시 선생님이 캘리그래피는 형식보다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그날 수업 이후로는 독학으로 저만의 글씨체를 만들기 시작했죠. 저만의 글씨체가 완성될 무렵 문득 글씨와 함께 그림을 넣으면 어떨까 싶었어요. 캘리툰(캘리그래피+카툰)의 탄생인거죠. 아직 사전에는 등록되지 않았지만 제가 처음 만든 개념이랍니다.”
캘리그래피와 카툰 합쳐진 ‘캘리툰’ 인기
이때부터 솔빛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캘리툰’을 일기처럼 올리기 시작했다. 특별하진 않지만 작품 하나하나, 꾹꾹 담긴 그녀의 감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손실하지 않기 위해 아직도 100%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아무리 도구의 기술이 발전해도 종이 위에 퍼져나가는 물감의 퍼짐, 손끝에서 묻어나는 잔상들까지는 담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솔직히 제 그림실력이 미술전공자들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부족하죠. 또한, 컴퓨터로 그리면 수정하기도 쉽고, 단시간에 더 정교한 묘사를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수작업으로 하는 게 여전히 좋아요. 그래야만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들을 오롯이 표현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투박할지라도 저만의 느낌이 묻어나는 작품이야말로 진짜 제 것이라 할 수 있잖아요. 그리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제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시는 것도 이런 제 마음이 전달된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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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툰 폰케이스. 사진 = 박솔빛 제공
이런 솔빛 씨의 노력으로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의는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아직은 자신의 미래를 100% 확신하지 못하는 청춘일 뿐이다. 그래도 솔빛 씨는 걱정하지 않는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해보자는 근성이 그의 몸속 구석구석 박혀 있기 때문이다.
“저도 취업준비를 아예 안 하지는 않아요. 영어점수도 따보려고 했고, 학점관리도 하고, 대외활동도 많이 했죠. 그런데 당장 뚜렷한 목적 없이 취업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전 아직도 대학생으로서 하고 싶은 게 정말 많거든요. 웹 마케팅도 배우고 싶고, ‘광수생각’하면 만화가 박광수 작가를 떠올릴 만큼 자기색깔이 분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이후에는 미래의 후배들을 돕고 싶고요. 그러려면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감이 살 돈이 없으면 우선 간장이라도 풀어서 그리려는 근성의 끈을 놓지 않을 겁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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