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러브레터-‘오겡끼데스까’가 그런 뜻이었다니

내 인생의 영화: 러브레터‘오겡끼데스까’가 그런 뜻이었다니

설 연휴를 맞아 16년 만에 다시 <러브레터>를 보게 됐다. 묻어둔 첫사랑을 가끔 떠올리며 미소를 짓듯, 이 영화를 언제고 다시 한 번 보리라고 생각만 하던 중, 우연찮게 추억의 창고에서 파일을 끄집어냈다. 두 번째 본 <러브레터>는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로 다가왔다. 본래 영화라는 것은 두 번째 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처음 볼 때는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특히 외국영화일 때는 자막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영화의 디테일이 들어오지 않는다. <인셉션> <러쉬: 더 라이벌> <인터스텔라>를 처음 볼 때는 영화음악이 귀에 들리지 않았는데, 다시 볼 때서야 ‘음악이 이렇게 좋았나’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바 있다. (언급한 세 영화는 모두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았다.)

스물 여섯 살, 제대 직후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빌려 본 <러브레터>는, 한 여자가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의 죽음 뒤에도 그를 잊지 못하고 옛 흔적을 찾아 헤매는 영화였다. 죽은 애인과 동명이인인 여자는 남자와의 추억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였을 뿐이었다.

이번에 두 번째 관람에서는 완전히 다른 스토리였다. 매개체라고 생각했던 그 여자가 사실은 주인공이었고, 죽은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는 주인공의 옛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매개체일 뿐이었던 것이다. 스토리가 후반부로 향할수록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는 중학교 때의 첫사랑이었고, 현재의 애인은 단지 외모만 닮은 ‘유사품’이었다는 증거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남자는 정혼자와의 결혼을 망설이다 프로포즈를 하지 못했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며 불렀던 노래는 “나의 마음은 남풍을 타고 흘러가네”였다. 일본 남부 고베에 살고 있었지만, 북쪽의 오타루에 두고 온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실마리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정혼자는 마침내 남자가 죽어간 산을 찾아가 외친다. “오겡끼데스까”라고. 1990년대 후반 이 장면은 <러브레터> 그 자체였다. 인터넷이 잘 보급되지 않았음에도 수백 번은 본 것 같다. <러브레터> 때문에 일본어 배우기 열풍이 불었고, “오뎅 먹스므니까”류의 패러디에 엄청나게 활용됐다.
다시 본 <러브레터>에서 이 장면은 간절한 사랑의 그리움이 아니라, 남자에 대한 배신감에다 그간의 사랑을 부정당한 여자의 한 맺힌 절규였다. 그 뜻은 아마 ‘너 이 자식, 나한테 대체 왜 그랬니’쯤 될 테지만, 이 조신한 여자는 그저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너는 정말 잘 지내는 것이냐’고 외칠 뿐이었다.

반대로 관객인 나는 숨이 멎을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때는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잘 해주던 사람이 마음을 고백할 때가 아닌가. 주인공은 그 벅찬 감정을 10년 뒤에야 느낀 것이다. 그것도 남자가 죽은 지 2년 뒤에.

이런 영화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환경에서 집중해서 보길 권장한다. 술 마시고 보다가 잠들거나, 엄마가 밥 먹으라고 방문을 열어제끼는 상황보다는, 되도록 영화관에서 보길 바란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종국 기자 xyz@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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