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학식 먹을래 13화. "여대라 좋아요, 남자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이화여자대학교. 종종 떡볶이 먹으러, 베이글 먹으러, 타르트 먹으러 이대에 간다. 이화여대 앞은 디저트 천국이니까.
신기하게도 디저트에서 시작하는 나의 이대 투어는 항상 신촌에서 끝이 난다. 그리고 손에는 항상 옷이며 신발이 담긴 쇼핑백이 들려있다. 이거 왜 이런 걸까.
어쨌든 오늘은 한 눈 팔지 말아야지 다짐하고는 이대역에서 나와 곧장 앞만 보고 갔다. 정문으로 가는 미니 신호등을 건너니 이화캠퍼스 복합단지, ECC가 보였다.
오늘 점심 겸 저녁은 ECC 안에 있는 푸드코트로 정했다. 비싼 줄 도 모르고…
l 이화여대 ‘ECC 학생식당’ 등심돈까스와 치킨마요덮밥 (각 6,500원 6,500원)
학식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물었다.
“여대 어때?”
“처음부터 여대에 올 생각은 없었어요”
[ 잉여 계단, 파우더룸 있어서 집엘 안가요 ]
곰인지여우인지(*남자 이야기 할때는 여우 같은데 여대 이야기 할 때는 곰 같기도 하고. 이하 ‘인지양’)양은 초, 중, 고등학교 모두 남녀공학을 다녔다. 여자들만 생활하는 곳은 이십 평생 처음이다.
여자들만 있는 학교는 드센 기운으로 인해 공기부터 다르다. 새침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교내든 밖이든 1인용 테이블을 갖춘 카페가 많다. 성적 경쟁이 워낙 심해 학점 평점이 3.5 이상으로 높아도 장학금 받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내가 여대에 대해 내가 들은 평은 대체로 이랬다. 하지만 인지양의 평은 달랐다.
“여대 너무 편하고 좋아요! 학교에 잉여 계단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서 배달 시켜 먹고 누워서 자거나 만화책 볼 수도 있어요.”
“잉여계단? 거기 자주 가?”
“아니요. 그건 그냥 신기한 거. 저는 지금 PEET(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 준비 중이라 허덕허덕…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요. 그래서 집에 안 가고 도서관에서 자주 밤 새는데 그때 몇 번 갔던 것 같아요. 학교에 샤워실도 있고 파우더룸도 있어요. 헤어드라이기랑 고데기, 바디로션까지. 남녀공학 대학에는 이런 곳 없지 않나요?”

[ 미팅, 소개팅 걱정 없어요. 160명 단톡방이 있거든요 ]
“1학년인데 벌써 PEET 준비해? 그럼 남자친구는 학원에서 만난 거야? 신촌에 있는?”
“아니요. 소개팅요. 제가 입학한 자연과학대학 학부에 1학년이 160명 정도 되는데 학부생이 다 모여 있는 카톡방이 있어요. 수시 합격생들끼리 시작했다가 서로서로 초대해서 다 모인 거래요.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정보는 다 거기서 공유해요. 교수님 수업 스타일이나 과제 관련된 건 당연하고 밥 같이 먹을 친구 구한다는 것도 있고요. 뭐니 뭐니 해도 사실 메인은 소개팅 이지만요.”
“소개팅 멤버를 구하는 거야? 선착순 마감 이런 거?”
“네네. 멤버 모자랄 때 주로 모집하는 것 같아요. 저도 미팅 멤버 1명 모자란다고 해서 나간 적 있어요. 그날 미팅은 망했는데 같이 나갔던 미팅 멤버들이랑 친해져서 오히려 좋았어요. 지금도 종종 밥 먹고 그러거든요.”
“개인주의의 올바른 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보통 개인주의라고 하면 부정적인 어감이 있는데 인지양 말 들으면서 긍정적인 단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진심.”
“그리고 저는요. 여대에 와서 보니 처음부터 여중, 여고, 여대를 다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 남자랑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어요 ]
인지양은 초, 중, 고등학교 모두 경기도 어느 작은 동네에서 다녔다. 덕분에 다 거기서 거기였다. 초등학교 친구가 중학교 친구되고. 중학교 친구가 고등학교 친구되는. 그래서였을까? 남자아이들이 유독 짓궂었다.
“초등학교 4학년 수업 시간이었어요. 선생님이 안 계신 틈에 남자 애들 몇 명이 컴퓨터 앞으로 가는 거예요. 교실에 있는 TV도 켰어요. 그때 처음 ‘야동’을 봤어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영상이더라고요.”


“중학교 2학년 때도 그 남자애들이랑 같은 반이었어요. 쉬는 시간만 되면 제 주변으로 왔어요. 저랑 친한 여자 애가 있었는데 정말 예뻤거든요. 그 여자 애한테 관심 받으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우리를 앞에 놓고 한다는 이야기가 대부분 성 경험 이었어요. 그것도 자기 여자친구를 엄청 비하하면서요. 그래 놓고 나중에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자친구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갖은 애정표현을 하더라고요.”
“정말 결정적으로 트라우마가 생기게 된 건 ‘자위’예요. 수업시간에 혼자 자기 자리에서 자위를 하는 거예요. 제일 뒤에 앉은 것도 아니고 중간쯤 앉아서 하는 건 일부러 보라고 하는 거 아니었을까요?”
[ 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괜찮아야 하는데… ]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는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의미한다. 정신적으로 사고를 당해 그 충격이 평생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기억에 난 상처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되면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되는 일종의 병이라고.
인지양의 트라우마는 ‘남자’다. 야동을 보거나 자위를 하거나 성 경험에 대해 자랑스레 늘어놓는 남자들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남자’라는 성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것.
처음에는 ‘그땐 나도 그 애들도 다 어렸으니까’ 하면서 믿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 그러다 ‘여자를 좋아해볼까?’ 하며 성 정체성을 고민해 본적도 있었다. 결국 ‘그래, 여자도 남자도 다 본능적인 동물이니까’하며 인정은 했는데 머리로만 가능할 뿐 가슴은 따라주지 않았다. 인지양은 충격으로 인해 남자를 혐오하게 된 게 아니라 남자에 무관심해져 버렸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인지양은 현재 남자친구가 있다. 소개팅으로 만나 사귄 지는 50일 정도. 지금껏 사귄 중에 가장 오래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이유는 순수하고 착해서. 시간만 나면 인지양을 보기 위해 이대로 오니까. 그렇게라도 계속 만나다 보면 언젠가 설레 이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만 지난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잉여 계단, 파우더룸, 160명 단체 카톡방. 소소한 것들에서도 곧잘 설레고 즐거워하는 여대생이 정작 ‘남자’에게 설레지 않는다.’
늦게 만난 탓에 ECC를 나오니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진 뒤였다. 인지양은 오늘도 밤을 새울 거라며 도서관으로 갔고 나는 정문을 나와 그냥 걸었다.
디저트 가게가 있었는지도 모른 채, 어느새 나는 신촌역에 와 있었다.

기획·글 캠퍼스 잡앤조이 nyr486@hankyung.com그림 BOXI(웹툰 '여대생의 정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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