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08학번 ‘화석선배’의 하루


요즘 신조어 중 ‘화석선배’란 게 있다. 말 그대로 화석처럼 세월의 풍파를 모두 경험하면서도 취업을 위해 꿋꿋이 졸업유예를 통해 학교에 머무는 선배를 가리킨다. 유사어로는 삼엽충, 매머드, 시조새, 암모나이트 등이 있다.
여기, 월드컵이 두 번 지나갈 동안 학교를 떠나지 못한 화석선배가 있다. 서울의 한 대학 영어영문학과 08학번 양혜영(가명)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의 하루를 재구성해봤다.


영어영문학과 08학번 양혜영씨(27)는 오늘도 혼자 도서관 휴게실 구석자리에 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 커피는 역시 도서관에 비치된 200원짜리 자판기커피로 해결한다.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다시 책 넘기는 소리와 펜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적막한 열람실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양씨는 아직 취업준비생이자 대학생이다. 15학번 신입생과는 벌써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2년의 휴학 후 졸업을 앞둔 지난 2014년, 취업준비를 위해 세 번의 졸업유예를 통해 1년 6개월을 더 학교에 머물렀다. 그리고 올 8월 졸업을 한다. 취업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인턴기회를 얻어 우선 졸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턴에는 합격했지만 정규직이 보장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양씨의 취업준비기는 아직 현재 진행중이다. 원래 주로 학교 도서관을 이용했던 그는 1년 전부터는 집 근처 시립도서관을 찾고 있다. 벌써 2년 가까이 취업준비를 한다며 후배들에게 안 좋게 비춰질까 걱정된다.



"8시면 그냥 눈이 떠져요""오늘도 딱히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향하죠"

그의 하루일과는 오전 8시부터 시작된다. 아침기상과 함께 집에 있는 밑반찬으로 간단히 도시락을 싸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은 그가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선 공용컴퓨터부터 예약을 한 뒤 메일함을 확인한다. 취업관련 카페에 여러 군데 가입돼 있어 이곳에서 주간 채용일정 등 자료를 수시로 보내오기 때문이다.

자소서를 쓸 때 기업의 사업영역 등을 적도록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도 취업커뮤니티를 활용한다. SNS에 카페를 홍보해주면 카페 운영자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기업분석 자료를 준다. 어차피 보여주고 싶은 사진도 없는 터라 현재 그의 SNS는 취업자료를 받기위한 카페 홍보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혼자먹는 데 이제 익숙해졌어요""커피는 자판기커피로 해결해요. 자판기에서도 얼음이 나오거든요"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들고 휴게실로 향한다. 휴게실 안에는 이미 비슷한 모습으로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처음에는 혼자 밥을 먹는 게 어색했지만 이제 오히려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점심을 해결한 후에는 입가심을 위해 음료를 찾는다. 흔한 커피전문점 대신 저렴한 자판기 커피를 이용한다. 최근에는 자판기에서도 얼음이 나오는 아이스커피를 구입할 수 있다. 커피 한 잔을 뽑아 도서관에 비치된 경제지를 읽는다.

혹시 생길지 모르는 면접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또 곧 사회진출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꾸준히 경제상식을 쌓아놔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가끔 작성했던 자소서가 합격하면 취업카페를 통해 함께 서류전형에 통과한 사람을 찾아 스터디를 한다. 무엇보다 비슷한 모양새의 동지들을 만나면 더욱 위로를 받는다. 예전에는 학교 경력개발센터도 찾았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뜸하다. 역시 후배들에게 모습을 보이기 창피해서다.

"이 나이에 부모님께 손 벌릴 수 없으니 알바로 생활비 벌어요""언제 면접이 잡힐지 모르니 알바도 오래 못하죠"
저녁에는 잠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저녁식사 이후인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시급 6000원을 받는다. 중간중간 면접이 잡히기 때문에 일부러 저녁시간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택했다. 매일 1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밖에 못벌지만 당장 생활비로 쓰기에는 적당하다는 생각이다.

하루 종일 취업을 위해 온 힘을 쏟은 뒤, 날이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이나 분식류를 사 먹는다. 최근에는 김밥 한 개를 사면 음료수를 얹어주는 프로모션도 많아 행사가 있는 제품 위주로 구입한다.

집 문을 연다. 하루를 나름 알차게 보냈지만 여전히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은 견디기 힘들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과의 대화시간도 줄었다.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든다. ‘내일도 비슷한 하루가 되겠지…’ ‘난 요즘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자괴감을 안은 채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도희 기자(tuxi0123@hankyung.com)
[취업신조어]
청년취업시장의 3대 신조어가 있다. ‘광탈절(서류 및 면접전형에서 광속으로 탈락하는 날)’·‘화석선배(취업을 위해 화석처럼 학교에 머물며 공부하는 선배)’·‘이케아세대(뛰어난 스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낮은 급여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다.
<캠퍼스 잡앤조이>는 더욱 많은 이들이 요즘의 청년 취업시장을 심도 있게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세 개 신조어 각각에 해당하는 실제 현황을 시리즈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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