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공채 대비 인문학 노트] 세종대왕은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2014년 하반기 포스코 면접 기출 문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당시 중국과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대를 뚫고 백성을 위해 고집한 정책이었다. 한글 창제의 의의를 당시 중국과의 관계와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적어보시오.
잡앤조이가 제안하는 모범 답안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은 조선의 언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다. 당시 우리는 신라시대부터 한자를 사용했다.
하지만 한자는 문자교육을 받은 양반자제들에게 국한된 글이었다. 조선은 유학을 정치기반으로 두고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세워진 나라다. 그런데 조선의 왕이 네 차례나 바뀌는 동안 서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믿었고 귀족 양반의 아낙네들도 혼인을 하면 으레 부처님에게 가서 불공을 드렸다.
1397년에 건국된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여전히 불교국가였다. 나라의 국호가 바뀌고 정책이 바뀐다고 해서 백성들이 조상대대로 해 오던 것을 금세 그만둘 수 있었을까? 특히 종교적인 의례는 생명이 위태롭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 바꾸기 쉽지 않은데 말이다.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주변국이었다.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곧 중국과 분리되는 것을 의미했다. 한 나라가 다른 체계의 언어를 확보하면 독립성을 갖게 된다. 그런 독립성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원치 않았다. 그들은 ‘작은 중국’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왕이 중국과 다른 조선을 만들고 싶어 한 것이다. 이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중국에 대한 역성혁명이기도 했다. 세종은 왕좌의 위태로움을 각오하고 독립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하지만 세종의 다음 행보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뒤 처음 제작한 것이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다. 용비어천가가 나라의 근본과 조상을 찬미하는 노래라면, 월인천강지곡은 부처의 음덕을 기리는 노래다. 유교를 표방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소통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반포한 왕이 부처를 기리는 노래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현명한 행동이었다. 소통은 강요가 아닌 서로의 요구가 기반이 돼야 한다. 당시 백성들은 부처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관심을 가졌다. 아울러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나 문자, 소리라면 뭐든지 좋아했다. 반면 공자는 백성들과 상관이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세종은 공자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우선 부처를 전한 것이다.
세종 25년에는 ‘석보상절’을 한글로 번역해 부처의 일대기를 한글판으로 인쇄했다. 세종은 유교의 보급이 우선이 아니라 백성과 소통할 수 있는 글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중심의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조선 중기에 와서 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의 최대 공적은 역시 훈민정음이다. 오늘날 이렇게 우리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언어활동을 하는 것과,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대한민국이 된 것 모두 바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결과다.
세종의 소통은 당대에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결국 먼 미래를 통해 이뤄졌다. 지금 후손들이 겸손하게 살펴야 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내 당대에 결과를 찾지 말고, 민족과 먼 후손의 영광을 위해서 겸허하게 삶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이동우 롯데중앙연구소 HR Leader
온라인에디터 jobnj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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