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세계] “붓 끝으로 인생을 그려요. 한지에 마음을 담는 과정이죠” 청년 서예인 이정화
입력 2021-02-25 14:02:47
수정 2021-02-25 14:26:05
아버지 영향으로 놀이처럼 시작한 서예
뿌리깊은나무, 미스터션샤인 등 드라마에서 대필하기도
젊은 전통 예술인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 만들 것
인중 이정화(31) 서예인
경기대 서예문자예술학과 졸업
출연작 뿌리깊은나무, 미스터션샤인, 신입사관 구해령, 호텔 델루나
에세이 일희일비하는 그대에게
'인중(仁中)'이라는 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공부를 넓게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자주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은 그 안에 있다’라는 뜻이다. 인(仁)은 사랑을 뜻한다. 사람인변에 작대기가 두 개 붙은 형태는 ‘사랑’의 방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감싸야 한다는 뜻이다. 나 자신과 남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서예가가 된 데는 아버지 영향도 크다고 들었다
“부모님이 서예학원을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서예가시다. 학교 마치면 서예학원에 와서 글씨 쓰는 것 구경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예를 시작하게 됐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풍경이라 그런지 서예는 일종의 놀이였던 것 같다.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부담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꿈은 무엇이었나
“고3 때까지는 중국어 통역사를 꿈꿨다. 한자를 쓰는 작업이 많다 보니까 중국어도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정장을 차려입고 중요한 말들을 통역하는 직업이라 멋있어 보였다.(웃음)”
실제로 서예인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
“아버지는 성품상 제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해 주시는 분이다. 그래도 당신의 길을 이어걷겠다 하니 내심 기뻐하신 것 같다. 집에 서예와 관련된 책이 참 많은데 딸 셋이 아무도 관심이 없다면 쓸모 없어지는 책이라는 우스갯소리도 하곤 했다. 이제 그 책을 제가 간직할 수 있게 돼 좋다고 하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다른 직업도 경험해보기를 추천하시긴 했다. 그래도 지금은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더 큰 조력자로서 응원해 주신다.”
아리랑 유랑단 소속으로 해외도 많이 다녀왔다.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신기하다는 반응이 큰 듯하다. 하얀 종이에 먹으로 글씨를 쓰는 과정에서 똑같은 문자를 써도 붓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농도에 따라 색이나 모양이 달라지는 것들을 보고 ‘아름답다’, ‘조화롭다’는 반응을 많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외국인들에게 실제로 서예를 체험해보는 시간을 마련해 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지는 시간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국가별로 서예에 특징이 있나
“있는 편이다. 우리나라는 선비 정신이 있어서 다소 정중하고 차분한 느낌이 있다. 서‘예’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술적인 표현도 많은 편이다. 한자뿐만 아니라 한글로도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도 특징이다. 일본은 서도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좀 더 날카롭거나 얇고 섬세한 느낌을 준다. 중국은 서법이라고 표현하고 정법에 맞는 느낌을 주려고 한다. 한자 문화권인 만큼 좀 더 다양한 느낌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글씨를 설명한다면
“외적인 부분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조금 강하고 날카로운 남성미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는 한문을 전공하다 보니 필획에 그러한 정통성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서여기인’이라는 말이 있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뜻인데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느냐에 따라 다양해지는 것 같다.”
서예는 집중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지 않나
“필요하다. 차를 타놓고 글씨를 쓰는데 차가 식어 완전히 차가워질 때까지 글씨를 쓴 적도 있다. 체력도 많이 필요하다. 장시간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서예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젊은 서예인들끼리 소통도 하는 편인가
“서예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조금 한정적이다. 젊은 사람들도 별로 없는데 뭉쳐보자 해서 만들어진 것이 2015년부터 시작된 ‘80후’다. 1980년 이후 출생인 서예 전공자들이 모여서 전시를 하거나 친목을 도모하는 커뮤니티의 장이다. 늘 든든한 서포터 같은 느낌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서예의 가장 큰 매력을 꼽는다면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는데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매력이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부담이 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매력인 부분이다. 서예가 아니더라도 펜을 지우면 화이트 자국이 남고, 연필은 눌러 적은 자국이 남는다. 먹은 지울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함부로 쓸 수 없다. 인생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지는 하얀색이지만 붓을 들 때마다 은은한 달빛에 우주를 담는 느낌이 든다. 이런 매력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도 출연했다
“연락을 받았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드라마 촬영으로 대필하던 때는 몇 번 TV프로그램 촬영은 해본 적 있지만 본격적인 예능 출연은 처음이었다. 특히 서예가 알려지면서 옛날처럼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전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유재석 님 팬이어서도 좋은 경험이었지만.(웃음)”
젊은 서예가로서 주목을 많이 받았다. 부담감은 없었나
“처음에는 많이 부담감을 느꼈던 것 같다. 동시에 미안함도 느꼈다. 80후에도 충분히 주목받을만한 인재들이 많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했던 것 같다. 방송에 나가고 언니 오빠들과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쓸데없는 소리라고 혼났다.(웃음)”
드라마나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붓으로 감정을 연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한데
“미리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드라마 촬영 때는 미리 가서 배우가 어떤 감정인지 감독님과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슬프다면 감정을 담아 천천히 억누르듯 쓰고, 독화살을 맞은 상황이라면 굳어가는 몸으로 힘겹게 쓰는 등 다양한 감정을 붓끝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간신 촬영할 때였다. 민규동 감독님이 ‘글씨가 섹시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눈물을 많이 흘리며 글씨를 쓰는 장면이 있는데, 내가 쓰는 글자 위에 감독님께서 안약을 떨어뜨려주셨던 기억도 있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목표가 있나
“가장 고민을 많이 했던 질문인 것 같다. 지금처럼 꾸준하게 서예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자기만족에 취하지 않고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서예가로서 성장하는 것이 다음 목표다. 선후배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찾고 싶다.”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들 너무 잘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리랑 유랑단으로 해외를 다닐 때 나는 내가 서예 국가대표라고 생각했다. 그들 역시 각자 자리에서 그 분야의 대표라고 생각하며 같이 걸어가고 싶다.”
subin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