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인생] KAIST 교수 이민화 “새로운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나, 늘 두리번거려라”


겨울 눈 덮인 산을 오를 때, 앞선 이가 눈을 밟고 다지며 길을 만들어 나아가는 것을 ‘러셀(russel)’이라고 한다.

눈 덮인 광야를 홀로 걸으며 길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한 작가는 러셀을 ‘뒤따르는 사람을 위한 절대 희생의 길’이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독의 길’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한국 최초의 벤처기업 ‘메디슨’을 설립한 이민화 카이스트(KAIST) 교수는 국내 벤처산업에 길고 긴 ‘러셀’을 남겨온 사람이다.

그는 벤처기업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벤처 생태계를 키워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초대 기업호민관으로 활동하며 각종 불합리한 규제를 해소해 중소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지금도 차세대 영재들을 기업인으로 양성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정표 없는 선두 주자의 삶은 때때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기보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쪽을 택했다.

메디슨 창업 이후 30여 년의 삶. 그의 걸음이 닿은 곳마다 길은 단단하게 여물었다. ‘도전’과 ‘혁신’이 그가 길 위에 세운 푸른 이정표였다.


5월 의 햇살이 내리쬐던 1985년의 어느 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파공학과 초음파 연구실. 석·박사 과정 연구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모임을 주도한 이는 수석연구원이던 33세의 청년 이민화였다. 당시 그들의 연구를 후원하던 기업이 사라지면서 그동안 해온 ‘초음파 진단기’ 프로젝트가 사장될 위기에 처하자 대안을 찾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이민화의 입에서 ‘창업’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 연구원들의 시선이 부딪혔다. 연구만 알았지 사업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초짜’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의 연구 결과가 세상에 나가 빛을 보려면 방법이 없다”는 그의 말에 연구실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가 낳은 자식 우리가 키워보자”는 의기(義氣)와 “젊을 때 회사 말아먹는 것도 재밌지 않겠느냐”는 호기(豪氣)로, 한국 최초의 벤처기업 ‘메디슨’이 탄생했다.

당당하게 회사 대표를 맡았지만 학창 시절까지 그는 남들 앞에 서지 못할 정도로 수줍음 많은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난생처음 반장이 됐는데, 학생들 앞에서 경례 구호 붙이는 것을 못해서 얼굴이 빨개진 채 단상에서 내려왔다”는 일화를 전할 정도다. 군에 계신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니 전학이 잦았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친구를 새로 사귀어야 했다. 전학 수속이 길어지면서 학교를 가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유년 시절의 그는 친구와 어울리기보다 혼자 책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더 즐기게 됐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는데 역사책과 과학책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까진 법관을 꿈꿨다. 법대가 아닌 공대로 진학하게 된 계기는 그가 고3이 되던 해 일어난 사법 파동 때문이었다. “사법권을 탄압하는 정권의 모습에 회의를 느꼈다”고 했다. 법대 진학의 꿈을 포기한 그는 예비고사를 치기 직전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하는 모험을 택했다. “법대를 빼고 보니 이공계밖에 갈 곳이 없었어요. 이과에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전자과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화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타협을 본 게 전자공학과였습니다.” 그의 과감한 선택은 대학을 마친 뒤 카이스트(KAIST)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과정에 진입하면서 ‘메디슨’ 창업의 연(緣)으로 맺어졌다.



‘신기루 초음파’ 우리는 실패도 지원한다

학과 선택의 계기처럼 창업 기회도 우연히 찾아들었다. 탄탄한 준비 없이 시작한 창업이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게다가 이 교수가 사업을 시작한 1980년대 중반엔 벤처기업에 대한 사회 인식이나 인프라가 전무했다. “제품을 만들 때 키보드 하나도 사올 곳이 없었습니다. 할 일은 많은데 부족한 것이 많고 팀원 중에 사업을 해본 사람도 없으니 실패를 겪을 수밖에요.” 처음 개발했던 제품으로 의료기기 박람회에 출품했을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한 의사가 오더니 ‘이게 뭐냐’고 묻는 겁니다. ‘초음파 진단기’라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초음파 비슷하긴 한데…’였죠. 그 제품에 붙여진 별명이 ‘신기루 초음파’였습니다. 화면이 보이다 안 보이다 하고, 작동이 안 되다가도 발로 차면 되고 하는 식이었지요.”

결국 첫 해에 팔았던 제품 30대를 이듬해 전부 리콜(recall)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었으니 충분히 값진 경험이라는 것.

“사람들은 실패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실패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실패는 학습의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전과 실패는 마치 동전의 앞뒤와도 같죠.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가 옵니다. 이때 실패를 야단치면 사람들은 다시는 도전하지 않게 됩니다.”

‘도전을 장려하고 실패를 지원한다’는 벤처 정신은 ‘메디슨’ 기업 문화의 핵심이 되어 훗날 메디슨이 세계적인 의료기기 회사로 도약하는 데 단단한 디딤돌이 됐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그가 깨달은 것은 대기업과의 정면승부는 무모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현실적으로 다윗이 이기기 힘듭니다. 벤처기업이 성공하려면 특허 기술을 이용해 대기업과 손을 잡거나, 대기업이 놓친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것이 확률이 높지요.” 메디슨의 초기 전략은 틈새시장 공략이었다. 대기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지방 병원들을 찾아갔다. 새로운 의료기기의 사용법을 모르는 개업 의사들을 위해 제품과 교육을 통합한 서비스를 팔았고 그 전략은 적중했다.

사업이 커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밤기차를 타고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는 날이 많았다. 직원들이 퇴근할 때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보내며 그가 깨달은 또 하나의 원칙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힘든 일도 힘들지 않다는 진리였다.

“젊었을 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도전하는 그 자체’를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도전해서 실패하더라도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 안정적으로 사는 삶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한 거죠.”

EPSON MFP image

‘코스닥의 아버지’ 국내 벤처산업의 기반을 닦다

메디슨 창립 10년 후인 1995년, 그는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했다.

“메디슨이 출범했던 시기엔 한국에 벤처 제도라는 게 없었어요. 자금, 인력, 시장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실패하며 배운 것들을 사회 전반으로 넓힐 필요를 느꼈습니다.”

초대 회장으로 부임하며 그가 목표로 세운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코스닥(KOSDAQ) 설립과 벤처기업특별법 제정이다. 코스닥이 벤처기업들의 자금 조달을 위한 것이라면 벤처기업특별법은 창업 촉진을 위한 것이었다. 두 제도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한국의 벤처 생태계를 키울 수 있기를 기대했다.

메디슨은 코스닥 설립 이전, 한국 벤처기업 최초로 코스피에 상장했다. 당시 전 세계 70개국에 의료 영업망을 구축하고 있던 메디슨은 코스피를 통해 세계 진출 자금을 마련했고, 훗날 한국 의료기 수출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코스닥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다른 것은 벤처 생태계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세계적으로 IT 기업 주가가 치솟았을 때 메디슨이 보유한 주식 일부를 매각해 회사의 부채를 상환하자는 참모진의 제안을 고사한 것도 ‘코스닥 설립을 주창한 사람이 대규모로 주식을 팔면 자칫 부정적 이미지를 줄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까닭이었다. 결국 그해 말, IT 버블이 무너지며 메디슨의 주가도 급락했다. 그는 메디슨 부도의 책임을 지고 2001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벤처기업 경영 노하우를 사회에 환원하는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2009년부터 2010년 말까지 초대 기업호민관으로 활동하며 중소기업 발전을 가로막는 불합리한 규제를 푸는 역할에 집중했다. ‘보복금지제’와 ‘연대보증’ 문제, 통신규제 및 자영업 문제, 대중소기업의 공정거래 문제까지 창조적인 기업의 발전 기반을 닦기 위한 과제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 밖에 IT 산업의 강점을 이용한 의료서비스 융합 사업인 ‘디지털병원 사업조합’ 이사장, 한국의 새로운 개방 국가 전략을 제시한 ‘유라시안 네트워크’ 이사장, 기술경영대학원·과학영재교육연구원에서 영재기업인을 양성하는 ‘KAIST 교수’ 등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다양한 직함은 그의 도전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월화수목금금금’ 일해야 성공한다는 생각은 구시대적 발상”

다양한 활동 중 이 교수가 현재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한국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드는 일.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21세기의 경쟁력을 갖춘 구조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새로운 꿈을 설명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월화수목금금금’ 일할 수 있는 성실한 인재상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창조적인 인재가 각광받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인재가 되려면 ‘인문학적 사고’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기술을 통해 원가(Cost)를 낮추는 방식으로 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면 이제는 제품 가치(Value)를 올려 경쟁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 “가치(Value)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영역입니다. 사람들이 감성으로 느끼는 ‘가치’는 기술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기술과 감성, 인문학과 테크놀로지, 이 두 가지가 선순환하는 구조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보다는 ‘익숙한 안정’을, ‘실패를 통한 배움’보다는 ‘성공이 주는 인정’을 바라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그가 주장하는 ‘창조적 인재’와는 다소 거리가 느껴진다. 지난 30여 년간 도전하는 삶을 살아온 이 교수가 바라보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떨까? 그는 오히려 “젊은이들이 사회가 만든 틀에 안주하게 된 것은 기성세대의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2000년까지 한국에서 1만 개 이상의 벤처기업이 만들어졌죠. 이것은 새마을 운동보다 더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중 절반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어요. 이 과정을 지켜본 학생들이 창업을 하지 않는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재도전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라고 지적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도전하는 삶’의 행복을 놓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나’ 계속 찾아가는 것입니다. 행복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나옵니다. 새로운 세상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면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보람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전하는 과정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이죠.”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도 재도전 기회를 주는 사회로 바뀌어갈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덧붙였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믿고 도전하십시오. 도전해보지 않은 사람은 행복을 알 수 없습니다. 도전을 통해 얻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민화 KAIST 교수는?
1953년 대구 출생
1976년 서울대 공과대 전자공학과 학사
1978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 및 전자공학 석사
1986년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 박사
1985년~2001년 메디슨 대표이사
1995년~2000년 벤처기업협회 초대회장
2006년~2009년 한국기술거래소 이사장
2008년~현재 유라시안네트워크 이사장
2009년~현재 KAIST 초빙교수,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2009년~2010년 기업호민관실(중소기업 옴부즈만실) 호민관
2011년~현재 한국디지털병원 수출사업협동조합 이사장





“중퇴해야 성공하는 사업도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카이스트 디지털 미디어 연구소에서 진행된 이날 인터뷰에는 대학창업동아리연합(PEUM) 회원들이 동석했다. 원조 벤처 세대와 차세대 예비 창업가들이 만난 자리에선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훈훈했던 방담의 일부를 전한다.

PEUM 부모님은 제게 창업보다 사회 경험을 먼저 쌓으라고 하세요. 창업과 취업, 무엇을 먼저 하는 게 좋을까요?

이민화 ‘어른들이 그러더라’ ‘뉴스에서 그렇다더라’ 하는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현상에 집착하기보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성공하는 벤처 사업가들의 특징입니다. 사업은 기본적으로 시장과 기술의 결합인데 어떤 사업은 시장 기회가 중요하고, 어떤 것은 기술이 중요합니다.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업은 경험과 내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시장이 변해 기회가 생겼을 때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됩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주커버그는 모두 대학을 중퇴했지요? 이들은 사업 기회를 봤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소셜 커머스’로 뜬 회사들도 마찬가지예요. 시장 기회가 중심이 되는 사업은 먼저 시작하는 자가 유리합니다.

PEUM 창업을 하면 외롭지 않을까요? 창업 초기의 외로움은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이민화 사람마다 성향이 다를 텐데 저는 대체로 낙관적입니다.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특별히 외로워본 적도 없고 후회해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제휴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손잡는 일을 잘해야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의 장점을 잘 볼 수 있어야 해요. 사업은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통해 일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PEUM 여러 기관에서 창업 공모전을 개최하는데 중구난방 식으로 아이디어만 수집하는 곳이 많은 것 같아요.

이민화 얼마 전 한 창업 공모전에 평가를 하러 갔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보면 떨어진 팀 중에서도 좋은 회사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창업 공모전의 평가도 초보 단계입니다. 중구난방 식으로 하고 있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이 처음 시작할 때는 조금 거칩니다. 하지만 올해가 지나면 더 좋아질 것입니다. 평가 그 자체도 평가를 받기 때문이죠. 창업 공모전도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가겠지요. 질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것은 피드백입니다. PEUM 같은 젊은 친구들이 창업 공모전을 평가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참가 대학생(가나다순)
강경대(광운대 경영학과), 송미경(서울여대 경영학과), 이경민(동국대 경영학과), 이정진(중앙대 경제학과), 조민정(숭실대 경영학과), 최동원(동국대 산업시스템공학과), 최용철(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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